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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트레스의 호르메틱 곡선과 과로사회

호르메시스(hormesis)라는 현상은 대부분의 생리학적 파라미터에서 관찰된다. 굳이 방사선을 들지 않더라도, 예컨대 특정 미량 영양소의 혈중 농도가 아주 낮으면 위험하고, 적정 농도이면 가장 좋다가, 과도하면 독성이 나타나는 식이다. 

호르메틱 곡선, 출처: 위키피디아

스트레스 호르몬도 마찬가지다. 만사 해로운 것으로 비춰지는 코르티솔 말이다. 가령, 완전한 부신기능 부전을 겪는다면 활력징후의 유지조차 어려워 사망에 이를 수 있다. 부신기능 부전의 경우에는 임상상에 적당한 당질 코르티코이드 보충이 필요하다. 감염증, 쇼크와 같은 생리학적 스트레스에 노출되었을 때는 소위 스트레스 용량을 제공해야 한다. 반면, 스트레스 호르몬이 과도하면 쿠싱증후군으로 대표되는 여러 문제들이 생긴다. 만성적 스트레스 상황에 노출되면 코르티솔의 펄스 형태 분비가 소실되고, 시상하부-뇌하수체의 자극과 무관히 부신피질은 폭주 기관차처럼 상당량의 코르티솔을 지속(tonic) 분비한다. 


과도한 농도의 코르티솔은 전두엽 기능, 해마 기능, 편도체 기능 등에 광범위한 영향을 주어 인간의 행동 양식을 뒤바꾼다. 젊고 건강하며 인지에 문제가 없는 이들도 고용량의 당질 코르티코이드를 투여받으면 섬망에 부합하는 임상상을 보이게 된다. 충동 조절에 영향이 있으며, (도파민과 엔돌핀을 주는) 고칼로리 음식을 찾게 되고, 렙틴 저항성이 생기며 결과적으로 식욕이 늘며, 수면 장애가 생긴다. 근단백 분해가 발생하고, 에너지는 주로 복부 지방 등 대사적으로 좋지 않은 곳에 축적된다.


서설이 길었다. 자원이든, 군사력으로 무언가를 침탈하든, 소프트파워이든, 다만 그동안 쌓은 오랜 기간의 사회 자본이든, 무언가 넉넉한 나라들은 스트레스 호르몬 호르메틱 곡선이 피크를 지나기 전인 왼편에서 굴러가는 경향이 있다. 근로 시간이 짧고, 삶의 질이 좋은 소위 선진국들이다. 느긋하게 일해도 별 일이 생길 것이 없다. 한국은 반대다. 이 곡선의 오른편에서 사회가 굴러간다. 


정신과 의사 나종호 교수의 글을 읽다가 모골이 송연하다. 마약에 중독된 환자의 변. 정확한 구절은 기억나지 않지만, "매주 50시간씩 일을 해서 정말 힘들어 죽겠는데, 어떻게 마약에 중독되지 않을 수 있지요?" 류의 이야기였다. 이 글을 읽던 당시(의-정 갈등이 시작된지 두 달 쯤이었다), 나는 주 100시간 이상을 병원에서 보내고 있었다. 


논리는 간단하다. 우리 사회가 사람을 바라보는 마인드셋. 진료 인력이 2/3으로 감소되었으면 일인당 노동을 3/2 만큼 하면 된다. 아주 간단한 사칙 연산의 결과다. 노동 강도가 격화되어 가처분 시간이 0에 수렴하면 노동의 질 역시 폭락한다는 사실, 즉 인간이 '생명체'라는 상당히 명확한 진실을 도외시한 결과다. 


100시간씩 일을 하면 무너지는 것들이 있다. 그동안 우리가 갇혀버린 압력솥 사회의 가속노화 현상에서 사람들이 도저히 유지하기 어려워하는 것들, 자기 돌봄 말이다. 잘 먹는 것, 충분히 운동하고, 충분히 명상하는 것, 잘 자는 것이 동시에 붕괴된다.


그렇게 6개월이 지났다. 우리 사회가 처한 스트레스와 가속노화의 악순환(downward spiral)을 어떻게 뒤집어 선순환으로 바꿔야 할 지에 대해 공부해왔고, 먼저 스스로의 실천을 위해 다방면으로 노력해온 바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당신도 느리게 나이들 수 있습니다>를 쓰며, 13개월간의 금주를 경험하기도 했다. 의지력 하나는 끝내주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난 6개월간 가장 먼저 깨달은 것은 인간 의지력의 무의미함일 것이리라. 외래, 당직에 연속으로 이어지는 외래 진료, 하루 종일 연락이 사방에서 온다. 


혹자가 나에게 조언을 했다. 지금 이순간에 머물러 보기를. 하지만, 사방에서 오는 연락을 받아내며 외래에서 시간과 싸우는 일이 어떤 느낌인지 산부인과 의사인 부인이 단도직입적으로 말한다. 외래 진료 중에 받는 스트레스의 양상은 마치 '표범이 나를 뒤에서 쫓아오는' 것 같은 느낌이다. 조금이라도 진료가 느려지면, 대기시간이 한시간, 한시간 반, 이렇게 늘어난다. 대기가 길어지면 기다리던 환자들의 불만족이 심해지고, 외래 진료실은 아수라장이 된다. 심지어 오전 외래가 너무 늦어지면 같은 진료실에서 오후 한시부터 진료를 시작해야 하는 다른 교수가 일을 시작하지 못할 수도 있다. 


같은 분과의, 나보다 한 살 많던 동료 교수는 4월 말로 일을 그만뒀다. 그의 환자가 더해지고, 그의 업무가 나의 업무에 추가되었다. 인력 보충은 언감생심이라 한다. 병원이 어렵다고 한다. 여름 휴가를 무급으로 다녀왔다. 무급이건 말건, 휴가때 못 본 '정원'은 전후에 다 채워놓아야 한다는 연락이 왔다. 


수면부족, 코르티솔, 그 다음은 술이었다. 내가 가장 취약한 물질. 그 다음부터는, 정말 악순환이다. 병원에서 밤을 지내면서는 말도 안되는 일을 하기 시작했다. 전공의 시절 이후  웬만해서는 먹지 않았던 컵라면을 이유도 없이 자정 즈음에 까고 있는, 도무지 평소 내 식습관과는 맞지 않는 행동이다. 


3개월만에 체중이 3kg 불었고, 혁대 한 칸 만큼 배가 나왔고, 상체의 근육은 바싹 말라붙었다. 내 강의 자료에 항상 등장하는 귀여운 ET 모습이다. 작년 12월 초, 하프 마라톤은 1시간 39분, 10km 달리기는 39분. 두 개의 '40'이라는 숫자를 깨고 말겠다는 생각이라, 이런 웃긴 개인 기록을 가지게 됐다. 주 50-70km 정도는 뛸 때 이야기다. 3, 4월 두 달간은 주 2-3회 당직이 있었고, 거의 운동을 하지 못했다. 이후 달리기를 다시 시작했고, 처음에는 10km에 55분이 넘게 걸렸다. 


강제 수영 실험(forced swim test)을 당하는 실험실의 쥐와 비슷한 상황에서, 큰 병원의 전공의들은 살기 위해 사직을 선택한다. 의-정 갈등의 시작 이후 진료실에서 더욱 심하게 느껴지는 환자들의 적개심, 의심, 동의 없는 녹취. 너무 만연해진 송사 때문에 한국에서 더이상 노쇠의 끝에 자연사를 경험하는 것은 불가능해졌다는 동료들의 이야기. 의사의 진료 행위는 시장에서 '옵션' 을 판매하는 것과 비슷한 구조가 되었다.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항구토제 주사를 처방했다는 사실만으로 금고형에 처해질 수 있다.  


많은 동료들이 호르메틱 곡선의 왼편으로 갈 방법을 궁리하기 시작했다. 과거에는, 나이가 차면 큰 병원에서 '널럴함'을 영위할 수 있었다. 지금도 그렇긴 하다. 2000년대 초에는 40살이면 됐다. 지금은 55세 정도라야 한다. 중위 연령이 오르는 속도에 맞추어, 조금은 더 안락할 것이라 희망했던 미래는 신기루가 되었다. 정규직을 주지도 않고, 제대로 된 연구실이 나오는 것도 아닌데, 40은 새로운 30이라는 인구학자 워런 샌더슨의 말마따나, 40이 넘어서 15년 전에 하던 직역과 근로강도에 그대로 머무른다. 


의료에는 비용, 접근성, 진료의 질이라는 동시에 이룩하기 어려운 철의 삼각이 있다. 그동안 모두가 행복했던 우리 사회의 어두운 성공방정식은 어쩌면, 저 호르메틱 곡선의 오른편으로 사람들을 몰아넣은 결과일지도 모른다. 이제, 전공의들은 그 원리를 너무 명확하게 알아버린 것이고. 전공의도, 간호사도, 트럭 운전도, 쿠팡도, 배를 만들던 물량팀도, 계사의 일꾼도, 인천공항의 청소노동자도 모두 마찬가지다. 


세상이 힘들어지면, 이미 곡선의 오른편에서 스스로를 죽여가며 일하고 있는 이들에게 천리마 운동의 자세를 요구한다. 냉난방이 잘 된 방의 푹신한 의자에 눕듯 앉아 규칙을 정하는 이들에 날벌레터럼 꼬이는 것은 사람 한명 한명을 1이라는 숫자로 환원해 교언영색과 곡학아세로 이익을 보는 프래질리스타(fragilista)다. 


자기돌봄이 불가능한 사회, 내가 산소마스크를 쓰지 못하는 사회에서 아이를 낳아 기른다는 것이 가능할까? 사회가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 


나는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 

외래 시간이다. 

가자.


Russell G, Lightman S. The human stress response. Nat Rev Endocrinol. 2019 Sep;15(9):525-534. doi: 10.1038/s41574-019-0228-0. Epub 2019 Jun 27. PMID: 31249398.


Kivimäki M, Bartolomucci A, Kawachi I. The multiple roles of life stress in metabolic disorders. Nat Rev Endocrinol. 2023 Jan;19(1):10-27. doi: 10.1038/s41574-022-00746-8. Epub 2022 Oct 12. PMID: 36224493; PMCID: PMC10817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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