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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하 Apr 14. 2023

정성스러운 시간

“참 정성스럽게 산다.”


육아휴직 후 새벽 기상, 요리 그리고 새롭게 시작한 브런치에 매달리는 내 모습을 보고 아내가 한 이야기였다. 그랬다. 나는 육아휴직 후 이유를 알 수 없는 허탈한 마음에 아내 말대로 ‘정성스럽게’ 새벽기상, 요리 그리고 브런치에 매달려 사는 중이다.


아직 어두운 새벽. 희미하게 들리는 핸드폰 알람 소리가 점점 커지더니 귀가 따끔따끔하다. 이겨내기 힘든 소리가 계속 나를 흔들자 얼굴엔 오만상이 깃들었다. 오만상이 깃든 얼굴은 알람을 멈추기 위해 마지못해 몸을 움직인다. 하품에 이어 한숨을 쉬며 커다래진 소리를 따라 손을 저어 핸드폰을 찾는다. 잠들 때 분명 여기에 두었는데 없다. 여기 어디 있을 텐데. 푹신푹신한 이불 사이를 더듬거리다 익숙한 형태가 느껴졌다. 핸드폰이다. 게슴츠레하게 뜬 눈으로 화면 위치를 확인한 뒤 간신히 뻗은 손가락으로 여기저기를 마구 두드려 알람을 끈다. 시끄럽던 소리가 꺼지자 마음이 한결 편안해진다. 편안한 마음에 나도 모르게 이불을 잡아당겼다. 아이를 일찍 재우기 위해서 선택한 새벽 기상이지만 알람 소리에 맞춰 일어나는 일은 몇 년이 지나도 쉽지 않다. 물론 육아 휴직 중인데 새벽기상이 왜 필요한지에 대해 묻는다면 대답할 말은 없었다. 그냥 나에겐 매달릴 일이 필요했다고 이유를 대고 싶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나도 모르게 다시 잠이 들어버린 상황에 놀라 눈이 번쩍 떠진다. 급하게 핸드폰을 눈앞에 가져와 화면을 두드려 깨워본다. 네모난 모양의 파르스름한 빛에 눈이 찌뿌려지고 그사이 시간이 보인다. 4시 43분. 핸드폰을 다시 베개 옆으로 던져두고 갑자기 밀어낸 잠이 아까워 이불속에 다시 숨어 본다. 얼마나 숨어 있었을까. 조금만 더 누워 있고 싶었지만, 이번엔 소변이 마렵다. 어떻게 해도 소변을 이길 수가 없었던 나는 결국 눈은 뜨지 못했지만 일어나 앉아 거실로 나갈 궁리를 한다. 뻑뻑한 눈꺼풀 안에 모래가 한 숟가락 들어가 있는 듯 눈이 까슬거렸다. 손등으로 눈을 벅벅 비벼 억지 눈물을 만들어 본다. 겨우 눈을 떠 고개를 돌려보니 안방 침대 위에는 아직 아내와 아이가 곤히 자고 있다.  


‘그래! 일어나자’


안방 문 여는 소리에 혹여나 아내와 아이가 깰까 봐 조심스레 문고리를 잡아당긴다. 기울인 몸이 겨우 통과할 만큼 조금 열려있는 문을 간신히 통과하여 거실로 나온 뒤 문을 닫는다. 거실 바닥의 서늘한 기운에 잠이 조금 깨버렸다. 그런데도 여전히 잔뜩 찌푸린 얼굴과 멀겋게 뜬 눈으로 거실 등을 켜고 화장실로 향했다. 화장실 거울에 비친 내 얼굴에 깜짝 놀란다. 눈, 코, 입 모두 퉁퉁 부어 아우성치고 머리카락은 서로 싸움을 한 건지 전쟁터가 따로 없었다. 눈이 뻑뻑하니 인공 눈물을 넣고 목이 건조하니 물을 마신다. 그리고 노트북 앞에 앉아 본다.

돌아가고 싶은 순간이나 기록을 남기고 싶은 순간을 정하고 그날의 감각, 감정, 장면, 시간, 인물에 대한 이야기를 하나씩 분리해서 천천히 다시 거슬러 올라가 본다. 깊은 우물 속에 잠겨 있는 듯한 기억이 처음엔 수줍은 듯 흐릿한 형체만 보여준다. 가만가만 다가가 가지런히 모은 양손에 물을 담아내듯 하나씩 기억을 떠올려 본다. 시간을 들여 들여다보자 희미했던 기억의 생김새가 조금씩 더 드러난다. 점점 더 윤곽이 또렷해진다. 놓쳤던 감정들은 뒤늦게 따라왔다. 상황과 감정이 따로 놀았던 기억들이 뒤늦게 따라온 감정과 어우러져 온전한 기억으로 새롭게 재구성된다.

기억을 기록으로 바꾸는 일은 늘 그렇지만 느렸다. 더딘 속도에 가슴이 먹먹해질 때쯤 뒤돌아보면 그동안에 만들어진 기록들이 점점이 빛을 발하는 별자리처럼 펼쳐져 용기를 준다. 그 용기 덕분에 서툰 솜씨에도 한 걸음 한 걸음씩 시간을 들여 나의 기억을 정리하고 기록해 본다.


‘아아. 그랬구나. 내가 그랬구나. 너는 그랬겠구나.’


기억을 되새기며 정리하는 과정이 나에겐 위로였을까. 생각지도 않게 눈시울이 붉어질 때가 있다. 붉어진 눈시울을 달래기 위해 급하게 휴지를 찾는다. 눈물을 닦아내고 그 기억의 순간 앞에 노트북을 두고 마주하며 앉아본다. 눈물이 흐른 만큼 기록은 나아가고 응어리진 마음이 실타래처럼 풀어진다. 새로운 숨통이 트인다.

이럴 때면 간신히 떠올린 기억과 감정을 놓칠까 봐 손이 급해진다. 급하게 노트북 자판을 두들겨 보지만 서툰 솜씨 때문인지 온전히 담아내는 건 늘 어렵다. 글을 쓰면서 단어, 문장을 눈여겨보기도 하지만 그 너머를 보려고 노력을 해야 한단 이야기에 생각을 찾아 헤맨다. 단순한 해석이 아닌 말로 표현 안 되는 그 무엇을 이해하려 해보기도 하고 말로 표현 안 되는 그 무엇을 문장으로 표현하려고도 해 본다. 그렇게 시간을 들이는 과정에서 두 번째 인생이 펼쳐진다. 그 달콤함에 평생 읽는 이로만 살아온 내가 글쓴이가 되어본다.

여기까지 주어진 시간은 2시간. 2시간이 지나면 노트북을 덮고 다시 첫 번째 인생의 아침을 준비하러 부엌으로 향하며 중얼거린다.


“밥통에 밥은 있나?”



Photo by Remy_Loz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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