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유턴, 돌파구
한때는 친구들이 내게 말해왔다. 이쯤 되면 정말 굿이라도 해봐야 하는 거 아니냐는 우스갯소리까지 나올 때가 있었다. 즉 뭘 하든 제대로 안풀리고 더 아래로 곤두박질 치고 있는 것 같았다고 해야할까. 오죽하면 나를 이루고 있는 배경을 태어나서 단 한 번 도 원망해본 적이 없었는데 머릿속을 한 번 스치고 간 생각이 "왜 나는 그렇게 풍족하게 태어나지 못해서 이런 고생을 사서 하는 걸까"였다.
물론 곧바로 후회했다. 태어나서부터 알 수 없는 난치병에 걸리지 않고 나름 2n년동안 제 몸 건사하고, 어린 나이에 필드에 스스로 뛰어들어 꽤 좋은 경험을 해 본 것만으로도 감지덕지 해야하는데. 물론 좀 더 좋은 환경이었다면 더 많은 기회와 좋은 자리가 있었겠지만. 그냥 주어진 자리에서 내가 그걸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좀 더 앞으로 나갈지, 제자리에 그칠지 여부가 결정나기도 하니까.
'즈세'라는 필명을 사용한 지 벌써 15년이 되어간다. 그냥 아무런 생각없이 지어본 필명이 꽤 맘에 들어서 오랫동안 사용했다. 그리고 동인활동과 본격적으로 수면 위에 오르는 작가활동을 해오면서 네이버나 구글에 검색하면 바로 나오는 작가로 어찌저찌 잘 살아간다. 또 여러 아트 커뮤니티를 전전하며 지내왔더니 내가 청소년기에 활동하고 있었을 때부터 계속 팬이었음을 수줍게 드러내며 '늘 작품 잘 보고 있어요 작가님'이란 애정어린 메세지를 보내오기도 한다. 이럴 때 나는 내 인생을 헛살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어서 앞으로도 절대 펜을 꺾을 수 없을 것 같다.
작가활동을 하며 겪어온 모든 일들과 기회가 늘 잘 풀렸던 것만은 아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한 번 외주가 잘되면 꼬리에 꼬리를 물고 계속해서 진행되며 주 수입원이 되는데 나에겐 해당되지 않았던 것 같다. 물론 내 실력이나 결과물이 계속 그 거래처와 일을 할 만한 정도는 아니었을 수도 있지.
왜 다른사람들은 이렇게 잘 되서 계속 수입이 생기는데, 왜 난 겨우 딱 한 번 정도 이러고 말지. 하는 생각이 나를 좀먹었던 때가 있다. 게다가 웹툰작가라는 직업에 한 번 도전한답시고 준비한 순간부터 정식 연재기간까지 들어온 모든 외주 제안을 거절했더니 세상에, 외주가 거짓말처럼 아주 뚝 끊겨버렸다. 물론 그 이후에 종종 들어온 의뢰작업이 있었지만 아직 한 건은 공개되지 않았다. 물론 때되면 알아서 공개되는 것이므로 그 때 본격적으로 광고 해도 되겠지만.
게다가 2018년에는 아주 충격적인 사건이 있었다. 드디어 내 필명으로 된 책, 대망의 '카페 OK' 1권이 발간되서 아주 좋아했다가 그 이후 담당 PD님께 내 가슴에 비수 꽂는 말을 들어서 한동안 깊은 우울감과 방황에서 벗어나질 못했다. 이 우울감은 곧 만성적인 질환이 되서 나를 2년 넘게 괴롭혔고 세상을 떠나고 싶다는 충동이 들어 경찰관 분들이 집에 출동도 여러번 하셨었다.
계속 나자신을 질책하고 하루 빨리 좋아지지 않는 증상 때문에 내가 너무나 쓸모없고 보잘 것 없이 느껴졌다. 왜 내가 이런 질환 때문에 고생해야 하나 싶기도 하고. 물론 감사하게도 내 주변에 좋은 사람들 덕에 '네 잘못이 아니다'라고 위로해주며 어떻게든 나를 사람구실(?)하게 만들어주기도 했다. 그렇게 내가 아주 좋은 사람이 아닌 걸 알면서도 이렇게 내게 본인의 마음 한 켠을 내주고 계속해서 신경써준다는 건 정말 감사한 일이다.
물론 나도 매번 받기만 하는 것도 아니고, 주변 사람중 하나가 힘들다 하면 내 선에서 아낌없이 뭔갈 내어주고 그 사람의 행복과 안녕을 진심으로 빌어주기도 한다. 물론 충분치 못해서 늘 미안한 마음이 더 크게 느껴질 때가 많다. 그런데 일이 끊기고 그림 작가로서 제대로 된 활동조차 하지 못하니 지금 당장에 내 생계와 당장 옆의 사람을 신경써주지 못하는 상태가 되니 너무나 죽을맛이었다.
이런 지지부진하고 고통스러운 시기는 지금까지 계속 진행됐다. 차라리 뭐라도 제대로 하나 해서 고정수입이 생겨 계속 일을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냐만 늘 내가 바란다고 모든게 이뤄지는 건 아니다. 게다가 최근엔 너무나 크게 마음고생을 한 일이 있어서 아무에게도 털어놓지 못하고 가족조차 몰랐다. 결국 전문 상담사분께 내가 왜 이런 고통으로 근손실도 오고 살도 빠지는가 싶어서 왜 지금까지 이런 마음고생을 하게 된 아주 장황한 대서사시를 털어놓자 이만하게 버틴 것 만으로도 다행이란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이젠 더이상 고생하는 일 없이 나를 지키는 법을 제대로 알고 꾸준히 치료를 받으면 더 단단해질 것이라고.
그런 담담한 위로와 현실적인 조언을 듣고 나서 좀 더 생각을 해봤다. 계속 내 아픔을 앞세워서 재활을 놓치면 작업을 영영 못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닥치는대로 일자리를 구하기 시작했다. 덕분에 우연찮게 닿은 연이 내게 전적으로 서포트, 엔터테인먼트 해주고 싶다는 제안을 해왔고 당장 같이 일하게 됐다. 아주 작은 캐리커쳐 작업부터 시작해서 여러가지 일들을 같이 하게 되었다.
물론 여기서 내가 하고 싶은 일들을 먼저 제안서 제출을 하고 이런 일정에 맞춰 나도 계속 창작 작업을 해 나가고 싶다 이야기 해야겠지. 그렇지만 이 회사는 나의 어떤 가능성을 보고 이런 제안을 선뜻 내민 것인지는 알 수 없겠지만 어쩌면 내 주변의 말대로 인생의 전환점이 될 수 있겠다는 미약한 가능성을 조금이나마 보게 됐다. 동굴 속에 있는 것도 2년+a면 충분히 지냈다. 이제 나도 곰팡이와 먼지를 털어내고 바깥세상에서 느껴보는 따스한 햇살과 공기도 좀 만끽하고 싶다.
글을 전부 갈아치우기 전엔 거의 내 우울을 빼곡하게 채운 일기장이라면, 이젠 정말 제목 그대로 내가 이런 상황을 어떻게 타개해나가고 어쩌다 귀인을 만나 이런 생각지도 못한 기회를 잡았나 싶어서 아직도 현실 감각이 없는 상태에서 글을 적는 것이라 분위기가 훨씬 많이 달라진 걸 체감한다.
물론 내가 어떤 어려운 사정을 건너왔는지 다시 리마인드 하는 기분으로 조금씩 글을 다듬어 속편으로 연재할 생각이지만 지금은 내가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조금이나마 이야기를 해야할 것 같다는 생각에 자기 전 컴퓨터를 켜서 근황을 전해보려고 한다.
앞으로 또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알 수 없지만, 당장 기회라고 날아온 것을 저버릴 수는 없으니 마음을 열고 뭐라도 잡아야 한다. 지금 나는 뭘 가릴 처지가 아니니까. 물론 아직 여러분께 공개하지 못한 여러 프로젝트들을 기획중에 있지만 언제라도 엎어질 수 있는 가능성이 있으니 무어라 확신을 못드릴 것 같다.
일이 확정되고 조금이나마 윤곽이 잡히면 그 때 이야기를 하면서 조금씩 세상에 드러낼 수 있겠지만. 뜻하지 않게 가장 마음이 힘들고 어려울 때 손을 내밀어준 사람을 절대 내쳐서는 안되겠지. 나는 이 걸 꼭 잡아서 부디 내 인생에 전환점이 되었으면 한다. 아홉수도 겪을 만큼 겪고, 갑자기 전혀 예상치도 못한 친지의 부고를 들으며 잠시 멘탈이 흔들리기도 했지만 산 사람이니 어서 일상으로 돌아가 내 할 일을 해야한다.
그래서 나는 이런 아픔이 있었고 치유되기엔 다소 시간이 걸리겠지만 내가 이렇게 일상으로 돌아오기 위해 극복하는 과정을 조금 적어보고자 한다. 물론 그 전에 내가 겪었던 수난과 고통도 다시 적어올리겠지만 이번 리뉴얼 버전은 그걸 어떻게 헤쳐나갔는지에 좀 더 초점을 두고 싶다. 그래서 일부러 모든 글을 갈아엎은 것도 있다.
특히 좋지 않은 감정은 전염된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래서 내가 겪은 일을 담담히 적되, 다른 사람에게 그런 좋지 않은 감정을 물들이지 않기 위해 나도 최대한 드라이하게 써서 난 이렇게 잘 겪어와서 지금은 나름대로 사람 구실하며 지낸다고 이야기하고 싶다.
앞으로는 이 브런치가 내가 그동안 프리랜서 생활을 하며 겪었던 온갓 쓴맛, 단맛, 매운맛등을 이야기 하는 장소보다는 그간의 세월(?)을 돌아보며 다음 번엔 좀 더 성숙한 사람이 되는 데에 초점을 두고 운영될 것이다. 이 전에 투고된 글이 좀 더 좋았다고 하셨던 분들도 있겠지만 이런 저도 견뎌주셨으면 한다.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