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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슴푸레 Mar 22. 2024

크로바백화점 형민이 언니

  전자 앞에서 최고 부자는 크로바백화점 아저씨였다. 아저씨네도 우리 집처럼 다섯 식구에 아들, 딸, 아들 삼 남매를 두었다. 아버지와 가까이 지냈고 골목 하나를 두고 살아서 형민이 언니하고 나는 친하게 지냈다. 영산포인가에서 정미소를 하다가 아줌마가 아파서 수원으로 올라와 양품점을 차렸는데 대박이 났다고 했다. 아트박스니 하는 펜시점이 없던 1985년의 크로바백화점은 예쁘고 반짝거리는 것이 많아 한번 들어가면 헤어 나올 수 없는 별세계였다. 일반 점포 네 개 정도를 터서 매장이 넓고 깊었다. 가게 진열장에는 크리스털 세공을 흉내 낸 유리 목걸이와 핑크색, 레몬색, 민트색 향수가 미니 호리병에 담겨 있었다. 크로바백화점엔 물건을 사려는 여공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얼마나 잘 버는지 돈을 아주 쌀 포대에 담아서 성지회관 체신부에 질질 끌고 가면 거기 과장이 줄도 안 세우고 바로 입금 처리를 해 줬어. 누군 계속 기다리는데 형민이 아빠가 얼마나 부러웠나 몰라. 엄마는 입버릇처럼 말했다.


  크로바백화점은 미적 감각이 뛰어났다. 암녹색 바지에 진홍색 블라우스. 아찔한 뾰족구두에 금장을 한 까만 핸드백. 차르르 미색 실크 스카프에 무심히 찌른 로열 블루 브로치. 쇼윈도를 보고 있으면 어린 나도 저절로 발길이 멈춰졌다. 형민이 언니네 안채도 그랬다. 미술관에 들어선 느낌이었다. 실내엔 그림과 조각상이 많았고 벽돌이 거실 내벽에 운치 있게 박혀 있었다. 자주 인테리어를 바꿨다. 언니는 나보다 한 살이 많았고 조용했다. 여름이면 언니네 화단에서 원추리잎과 노란 금잔화를 따서 돌로 짓찧어 소꿉장난을 했다. 둘 다 말수가 적었지만 쪼그리고 앉아 흙에 물을 부어 밥을 짓고 이파리들로 반찬을 만들며 열중하고 있으면 시간이 몇 뭉텅이씩 빠져 있었다. 언니도 나처럼 커트 머리였고 마르고 키가 컸다. 형민이 언니를 형민이 언니라고 부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처음 알았을 때, 같이 소꿉장난을 하며 놀 때 줄곧 미선이 언니라고 불렀다. 언니는 몇 년 후 형민이로 이름을 바꾸었다. 천주교를 믿었고 그림을 잘 그렸고 손이 고왔다.


  학교에 들어가기 전부터, 학교에 가선 2학기 초까지 같이 놀았다. 3학년 지영이 언니와 2학년 형민이 언니. 그리고 1학년인 나는 자매처럼 지냈다. 오후반이던 어느 날. 셋이 학교를 안 간 그날 전까지. 지영이 언니네는 대가족이었다. 지영이 언니 위로 언니 둘이 더 있었고 아래로 준혁이가 있었다. 아들을 낳으려다 보니 그렇게 됐다고 했다. 지영이 언니는 예뻤지만 욕심과 호기심이 많았다. 터울 지는 언니들이 많아서였을까. 세상을 알았다. 지영이 언니가 말했다. 우리 학교 가지 말고 남문에 시장 구경 가지 않을래. 버스비는 다들 있으니까 구경만 하고 오자. 얼마나 재밌는 게 많다고. 뭔가에 홀린 듯 평소라면 꿈도 못 꿀 일을 하고야 말았다. 형민이 언니와 나는 지영이 언니와 함께 29번 버스를 타고 영동시장에 갔다. 물건들을 쌓아 놓고 파는 리어카들 틈에서 지영이 언니를 잃어버리지 않으려고 형민이 언니 손을 꼭 잡고 걸었다. 골라 골라. 아저씨도 골라. 아줌마도 골라. 아가씨도 골라. 골라 골라. 있을 때 골라. 산처럼 쌓인 옷 무더기 위에서 옷 장수가 손님을 끌기 위해 박자를 타며 노래를 했다. 정신이 쏙 빠져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야! 너희들 여기서 뭐 하고 있는 거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엄마가 우리를 향해 소리를 빽 지르고 달려왔다. 심장이 요동쳤다.


  두어 시간 지각했지만 아이들이 일제히 나를 쳐다보는 걸 느끼며 교실 문을 열었다. 엄마는 복도 교실 앞문 앞에서 담임 선생님께 뭐라고 말하고 뒤도 안 돌아보고 가 버렸다. 바른생활책에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일생일대의 첫 일탈이 실패했다. 커서 뭐가 되려고 그러냐는 둥. 내가 못 산다는 둥, 어디서 부모를 속이냐는 둥, 간도 크다는 둥. 학교에 오면서 내내 들었던 엄마의 질책과 한탄에 천하의 불효자가 된 기분이었다. 학교를 마치고 집에 가면 허벅지가 터지도록 맞을 텐데. 내가 미쳤지 왜 따라가서는.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그날 이후 형민이 언니는 나와 놀지 않았다. 지영이 언니하고도 놀지 않았고 집에서 나오지 않았다. 그림만 그리기엔 지루할 텐데 언니는 안 심심할까. 내가 안 보고 싶을까. 언니이. 언니네 집 앞까지 갔지만 한 번도 부르지 못했다. 이제 너랑 안 놀아. 그 말을 내 귀로 게 될까 봐 두려웠다. 형민이 언니 엄마는 우리 착한 애가 어쩌다 학교를 다 빼먹었는지 모른다고 하느님께 나쁜 길로 가지 않게 더 열심히 기도드려야겠다는 말을 했다고 했다. 열살 남짓의 여자애 셋이 책가방을  채로 어리바리 시장을 구경하는 모습은 너무나도 눈에 잘 띄었다고 했다. 은하슈퍼 수경이 엄마는 시장에 왔다가 우리를 발견했다고 했다. 전자 앞에 내리자마자 아이고 형님 큰일났어요. 지금 얘네가 남문에서 어쩌고저쩌고. 엄마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우리를 잡으러 왔다고 했다. 그 일은 전자 잎에 소문이 쫙 났다.


  하교 후 눈물이 쏙 빠지게 혼났다. 흐흐흑. 하도 울어 가만있어도 흐느껴졌다. 또 그럴 거야 말 거야. 이놈의 가시낙 년이. 뭐가 되려고 그러냐. 동네 창피해서 얼굴 들고 살 수가 없어. 에미 얼굴에 똥칠을 해도 유분수지. 학생이 학교를 안 간다는 것이 그렇게 큰 일인지 몰랐다. 싹수가 노랗다는 말을 들을 만큼 잘못한 일인가 계속 생각했다. 엄마가, 은하슈퍼 아줌마가, 동네 사람들이 우리를 예비 비행 청소년쯤으로 생각하는 건 아무렇지 않았다. 언니가 없는 내게 친언니인 양 다정했던 형민이 언니와 영영 놀지 못하게 된 것이 슬플 뿐이었다. 나는 그 사건 이후 지영이 언니와 놀지 않았다. 형민이 언니가 나와 더 이상 놀지 않는 것처럼.


미선이 언니는 그렇게 형민이 언니가 되어
내게서 멀어졌다.


한 줄 요약: 어린이의 호기심이 어른들에게 과하게 왜곡되는 것이 당황스럽고 안타까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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