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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철 Oct 09. 2024

오키나와 서발턴은 말할 수 있는가?

[북리뷰] 다카야마 하네코. 슈리의 말. 소명출판. 2023.

 얼마 전 이치카와 사오의 『헌치백』을 읽고 나서 살펴본 논문 중에는 김경희의 「오키나와 서발턴의 기억계승과 당사자성」이 있었습니다. 재현의 윤리와 당사자성을 살펴보기 위해 이런저런 논문들을 살펴보던 와중에 발견한 논문으로, 서발턴(subaltern) 개념과 당사자성 개념에 대한 정리가 참 잘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연찮게도 얼마 지나지 않아 이 책을 읽게 됐네요. 이 소설과는 직접적으로 연관되는 논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선 서발턴의 개념부터 확인해 볼 필요가 있을 듯한데요, 김경희는 이 논문에서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습니다. 안토니오 그람시(Antonio Gramsci)에 의해 도입된 개념으로, “지배계층의 헤게모니에 종속되어 권력을 갖지 못하는 하층계급(Subaltern)이라는 의미로 사용하면서 프롤레타리아를 대신하여 지칭”했다고 정리합니다. 이후 문학 비평 용어로 자리 잡게 된 것은 1988년 가야트리 차크라보르티 스피박(Gayatri Chakravorty Spivak)의 글 「서발턴은 말할 수 있는가? Can the Subaltern Speak?」를 통해서였습니다. 스피박은 “서발턴의 개념을 통해 19세기 대영제국의 식민 역사와 인도의 지배계급인 토착주의자들의 가부장제 사이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없었던 이중적인 억압의 구조 속에 놓인 인도의 여성들에 주목”했다고 봤습니다.

 스피박의 질문은 서발턴 개념을 비평적으로 고민하기 위한 중요한 질문이 아닐 수 없는데요, 4 단어로 참 절묘하게 표현했습니다. ‘speak’라는 단어의 뜻풀이는 ‘자기 목소리를 사용해 무언가를 말한다’는 겁니다. 주체성을 강조하고 있는데요, 이런 경우에 일본과 한국에서 동원되는 비평용어가 바로 당사자성입니다. 서발턴이 자신의 이야기를 자신의 목소리로 낼 수 있는가의 문제는 주로 전문가들에 의해 대변되는 것으로 귀결되면서, 타자화되고 주변화된다는 겁니다. 김경희는 “서발턴이 말할 수 없는 구조 속에 놓여 있고, 서발턴의 목소리를 들으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며, 그들에게 말할 권리를 주지 않음으로써 그들의 목소리는 닿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라며 스피박의 견해를 부연하고 있습니다.

 이 개념에 근거해 김경희는 “오키나와는 그야말로 서발턴적 상황에 놓여 있다”라고 선언합니다. “일본 정부는 지속적으로 민심을 무시하며 오키나와의 목소리를 부정해 왔는데, 그것은 오키나와의 목소리가 일본 본토에 전해지지 않아서라기보다는 일본인이 오키나와의 목소리를 들으려고 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이쯤에서 도대체 오키나와가 처한 서발턴적 상황이 무엇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선 소설에 기술된 내용부터 살펴보겠습니다.

 이 지역에서는 선조 대대로 이어져 내려오는 유서 깊은 가옥을 찾아볼 수 없다. 에이소(英祖) 왕통을 잇는 중심도시였다고 전해지는 이 땅의 역사는 듬성듬성 빠진 이처럼 지금껏 그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과거 이른바 류쿠처분(琉球処分)으로 일본의 한 현으로 새롭게 구획되었고, 태평양전쟁 말기에는 나하(那覇) 슈리 지역에 일본군 사령관이 주둔하는 등 피비린내 나는 오키나와전투의 무대가 되기도 했다. 이 일대 건물들은 대부분 파괴되어 형체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그런데 파괴된 것은 건물만이 아니었다. 본토에서 오키나와를 지키기 위해 건너온 일본군 병사들은 들리는 소문과 달리 아주 적은 숫자였고 거기다 최신 병기는 다룰 줄도 몰랐다고 한다. 결국 방위소집이라는 이름으로 불러 모은, 훈련 같은 건 받아 본 적도 없는 지역 민간인들이 전쟁을 떠맡아야 했다. 오키나와 성인 남자들이 모두 사라졌다는 말이 회자될 정도였다고 한다. 그뿐만 아니라 여학생들을 동원한 여자학도대도 조직되었다. 이 전쟁에서 무고한 목숨을 잃은 민간인 사상자 수는 ‘미상’. ‘미상’이라는 수치가 정식 기록으로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 12쪽
 종전을 얼마 앞두고 오키나와 슈리 부근에서 어마어마한 폭력전이 벌어졌다. 흔히 ‘타이푼 오브 스틸(Typhoon of Steel) 즉 ’철의 폭풍‘으로 비유되는 이 폭력전은 사람들에게 깊은 상처를 안겨주었다. 벨로테 형제(James and William Belote)는 이 표현을 자신들의 책 제목으로 삼기도 했다. 슈리는 레이테, 이오섬과 함께 태평양전쟁에서 가장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던 땅이다. 아주 짧은 기간 동안 이 땅에 어마어마한 양의 포탄과 수류탄이 떨어졌고 주변 풍경은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변했다. 건물이 파괴되고 나무들이 죽어갔고 지형까지 뒤틀려 버렸다. 
 당시 전쟁에서 사망한 사람들 가운데 자결이라는 이름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이들도 있었다. 삶의 터전이 한순간에 무너져 완전히 변해 버린다면 그 절망감이 얼마나 클지 미나코는 감히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막다른 곳까지 내몰린 절망. - 151쪽


 1892년 류쿠처분으로 일본에 편입된 것이 그리 오래된 편이 아닌 데다가, 태평양전쟁에서 본토인과는 다른 처참한 전쟁 경험을 해야 했고, 마침내는 미군정으로 30여 년을 보내면서 그 타자성은 해소되지 못했습니다. 특히나 미일관계에서 중요한 미군기지의 부담을 오키나와가 떠맡으면서 더 강화되는 모양새입니다. 

 특히나 패전 이후 일본 사회는 자기 보호 본능에 이끌려 보수화했고,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역사왜곡이 이루어졌습니다. 침략 전쟁에서의 패전의 기억은 '희생자의 기억‘과 '애국의 기억‘으로 윤색하기 위한 노력은 필연적으로 이어졌습니다. ’본토의 논리‘에 억압당한 오키나와 서발턴의 목소리가 제대로 나올 수 없었다는 겁니다. 이를 드러내는 가장 극명한 사건이 바로 오에 겐자부로의 ’오사카 재판‘이 될 수 있겠지요.


2005년 8월, 오키나와전 당시 게라마열도(慶良間列島)에 주둔한 해상전투부대(海上挺進第2戰鬪部隊) 전(前) 부대장과 유족들이 ‘군명(軍命)’ 기술을 둘러싸고, 이와나미서점(岩波書店)과 작가 오에 겐자부로(大江健三郞)를 피고로 한 ‘집단자결’ 표기에 관한 소송을 오사카 지방법원(大坂地方裁判所)에 제소한 사건을 들 수 있다. 재판의 직접적인 발단은 오에의 저작 『오키나와노트』(大江健三郎, 1970, 이하 『노트』로 표기함)의 서술 내용을 둘러싸고, 일본군 출신 전(前) 부대장 및 그 유족들이 명예 훼손을 주장하며 오사카 지방법원에 소송을 제기하면서부터이다. 
- 최기성. 「일본 민족주의의 허상: ‘오키나와’의 비극」. 『한국아시아학회아시아연구』.  pp105~133. 2009.06.


 일본의 외교관이자 평론가인 오카자키 히사히코(岡崎久彦)는 “법적 분쟁의 배후에는, 전쟁의 가해자 즉 원고를 사상적 이념적으로 지지하고 후원하는 자유주의사관연구회(自由主義史觀硏究會)를 비롯한 보수지식인 및 우익단체들이 있다”라고 지적합니다. 이들은 “과거 일본 군국주의의 침략전쟁에 대한 역사적 반성을 자국의 역사를 얕보는 ‘자학사관(自虐史觀)’이라 비판”하면서, “일본 역사에 대한 바른 이해라는 명분하에 아시아 침략행위를 정당화하는 등 역사적 사실에 대한 왜곡 및 축소를 반복”하고 있다고 비판합니다. 그 결과, 2005년에는 중학교 역사교과서에서 ‘종군위안부’에 관한 기술이 사라지고, 2006년 고등학교 “일본사” 기술에서 오키나와의 ‘집단자결’에 대한 일본군의 관여 사실이 삭제되고 은폐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최근에는  오키나와전의 주민 피해에 관해 언급하지 않는 교과서가 나타나는 등, 오키나와전의 일본군 가해에 대한 기술이 감소하는 추세에 있다고 합니다.


 오키나와에서 태어나고 자라지 않은 내가 그런 배경을 가진 오키나와를 무대로 소설을 쓴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없지는 않았습니다. 소설 속 여성들도 나와 마찬가지로 오키나와에서 태어나고 자라진 않았지만, 이 점은 소설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가 되고 있습니다. - 4쪽


 그래서인지 이 미지근한 소설은 오키나와 서발턴과는 꽤나 먼 거리를 유지합니다. 우익세력과 전면적인 법정 다툼에 들어설 수도 없겠지만, 역사 인식이나 현실 인식에서 꽤나 타자화된 시각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이는 소설에서도 그대로 드러나, 외지인인 요리(順)와 미나코(美名子)는 당사자성을 획득하려는 노력을 거의 하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미나코는 당사자성에서 한 발 물러나서 ‘기계적 균형을 갖춘 장치적 존재’로 남길 원합니다. 그래서 서사에서 강한 힘을 느낄 수가 없고 맥이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는 제주의 서발턴적 상황을 다룬 현기영이나 한강의 소설을 읽은 한국 독자에게는 더 강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습니다.

 게다가 다카야마 하네코의 부정확한 현실 인식은 과거사 인식에서도 어정쩡할 수밖에 없을 듯합니다. 일본 헌법 제9조 제1항에서는 “국제 분쟁을 해결하는 수단으로써 국권이 발동되는 전쟁과 무력에 의한 위협 또는 무력의 행사는 영구히 포기한다"고 규정하고 있고, 제2항에서는 ”육해공군, 그 밖의 전력을 보유하지 아니한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이런 헌법적 사고에서 출발하면, “일본인은 무기를 갖지 못하고 군대도 갖지 못”하는 “마루요시의 나라(丸腰の国, 마루요시란 사무라이가 칼을 차지 않은 상태를 말하며, 따라서 비무장국가란 뜻)”라는 개소리를 하게 됩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일본의 군사력은 세계 7위(Global Firepower 기준)에 해당하며, 경제규모는 미국, 중국, 독일에 이어 네 번째 규모를 보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다음과 같은 현실 인식을 마주하게 되면, 머리를 갸우뚱하게 됩니다.

 일본은 더 이상 세계 유수의 경제대국도 아니고, 미국과 소련이 팽팽한 긴장 관계에 있는 것도 아니고, 이 섬에 주둔해 있는 미군기지가 예전만큼 세계열강의 주목을 받고 있지도 않다. -  40쪽


 오키나와 서발턴의 경험 재현과 관련해서는 이렇다 할 미덕을 갖추지 못한 이 소설이 그나마 의미를 갖는 부분은 ‘기억 계승’에 있다고 하겠습니다. 

 김경희의 논문에 인용된 우에노 지즈코(上野千鶴子)의 지적은 눈여겨 볼만합니다. “역사란 집합적 기억(集合的記憶, collective memory)의 다른 이름”으로, 기억이 역사를 구성한다고 보았습니다. 덧붙여 전쟁과 기억에 관한 최근의 연구 동향에 대해 다음의 세 가지로 요약하기도 했습니다. 첫째는 체험자의 고령화와 사망에 따라 전쟁을 직접 경험한 사람들의 증언 듣기가 불가능해지는 ‘포스트 체험의 시대’가 도래했고, 둘째는 ‘이야기되는 기억’과 ‘이야기되지 않는 기억’ 중에 후자가 점차 부각되고 있으며, 셋째는 전쟁을 전혀 모르는 세대들이 전쟁 체험자의 경험을 끌어내어 반복적으로 듣고, 재현하고, 표현하는 사례가 증가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다만 이 과정에서 ‘지배 기억’이 담론을 왜곡할 수 있다는 우려가 있습니다. 실제로, “일본의 가해자로서의 입장을 축소하고 희생자로서의 일본을 강조”하기 때문에, 오키나와에서도 “천황을 위해 싸우다 전사한 일본군을 추도하고 그들의 행위를 찬미”하는 전시가 이루어져, “전쟁의 피해자인 오키나와 주민들의 의사가 무시”되기도 했습니다. “일본 정부와 주요 기관에 의해 주도되는 지배 기억은 공적인 역사교육과 박물관, 기념비 등을 통해 공고히 해가려는 뚜렷한 움직임을 보여준다”는 겁니다.

 따라서 ‘당사자성을 갖춘 이들의 기억 계승’은 서발턴 서사의 재현에서 무척이나 중요합니다. “전후 세대가 당사자인 전쟁 체험자들과의 협동을 통해 ‘비체험자’의 위치를 자각하면서 오키나와 전쟁의 ‘당사자성’을 획득”할 필요가 있으며, 이를 통해 “오키나와 전쟁의 체험을 분유(分有)하는 과정이 중요”해집니다. 그런 점에서도 이 소설의 기술은 한참 아쉬움을 남깁니다.  

 자료관에는 오키나와 주민들이 제공한 모든 정보가 보존되어 있다. 그 가운데는 진위가 확실치 않은 것도 포함되어 있다. 기억을 듣고 쓰는 일, 증언이나 주장도 시대에 따라 바뀔 수 있다. 세월이 흐르면서 변화하고 그 기억의 신뢰도 또한 불안정하기만 하다. 이들 자료가 과연 진실을 담보한 기록인 건지, 어디선가 바뀐 건 아닌지, 그것도 아니면 애초부터 가짜인 건지 머리를 싸매고 파헤치는 것은 연구자들의 몫이다. 요리(順) 씨나 미나코(美名子)는 그저 자료를 수집하는 일에만 열중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 57쪽
 건물 가득 들어찼던 자료들이 가치 있는 것인지 아닌지는 모른다. 미나코뿐만 아니라 세상 사람들도 모를 것이다. 미나코는 다만 이 건물에 드나들면서 매 순간 자료 정리에 성실히 임했을 뿐이다. 진실은 그 순간부터 과거의 것이 된다. 그런데 그 순간의 진실이라고 하는 것이 훗날 필요할 날이 반드시 올 것이다. 자료관은 그런 것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것이 지금 정확한 것인지, 미리에도 계속해서 진실한 것으로 남게 될지 모르지만 적어도 그런 것이 보존의 이유가 되지는 못할 것이다. - 14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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