[북리뷰] 토마 피케티. 평등의 짧은 역사. 그러나. 2024.
진정한 대안은 민주적·참여적·연방제적·환경적·다문화적인 사회주의다.
이 제도는 18세기말부터 시작된 평등을 향한 긴 여정의 논리적 귀결이다.
- 토마 피케티. 평등의 짧은 역사. 그러나. 2024. 299쪽.
요약을 하고 분량을 줄여야겠다고 생각했고, 이 책이 바로 그 시도의 결과물이다. - 18쪽
스스로 “역사서이자 사회과학서”라고 규정한 이 책은, 감사의 말에서 밝힌 바와 같이, 이전에 이룩한 연구 성과들을 요약하는 것이 첫 번째 목표입니다. 쇠유출판사에서 2021년에 350페이지로 엮은 이 책은 이전에 피케티가 저술한 세 권의 책, 『Les hauts revenus en France au XXème siècle』(Grasset. 2001. 807p.), 『Le Capital au XXIe siècle』(Seuil, 2013. 970p.), 『Capital et idéologie』(Seuil, 2019. 1232p.)을 1/10로 요약했다는 겁니다.
덧붙여 그간에 이루어냈던 “연구의 핵심적인 성과들을 단순히 종합해 보여주는 데 그치지 안”고, “연구가 촉발한 다양한 논의를 되짚는 동시에 불평등의 역사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다고 말합니다. 또한 “인간 사회에서 나타난 사회 계급 간의 불평등을 역사적으로 비교한 책”으로, “사회적·경제적·정치적 평등의 확대를 향한 장기적인 흐름이 있어왔음을 우리가 알게 될 것”이라고 호언합니다.
세 권 중에 첫 책인 ‘20세기 프랑스 상위 소득’은 번역되지 않았고, 한국어판이 출간된 『21세기 자본』과 『자본과 이데올로기』 두 권을 합하면 2,000페이지 정도입니다. 여간 두툼한 벽돌책이 아닙니다. 목차를 살펴보느라 도서관에서 책을 꺼내 들었을 때부터 이미 질려버렸습니다. 쉽사리 손을 데지는 않을 듯합니다.
안 그래도 『21세기 자본』 출간 이후 전 세계적인 신드롬을 일으킨 뒤, 토마 피케티는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와 신자유주의 경제학자들로부터 전방위적인 공격을 받았습니다. 2차 자료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연구방법론의 한계를 지적하는 것은 물론이요, 데이터 분석에 있어서의 인과관계의 오류라던가, 모델의 과도한 단순화와 같은 지적도 이어졌습니다. 마이클 샌델과 마찬가지로 한국 사회에서는 ‘정전(canon)’의 지위를 획득한 것으로 보이는 피케티의 책에 손이 안 갔던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제야 이 책을 손에 쥐었던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벌써 2024년이고, 물어뜯길 대로 다 뜯겼을 테고, 따라서 자기반성도 충분히 이루어졌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니 교정할 건 교정하고, 진지를 구축해야 할 이론적 토대는 충분히 보강했으리라는 기대가 있었습니다. 읽고 나니, 그럭저럭 예상대로였다 싶습니다.
예상했던 것보다 편하게 책을 읽을 수 있었는데요, 아무래도 낸시 프레이저와 뤼카 샹셀의 책을 읽어두었던 것이 도움이 된 듯합니다.
먼저 이 책의 미덕으로 지적해야 할 부분은, 저자가 저명한 경제학자임에도 불구하고 결코 ‘경제학’이라는 좁은 테두리에 갇혀 있지 않다는 점이다. (불)평등에 대한 각종 데이터를 체계적·조직적으로 수집하고 이에 근거하여 여러 현실과 추세를 세세하게 보여주는 저작으로 명성을 얻은 저자이지만, (불)평등의 문제가 결코 경제적 데이터와 수치로만 파악할 수 있다거나 모종의 경제적 ‘법칙’ 같은 것으로 분석할 수 있는 좁은 의미의 ‘경제적’ 현상이 아니라는 자명하지만 너무나 자주 간과되고 있는 진리를 그야말로 정면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 5쪽, 홍기빈의 추천사 중에서
인문학적 연구 방법과 사회과학적 연구 방법은 꽤나 큰 차이를 보여줍니다. 통계와 데이터를 다루는 사회과학적 연구 방법은 가설 설정과 검증이라는 연역적 방식의 추론이 대세를 이루기 때문에, 인문학적인 ‘해석’을 경계해야 합니다. 특히나 통계가 보여주지 않는 ‘인과관계’를 억지스럽게 가져오는 ‘오류’는 치명적이기까지 합니다.
그래서 피케티의 저작들은 사회과학적으로 들여다봐야 하는 ‘통계와 데이터’를, 인문학적인 ‘사료’로 ‘멋대로 해석’한다는 비판이 많았습니다. 직접 검증한 바 없기 때문에 그와 같은 지적이 합당한가에 대해서는 동의할 수는 없습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전문가인 학자들의 비판을 무시할 수 있을 정도의 수준도 못되기에 확정적 판단을 보류하면서 잠정적인 사실로 유예하는 태도 정도는 갖추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이 책을 읽고 보니, 피케티의 연구 방법론에 의문을 제기하긴 어려워 보인다 판단했습니다.
우선 피케티 스스로가 데이터의 불완전성을 인식하고 있고, 따라서 그에 근거한 지표 설정에 대해 회의적인 태도를 갖추고 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한 번 더 분명히 말해두자. 사회-경제적 지표들을 비롯하여 이 책에 나오는 역사적 시계열들, 그리고 통계 일반은 모두 불완전하고 일시적이며 취약한 구성물에 불과하다. 이것들로 ‘궁극적인’ 숫자적 진실을 확립하거나 ‘사실’을 확증할 수는 없다. - 51쪽
1차적 자료가 존재할 수 없는 이런 상황에서, 장기간에 걸친 시계열적 분석에 제한적인 자료를 활용하지 못하는 것도 경계해야 한다고 피케티는 말합니다. “모든 통계는 사회적 구성물이라는 사실을 단순히 지적하는 데 그쳐서는 안 된다”며, “분별 있게, 적절한 수준에서, 비판적으로 사용한다면 사회-경제적 지표의 언어는 지적 민족주의에 맞서고 경제 엘리의 조작에서 벗어나고 새로운 평등의 지평을 열기 위해 자연 언어를 보완하는 필수적인 도구가 될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다만, “해석이 꽤나 추상적인 지니 계수와 타일 지수”보다는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직관적인 개념들”로 분위배율을 지지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다음과 같은 주장에 도달하게 됩니다.
소득, 소득 분배의 불평등, 그리고 시간에 따른 불평등의 변화를 측정하지 못한다면, 부자들에게 집중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정의의 규범을 마련하는 것도, 가난한 사람들이 수용할 수 있는 방식으로 세계 경제 질서를 재편하기 위해 정의의 기준을 수립하는 것도 쉽지 않을 것이다. 사회-경제적 불평등을 획기적으로 축소하려는 결단력과 행동 없이는 환경과 기후 위기도 해결할 수 없다. 이런 관점에서 환경과 경제의 다양한 지표를 결합해 사용하는 것이 필요하다. - 49쪽
인류의 진보는 기정사실이다. 1820년부터 의료와 교육 분야에서 천 세계적으로 일어난 변화를 살펴보기만 해도 그런 확신이 든다. 비록 가용 데이터가 불완전하긴 하지만, 변화의 추세는 확실하다. - 37쪽
피케티는 “19세기말부터 20세기 내내 사회적 국가, 교육과 의료를 비롯한 기초적 재화의 접근에서 실현된 일정 정도의 평등, 그리고 상위 소득과 자산에 대한 강력한 누진세 적용”을 통해 불평등이 감소했다고 봤습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1789년 프랑스혁명이 귀족들의 특권을 폐지한 것은 결정적인 진전이었음이 분명하나, 돈에 기반한 무수한 특권을 모두 없앤 것은 아니었다”라고 분석합니다. 특히나 “프랑스 혁명기에 이루어진 부의 재분배가 우리가 흔히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제한적인 규모로 이루어졌다”라고 덧붙이고 있습니다.
18세기와 19세기 유럽의 약진에서는 “대항 세력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전 세계를 상대로 일방적인 무소불위의 군사력을 휘둘렀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고 지적합니다. 특히나 “부채를 통한 강압이라는 식민주의 시나리오”는 전가의 보도처럼 폭넓게 사용됐다고 지적합니다. 특히나 “노예제 이후의 식민 사회들에서는 극도로 차별적인 사법·사회·조세·교육 제도를 통해 불평등이 만들어진 것”이라고 봤습니다.
1914~1980년 사이 소득과 자산의 불평등은 대부분의 서구 국가들뿐만 아니라 일본, 러시아, 중국, 인도에서도 현격히 감소했다고 분석하고 있습니다.
“1914~1950년이 국가의 역할이 바뀌는 데 결정적으로 중요한 시기”였다고 봤는데요, 제1차 세계 대전 직전만 해도 유럽 국가는 “국민소득의 10%에 불과하던 세수의 대부분인 8%를 국가 핵심 기능(군대, 경찰, 사법, 행정 일반, 기초 사회 간접 자본)에 투입”했지만, 1950년대 초반에 오면 “국민소득에서 세수가 차지하는 비중이 30%를 넘어서게 되며, 이 세수의 2/3가 교육 및 사회 복지 지출에 사용”하게 됐고, 특히 1950~1980년 사이에 더욱더 확대됐다는 겁니다. 이는 “제2차 산업 혁명기에 최소한의 기술과 디지털 능력을 갖춰 제조 공정을 이해할 수 있고, 설비 매뉴얼 독해 능력 등을 갖춘 노동자”를 갖추는 교육 수준을 이룰 수 있었고, 미국, 독일과 일본이 신산업 분야에서 선전할 수 있었다고 분석하고 있습니다.
이때 “어떻게든 세수를 늘려야 하는 상황”에서 부자들에게 고율의 누진세를 적용할 수 있었는데요, 이는 “나중에 전 재산을 몰수당할지도 모르는 위험을 감수하느니 차라리 강력한 누진세를 수용하는 편이 낫다고 판단”하게끔 몰아친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의 위협이 큰 몫을 했다고도 봅니다.
이렇게 “몰수에 가까운 수준의 높은 세율”은 “자산과 소득의 격차를 현저히 감소시키고, 중위 계급과 민중 계급의 상황을 개선했으며, 복지 국가를 확대하고, 전반적인 사회적·경제적 성과를 높였다”라고 분석합니다.
다만 현재는 “역진적이진 않지만” 실질적으로는 역진적인 불평등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고 덧붙였습니다. 이는 “평등주의 연합이 설득력 있는 대안적 서사를 만들어내지 못했고, 사회적 국가와 누진세를 중심으로 막강한 민중의 집단행동을 이끌어내는 데 실패”했기 때문이라고 봤습니다.
여기에 식민주의 시대는 끝났지만, 경제계(économic-monde)는 여전히 극도로 위계적이고 불평등한 방식으로 작동하고 있다고도 봤습니다. “자본이 사회적·환경적 목표를 갖지 않은 채 통제받지 않고 자유롭게 이동하는 현재의 경제 체제는 부자들을 위한 신식민주의나 다름없다”라고 선언합니다.
무엇보다 영광의 30년(1950~1980년)이 “후진국에게는 빈곤과 높은 인구 압력 속에 독립 전쟁과 주권 국가로서의 첫발을 내딛기 위한 힘겨운 투쟁으로 점철된 시기”였다는 겁니다. 이 시기의 선진국들은 “민족 국가 테두리 내에서, 자국민을 위한 사회 보장 제도와 교육 및 사회 간접 자본에 투자하면서 발전했을 뿐”으로, 식민지나 나머지 세계에는 무관심한 시기였다고 분석합니다. 특히 ‘워싱턴 컨센서스’는 “작은 국가, 긴축 예산, 무역 자유화, 전방위적 규제 완화를 강요하며, 신식민주의의 한 형태”로 작동했다고 덧붙였습니다.
국제 원조라는 개념에도 심각한 위선이 존재한다고 봤습니다. “공적 개발 원조는 세계 GDP의 0.2%에도 미치지 못하며, 원조 대상국 중 대부분의 국가에서 다국적 기업의 이익과 자본 유출을 포함한 전체 자금 유출 규모가 공적 원조 형태의 유입 규모보다 몇 배나 크다”라고 지적합니다.
따라서 “가난한 국가들은 다국적 기업과 세계 억만장자들에게 부과되는 세금의 일부를 받을 권리를 가져야 한다”라고 주장하는데요, “인간이라면 누구나 동등하게 의료, 교육, 안전에 대한 최소한의 권리를 누려야 하고, 부유한 경제 행위자들이 이룬 번영은 전적으로 세계 경제 시스템과 국제 노동 분업 덕분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피케티는 “자연은 비어 있는 상태를 끔찍이 싫어한다”면서. “앞으로 어떤 형태든 간에 포스트민족적인 민주적 기획이 등장하지 않는 한, 그 빈자리를 권위주의적 체제들이 차지하게 될 것”이라 예측합니다. 따라서 챕터를 넘어갈 때마다 조금씩 늘어나는 주장은 마침내 마지막 장에서 다음과 같이 종합합니다.
이 책에서 나는 민주적이고, 연방제적인, 분권화되고 참여적인, 환경적이고 다문화적인 사회주의의 가능성을 주장했다. 이 사회주의는 사회적 국가와 누진세의 확대, 기업 내 권력 분유, 포스트식민주의 배상, 차별 철폐, 교육 평등, 개인 탄소 카드 도입, 점진적인 경제의 탈상품화, 고용 보장, 모두를 위한 상속, 화폐적 불평등의 대폭 축소, 그리고 마침내 금권의 영향에서 벗어난 선거와 미디어 시스템의 기반 위에서 작동하게 될 것이다. - 313쪽
민주적인 사회주의를 위한 방법론으로는 “시민 의회라던가 집단 숙의를 위한 국민 투표 같은 다양한 정치 참여 방식이 활성화되어야 할 것”이며, “이들 캠페인을 위한 자금 조달과 정보 생산과 확산의 평등 문제가 철저히 다루어져야 한다”라고 말합니다. 무엇보다 “정당과 선거 캠페인, 언론에 대한 평등한 재정 지원 원칙의 수립은 반드시 정당화되어야 할 뿐만 아니라, 평등주의에 바탕을 둔 진정한 민주주의의 실현을 위해 필수 불가결한 것으로 인식되어야 한다”라고 주장합니다.
분권적이고 참여적인 사회주의를 위해서는 노동자의 경영 참여에 대해 숙고하고 있습니다. “노동조합권 전반에 대해 유럽 차원, 그리고 초국적 차원에서 재고”하여, “임금 노동자의 노조 가입과 참여를 쉽게 해 주고, 공동 입찰 자격을 집단 협약 체결 기업으로 제한하며, 노조가 노동 현장에 가고 거기서 회합을 가질 수 있는 권리를 확대/보장해 주는 등의 방법을”을 적극적으로 검토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다문화적인 사회주의를 위해서는 “출신에 상관없이 권리와 기회의 평등을 누려야 한다는 이론적 원칙만 설파하는 형식적 평등을 넘어서, 이 원칙이 현실에 부합하는지 아닌지 확인할 방법은 갖추어야 한다”라고 봤습니다. 따라서 “선진국 개도국 가릴 것 없이 만연해 있는 젠더 차별, 사회적 차별, 종족-인종 차별을 철폐할 수 있는 지표와 절차들을 만들어내는 것이 시급하다”라고 주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