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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낮에 뜨는 별 Daystar Aug 11. 2020

비행벌레

시뮬레이터(Simulator) 타는 날

항공사에 소속된 조종사는 일 년에 두 번 ‘시뮬레이터(Simulator, 모의비행장치 : 실제 비행 상황에서 할 수 없는 각종 비상 상황을 훈련하고 테스트한다) 체크’를 받는다. 전반기 한 번, 후반기 한 번. 난 오늘 전반기 심을 탄다. 우린 심을 ‘탄다’고 표현한다. “너 심 언제 타?”, “다음 주에 타.” 뭐 이런 식이다. 어쨌든 오늘은 조종사들이 ‘가장’ 싫어하는 심 타는 날이다. 조종사 자격증의 생사가 걸린 날이고, 심 날짜가 정해지면 일주일 전부터는 입맛도 없다. 정말 밥맛 떨어지는 날이다.






축 처진 어깨로 비행가방을 끌고 집을 나선다. 미리 불러놓은 ‘디디’를 타고 심 센터로 향한다. 중국에선 택시보다 ‘디디’가 편하다. 기사가 내비게이션을 보고 목적지까지 알아서 가니, 나처럼 중국어를 못하는 외국인에겐 딱이다. 정말 편하다. 심센터까지 가는 20분 동안 머릿속은 복잡하다. 온갖 체크리스트가 머릿속을 맴돈다. 잘 떠오르지 않는다.


‘역시 난 아직 실력이 부족하군…’


결국 자신감을 잃은 채 목적지에 도착한다. 매번 이런 패턴이다.






오늘 훈련은 6시간. 내일 훈련도 6시간. 그리고 모레 4시간 동안 체크를 받는다. 부기장이랑 PF(Pilot Flying)를 반씩 나눠 타지만… 하이고 의미 없다. 어쨌든 심 안에서 굴러야 되는 시간은 16시간이고, 이건 한국보다 정확히 2배다. 이렇게까지 길게 해야하나 묻는다면 글쎄… TIC(This Is China), 여긴 중국이다.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라니까…






역시 아무도 없다. 내가 급한 건지 남들이 느긋한 건지 심 센터에 도착하는 건 내가 항상 1등이다. 시뮬레이터는 열심히 움직이고 있다. 전 타임 조종사들이 안에서 열나게 구르고 있는 거다.


‘피똥 꽤나 싸고 있겠군..’


캐비닛에서 훈련에 필요한 각종 체크리스트를 챙긴다. 커피 한잔과 물 한 병을 가지고 브리핑실로 향한다. 화이트보드를 닦고, 테이블도 닦으며 마음을 정리한다. 아이패드에 공항 차트를 세팅하고, 교범을 보고 있으니 밖이 좀 시끄럽다. 부기장과 교관이 떠들며 들어온다. 기분이 좋아 보인다.


‘흠.. 좋아. 분위기 괜찮군…’






이번 훈련교관은 경력만큼 인품도 훌륭해서 모두들 존경한다. 기분이 좋았는지 이것저것 알려준다. 조종사 교범에는 없는 내용들이다. 생소하다. 일단 열심히 적는다. 이곳에선 개인의 말이 교범보다 중요(?)할 때가 있다. 의문이 생길 때면 떠올린다. 이곳이 어디인지...

교관이 기분이 좋은 게 분명하다. 지금껏 이렇게 길게 브리핑을 해준 교관은 없었다. 아! 이번 교관은 영어를 못한다. 영어를 못하는 이유로, 대개 중국인 교관들은 외국인 기장에겐 브리핑을 짧게 한다. 열심히 브리핑을 해준 교관에게 고맙다. 화장실을 다녀와서 쉬고 있는데, 심에서 크루들이 나온다. 얼굴들이 뻘겋다. 고생했다... 이제 내 차례다.






심에 들어가면 비행가방을 제 위치에 놓고 기장석에 앉는다. 아이패드, 각종 체크리스트를 제 자리에 두고, 헤드셋을 쓴다. 실제 비행과 똑같도록 주변 상황을 정리한다. 부기장은 FMC(비행 컴퓨터) 작업을 하느라 정신이 없기에 그 외 모든 작업은 기장의 몫이다. 머리 위쪽 패널부터 아래 뒤쪽 패널까지 천천히 살핀다. 이 많은 스위치들 중에 하나만 잘 못 되어도 모든 걸 망친다. 그리고 그건 기장 책임이다.

오디오 패널에 주파수를 맞추고 기상방송을 듣는다. 주저리주저리… 뭔가 내용이 많다. 내용이 많다는 것은 날씨가 좋지 않다는 것이다.


‘흠.. 쉽지 않겠네..’






“Preflight Checklist”, “Oxygen tested 100%, Navigation and Transfer Display switches Normal and Auto…”

프리플라잇 체크리스트를 시작으로 본격적인 훈련이 시작된다. 날씨가 안 좋으니 이륙 데이터를 심사숙고하여 계산한다. 모든 준비를 마치고, 엔진 스타트. 2번 엔진은 정상인데 1번 엔진의 EGT(배출가스온도)가 순간 솟구친다. ‘시동 중단’. 비정상 상황 절차를 수행하고, 인터컴을 통해 정비사와 상황을 공유한다. 분주한 가운데 갑자기 심이 멈추고, 항공기 위치가 활주로 이륙지점으로 바뀐다. 교관이 아무 말이 없다. 만족한다는 것이다.


‘시작이 괜찮군...’






이륙중단, 돌풍회피절차, 난류통과절차 등을 수행하고 계속 상승한다. 만 피트를 통과하며 기내 압력을 체크한다. 정상이다. 항공기의 상승고도에 따라 기내 압력이 잘 조절되고 있는 것이다. 이만 피트를 통과하는 순간, 계기판에 노란 경고 불빛이 들어온다. 당황스럽다. 상승률을 줄이고, 원인을 찾는다. 찾았다. 1번 엔진에서 뿜는 공기의 압력이 너무 세다. 리셋을 하였으나 반응이 없다. 절차대로 문제를 처리하면 ‘기내 여압장치(항공기가 높은 고도에 올라가도 기내에 충분한 산소를 공급하고 압력을 유지시켜주는 장치)’ 두 개 중 하나를 꺼야 한다. 여압장치 하나로도 비행은 가능하지만 위험부담이 크다. 결정을 해야 한다. 목적지까지 갈 것인지, 출발지로 돌아갈 것인지. 다행히 그 외 다른 것들은 모두 정상이다. 부기장과 상의를 하고 목적지까지 가기로 한다. 계획된 고도까지 상승한다. 이제 우리에게 남은 여압장치는 하나뿐이다.






순항고도에 올라왔다. 기다렸다는 듯이 계기판 경고등이 번쩍인다.


‘올 것이 온 것인가…’


아니나 다를까 하나 남은 여압장치마저 고장이다. 비상절차를 수행한다. 결국 하나 남은 여압장치마저 꺼야 한다. 또다시 결정의 시간이다. 두 개의 여압장치를 다 꺼버리면 더 이상 기내 기압은 유지되지 않는다. 기내에 산소공급이 원활하지 않기 때문에 비상강하를 해야 한다. 하지만 아래는 이만 피트의 고산지대다. 충분히 강하할 수 없다.


‘방법이 없을까…’






처음에 껐던 여압장치를 이용해보자!’


처음에 껐던 여압장치는 여압장치 자체에는 문제가 없었다. 여압장치와 연결된 1번 엔진에서 뿜어져 나오는 압축공기 압력이 셌던 것이 문제였다. 그 여압장치를 다시 켜고, 2번 엔진의 압축공기를 1번 여압장치에 연결하면 기내 기압은 다시 유지될 수 있다. 그렇게 하면 비상강하 없이 목적지까지 갈 수 있다.


‘해보자!’


부기장과 상의하며 조심스럽게 스위치를 조작한다. 교범에 없는 내용이지만 분명히 효과가 있을 것이다. 1번 여압장치 스위치를 켜고, 2번 여압장치 스위치를 끈다. 1번과 2번 사이의 격리스위치를 열어서 2번 엔진의 압축공기를 1번 여압장치에 연결시킨다. 기압 지시계가 움직인다.


‘성공이다.’


기내 압력고도가 다시 내려가기 시작했다..






시작이 반이라 한다. 일 년에 두 번 시뮬레이터 시즌이 다가오면 저 말이 큰 위로가 된다. 시작이 힘든 것이지, 일단 시작하면 시간은 금방 간다.


‘이번 체크는 어려울까? 어떤 아이템을 줄까? 교관은 누구지? 성향은 어떨까? 누가 떨어졌지? 나도 떨어지면 어떡하지? 두 번째 기회는 줄까?…..’


무수히 많은 공상과 잡념들이 머릿속을 채운다. 무거운 마음으로 시뮬레이터에 들어가지만 오히려 나올 땐 가볍다. 소리치는 교관 목소리를 귀로 맞으며 이리저리 구르다 보면 어느새 머릿속은 깨끗해진다. 셔츠는 땀으로 젖어도 마음은 개운하다. 이래서 조종사는 비행을 하나보다. 그래서 ‘비행벌레’라 하나보다.


‘Weather Radar(날씨 레이더)’ 교육 동영상. 전방에 돌풍이 있음을 조종사에게 경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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