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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마음으로 애통하는 사람들

쥬니퍼(Chat-GPT)와 함께 쓴 에세이(2)

by 이상무

마태복음 5장을 읽다가 문득 궁금해졌다. 주 예수님께서 반복해서 말씀하신 “복이 있다”는 그 ‘복’은 과연 어떤 의미일까? 우리가 생각하는 세속적인 복의 개념과는 너무나 다른 흐름이 느껴졌다. 그래서 헬라어 원문이 궁금해졌고, 나의 친구이자 동역자인 ChatGPT, 쥬니퍼와 함께 말씀을 살펴보았다.


나: “마태복음 5:4, 애통하는 사람들은 복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Blessed are those who mourn, for they shall be comforted.) 여기서 ‘복이 있다’는 말의 원어적 의미는 무엇일까?”


쥬니퍼: “복이 있습니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원어는 ‘μακάριοι (makarioi)’입니다. 이 단어는 산상수훈 전체(마 5:3–12)에 반복되는 핵심어이지요. 어근은 고대 그리스어 ‘makar’로, 고통이나 결핍이 없는 신적 존재의 완전한 행복을 표현할 때 쓰였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이 단어는 세속적인 행운이나 감정적 행복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서 오는 내적 충만과 평안을 뜻합니다. 즉 “복이 있다”는 말은 하나님과의 교제 속에서 참된 만족과 안식의 상태에 있다는 선언이지요.


나: “그렇다면 복이 있다는 단어의 어근은 본래 신의 상태에 쓰이던 말이군. 그렇다면 사람이 하나님의 행복, 그 복의 영역에 ‘참여한다’는 개념이네?”


쥬니퍼: “맞습니다. 원래 ‘μακάριος(makarios)’는 오직 신들에게만 쓰이던 단어였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단어를 사람에게 적용하심으로써, 하나님의 복됨에 인간이 참여할 수 있는 새로운 관계를 선언하신 겁니다. 이것이 바로 산상수훈 전체의 핵심이지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은 단순히 복을 ‘받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생명에 참여하는 자입니다.”


나: “그렇다면, 물질적 풍요나 명예, 권세를 얻는 ‘복’은 당시 헬라어로 따로 있었겠네?”


쥬니퍼: “그렇습니다. ‘행운이 따르는’은 εὐτυχία (eutychia), ‘번영’은 εὐδαιμονία (eudaimonia),
‘부’는 πλοῦτος (ploutos), ‘명예’는 δόξα (doxa), ‘안락함’은 **εὐπορία (euporia)**와 같은 단어들이 사용되었습니다. 이 모든 단어는 ‘외적 상태’, 즉 ‘무엇을 소유하거나 높아진 상태’를 의미합니다. 반면 예수님은 ‘μακάριος’를 선택하심으로써, 복의 개념을 세속적 가치로부터 떼어내어 하나님 나라의 존재적 행복으로 새롭게 정의하신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의 언어적 혁명이며, 신약의 중심 사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나: “그럼 이제 ‘애통하는 사람들’의 의미를 살펴보자. 무엇 때문에 애통하는 것이며, 그 감정의 깊이는 어느 정도일까?”


쥬니퍼: “‘애통하다’에 해당하는 단어는 ‘πενθέω (pentheō)’입니다. 이 단어는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슬퍼할 때 사용되던 표현으로, 인간이 느낄 수 있는 가장 깊은 비통함을 의미합니다. 즉 단순한 슬픔이 아니라, 가슴을 찢는 듯한 상실의 고통이지요. 예수님은 이 단어를 사용하여, 단순히 인생의 고통을 말한 것이 아니라

죄와 세상의 부패함을 보고 통회하는 자, 하나님의 뜻과 멀어진 현실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마음으로 슬퍼하는 자를 가리키셨습니다. 그들에게 약속된 ‘위로(παρακαλέω, parakaleō)’는 단순한 위안이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와 용서, 새 생명의 회복을 뜻합니다.”


나: “사랑하는,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을 때 느끼는 그 깊은 애통이군. 오늘날 하나님을 알려고도 하지 않고 마음에 두기를 싫어하는 이 세대는, 하나님 입장에서는 가장 사랑하는 대상을 잃은 것과 같은 비통한 상황이지. 이 현실을 하나님의 마음으로 애통해하는 사람이 진정 복, 즉 μακάριοι가 있는 자겠군. 참된 위로는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야.”


쥬니퍼: 우리가 흔히 ‘애통’이라 하면 개인적인 상실이나 아픔을 떠올리지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애통하는 자들”(οἱ πενθοῦντες)은 그것을 넘어섭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하나님이 느끼시는 비통함에 함께 참여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셨지만, 인간의 죄로 인해 그분과 피조물 사이의 사랑의 관계가 끊어졌습니다. 창세기 6장 5–6절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한 것과 그가 마음에 생각한 것마다 계속해서 악하기만 한 것을 보시고, 땅에 사람을 만드신 것을 후회하시며, 마음에서 슬퍼하셨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애통입니다. 하나님은 사랑하시기에 슬퍼하십니다. 완전한 분이시지만, 사랑 때문에 인간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마태복음 5장 4절의 “복 있는 자”는 하나님의 마음에 참여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눈물은 단순히 불의나 죄에 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잃어버리신 사랑의 대상들을 향한 하나님의 눈물에 공명하는 눈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이라”라고 하셨습니다. ‘위로하다(παρακαλέω)’는 단어는 “곁에 와서 함께하다, 일으켜 세우다”라는 의미를 내포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친히 그 곁으로 오셔서, 하나님의 임재로 그 상한 마음을 감싸 주신다는 약속이지요. 이 복은 세상의 성공이나 번영으로는 표현될 수 없습니다. 눈물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복, 애통함의 깊이만큼 임재의 깊이가 커지는 복입니다. 오늘날 세상은 웃음과 성공을 복이라 말하지만, 예수님은 눈물 흘리는 자의 마음을 복되다 하셨습니다. 그 마음은 이미 하나님의 마음에 닿아 있기 때문입니다.


이 글은 단순한 주석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마음에 참여하는 사람의 복을 묵상한 대화입니다. 복이란 ‘무엇을 얻는 상태’가 아니라, 하나님과 마음을 함께하는 상태, 곧 하나님의 눈물에 함께 젖는 자의 자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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