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발
2009년 10월.
스물여덟 가을 어느 날.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고향에 있던 친구들이 서울로 올라와 꽤 성대한(?) 배웅을 해주었고, 우리는 마치 다시 오지 못할 길을 떠나듯이, 눈물 섞인 이별주를 나누었다. 빠르면 1년 안에 마치고 돌아올 수 있는 유학이지만, 그때 마음은 그러했더랬다.
‘Houston, Texas, USA(미 합중국 텍사스 주, 휴스턴 시).’
미국은 처음이었다. 이미그레이션 관문에 도달했다. 평생 갈고닦은 영어 실력을 뽐내야 하는 순간이다. 그러나 나의 혀는 이미 뇌의 지배를 벗어났고 한 마리 뱀처럼 똬리를 틀고 휘청였다.
“What is the purpose of your visit to the United States?(당신이 미국에 온 목적은 무엇입니까?)”
“Ah… Uh… I… Eh… Huh…”
감탄사만 연발하다 본능적으로 꿈틀거린 나의 혀는 드디어 소리라는 것을 형성했다. 나에겐 뇌를 거치지 않고 말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I am a pilot(나는 조종사입니다).”
‘뭐라고? 내가 조종사라고? 비행기 꼬리도 못 만져봤으면서 자기가 조종사라니. ㅋㅋㅋ 이 한심한 자여..’
이미 각종 서류를 잔뜩 제출했으므로, 입국 심사관은 내가 비행을 배우러 미국에 온 것임을 알고 있다. ‘비행 배우러 왔습니다.’ 이 간단한 대답만 했으면 될 일인데 갑자기 자기가 조종사라니. 영어도 못하는 이 아다다가 비행을 하겠다니 얼마나 어이가 없었을까.
“You are a student pilot, right?(당신은 비행을 배우러 온 거예요. 맞죠?)”
“Oh, Yes!(맞아요!)”
아메라카 땅에서 처음 만난 미국인은 나의 신분을 정확히 일러주었다. 그래 나는 학생 조종사였다. 지금부터 나의 신분은 학생 조종사다.
‘쾅!’
경쾌한 소리. 내 여권에 도장이 찍혔다.
“Good luck!(행운을 빕니다!)”
‘굿럭’. 한국의 조종사라면 모두가 알고 있을 그 이름 ‘굿럭’. 일본의 대배우 ‘기무라 타쿠야’가 ANA항공의 부기장으로 열연한 항공 드라마 ‘굿럭’. 그래.. 제목처럼 나에게 행운이 깃들길 바란다. 비행을 하는 사람에게 운이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그땐 잘 몰랐다. ‘운칠기삼’이라는 말을 만든 사람도 아마 조종사였을 거다. 조종사만큼 운이 중요한 직업이 또 있을까 싶다.
입국 심사관. 그에게 좀 더 크게 외쳐달라 할 걸 그랬나. 이후 미국에서 닥쳤던 시련들은 꽤나 힘들었다. 부끄럽지만 얼마나 많은 눈물을 훔쳤는지 모른다. 대한민국 품을 떠나 세상으로 처음 나온 스물여덟 어른이에게 닥친 시련은 시리고 날카롭고 버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