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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갠 날 성혜 Mar 26. 2024

딸의 동거


“엄마, 나 동거할까 봐?”

7년 전, 33세의 딸이 툭 던졌다. 화들짝 놀랬다. 동거는 나와는 관계없는 언어로 알았는데. 의연한 엄마인 척하면 물었다. “왜? 결혼 안 할 거라면서.” “호주에서 사는 동안 동거에 관한 생각이 많이 바뀌었어. 물론 경제적인 이유로 많이 동거하지만 구질구질하지 않고, 연애의 연장으로 서로 원 가족에 대한 의무 없이 사는 것이 편하고 자유롭고 재미있어 보였어.” 이왕 의연한 척했으니 “알았어. 일주일만 생각해 볼게.”     

85년생인 딸의 친구들은 결혼하면서 이런저런 갈등을 겪었다. 그들의 부모인 우리 세대만큼은 아니지만, 아이들은 심각했다. 홀시어머니의 ’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라는 푸념을 들어야만 하는 친구, 혼자만 하는 육아로 오는 우울감으로 늘 화를 내는 친구, 직장 안에서 결혼한 여자로 겪는 불평등을 말하는 친구 등. 딸의 친구들은 결혼 생활이 지긋지긋하다는 말을 쏟아내는 시기였다. 딸은 결혼 생활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정확하게는 결혼에서 오는 시집과 육아를 두렵게 생각하던 중이었다. 대답을 하기로 한 일주일은 내 결혼을 반추하는 시간이었다. 나이 되면 결혼하고 결혼하면 아이를 낳아야 하는 삶의 방식에 맞춰 결혼한 나는 어떤가.  

   

나는 대학 2학년 때부터 맞선이라는 걸 봤다. 맞선은 보통은 호텔 커피숍에서 만난다. 양쪽 집 엄마나 이모, 혹은 고모와 같이 앉아 인사하고 자신들의 자식이나 조카에 대한 덕담을 나눈다. “우리 아이라서 하는 소리가 아니라 집 밖에 모르는 순둥이죠.” 그럼 질세라. “우리 아이도 어찌나 착실한지 명절이면 집안 어른들에게 꼭 인사를 다닌답니다.” 그리고 소위 어른이 다 가고 둘이 남아 취미가 어떻고 좋아하는 영화 이야기 등을 나눈다. 특별한 약속 없이 헤어지는 것이 보통의 순서이다. 양쪽에서 소개하는 사람을 통해 다시 보자고도 하고 인연이 아닌 것 같다는 대답이 오가는 형태이다. 나가기 전에 주의 사항을 듣는다. 커피는 뜨거우니 모양새 빠질 수 있으니 주스를 마시고, 저녁을 먹으면 성사가 잘 안 된다는 징크스가 있으니 같이 먹지 말라 등의 충고이다.

그렇게 재고 저울질하며 만난 남편과는 깊은 교감 없지만 “조강지처”로 살아내야 하는 의무가 있었다. 생각이 다른 것은 남편에게 맞추고 참고 인내하며 ‘현모양처’라는 믿음과 좋은 며느리가 되리라는 기대로 극복했다. 남편은 점점 힘이 세졌다. 나는 시댁에 거의 매일 안부 전화를 하는데 남편은 일 년에 한 번도 내 부모에 안부 따위는 챙기지 않았다. 시댁 쪽 결혼식은 알지도 못하는 시고모 아들의 조카까지 가지만 친정 사촌 동생 결혼식도 나 스스로 불편한 마음을 안고 갔다. 남편은 명절 전에 쉬지 않으니 명절 되기 전에 먼저 두 아이를 데리고 시댁에 가서 요리했다. 명절 당일에는 시집 식구와 노는 남편에게 언제 갈 거냐는 무언의 눈짓을 보내면 부부 싸움이 시작되었다.     

80년대 초에는 결혼하면 특별한 이유가 없으면 거의 직장 생활을 하지 않았다. 나도 결혼과 동시에 아이를 키우며 살았다. 시댁 이야기나 남편 흉을 보는 것은 누워서 침 뱉기니 누구와 나눌 수 없었다. 모든 이야기는 내 속에서만 존재했다. 꺼내지 못한 언어들은 곰팡이처럼 피어났다. 늘 우울감이 있었고 답답했다. 

별다른 문제가 없는데 행복한 마음이 들지 않는 내가 이상했다. 남편이 물리적 폭력을 쓰는 것도, 다른 여자와 문제를 만드는 것도 아닌데 그까짓 성격이 좀 안 맞는 걸 문제 삼을 수는 없었다. 나는 간절하게 나를 이해하고 싶었다. 나를 이해하는 방법은 뭘까? 마음이 궁금하다는 생각은 심리학에 관심이 갔다. 심리를 공부하면서 나를 이해하는 키워드를 몇 개를 찾았다. 내면 아이, 엄마와의 관계, 남편과의 갈등 문제의 서로 다른 코드 등등. 그러나 내 개인 문제로만 보기에는 퍼즐이 맞지 않았다. “내 문제라고?” 다시 맞춰보고 다시 시도해도 내가 꿈꾸는 행복한 생활은 되지 않았다. 편하고 동등한 위치와 역할을 가지고 남편과는 손잡고 아름다운 노을에 산책하는 부부가 되기에는 너무나 요원해 보였다. 할 수 있는 것을 다 해보리라는 생각에 남편도 심리적인 도움을 받길 권했다. 남편은 문제없는 자신에게 그런 이야기를 한다고 도리어 화를 냈다. 뭔가 문제일까?     

모든 문제를 내 내면의 문제로, 내 개인적인 기질이나 성격 문제로, 내가 ‘여자 하기 나름’의 현명함이 없어서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편은 나와 안 맞기는 하지만 악마는 아니잖아. 살아 계시는 동안 명절에 친정 간다고 투덜거리는 시어머니도 상식 이하의 성품을 가진 것은 아니잖아. 그 시절 대학까지 보내주시고 세상이 말하는 좋은 짝 지어 주었으니 시집 귀신으로 살아야 한다는 내 부모도 못 배우고 미련한 분들이 아니잖아. 도대체 어디서 잘못되고 꼬인 것인가. 답을 찾는 간절함으로 읽기와 쓰기를 하면서 알게 되었다. 나는 옷처럼 사회가 요구하는 성 역할을 입고 있었다. 내가 뭘 원하고 무엇을 하고 싶은지보다 여자로서 해야 하는 역할이 힘들었다. 그 지난한 과정을 떠올리며 딸의 동거를 조금은 편안하게 받아들였다.

나처럼 조건 맞추어 맞선 보고, 양가 집안 불려다 약혼하고, 예단으로 시집 어른들 다 챙겨서 한 결혼도 힘들고 여전히 헤매는 중이라면 차라리 살아보고 결혼하는 편이 더 현명하다는 쪽으로 마음이 갔다. 딸은 그렇게 동거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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