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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모는 세모꼴 구멍에

by 한아


"그 아줌마 참 답답하네, 세모를 넣으려면 먼저 구멍을 세모로 만들어야지."

"오.. 비유가 찰떡인데?"




동동이 어머니한테 문자가 왔다.

'동동이는 이번 달까지만 수업하고 그만두겠습니다."

맥이 탁 풀린다. 학원을 다니다가 그만두는 아이들이 한 둘도 아니고, 직접 찾아와 언급을 하는 건 고사하고, 하다못해 전화 한통도 없이 문자로 일방통보하는 것도 부지기수인 일이라 더 이상 섭섭하지도, 놀랍지도 않다. 그동안 아이를 가르쳐준 선생님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를 지켜주는 것, 혹은 아이에게 인간관계를 대하는 올바른 태도를 가르쳐주기 위해서라도 몇달간 같이 공부한 친구들과 선생님께 작별인사를 하게 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하지만, 그건 내 생각일 뿐. 옷가게에서 할인하는 옷을 뒤적거리다가 더 맘에 드는 옷이 보이면 입어보던 옷을 옷걸이에 다시 걸어놓지도 않은채 아무렇게나 던져놓고 다음 가게로 옮겨가는 형국이니, 어머니가 내는 교육비는, 특히 초등부에서는 아이의 지식과의 단순한 등가 교환이 아니라, 아이의 태도와 습관을 바로잡고 동기부여까지 할 수 있게 해주는 그 모든 과정이 포함되어 있다고 아무리 말해봐야.' 무슨 개소리. 실력이나 늘려놔.' 라는 답이 돌아올 것 같다. 그런고로, 문자에 맥이 풀린 건 아이가 그만둬서도, 문자로 일방통보를 받아서도 아니었다.


이번 겨울이 지나면 초등학교 4학년이 되는 동동이는 나와 수업을 하는 한달 반동안 단 한번도 숙제를 해오지 않았다. 남아서 숙제를 하도록 하면 본인이 쓴 글씨를 선생님은 물론이고 스스로도 알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수업에 대한 의욕도 전혀 없는 동동이는 늘 마지못해 끌려온 심드렁한 표정으로 구석에 앉아 지렁이처럼 희미하게 꿈틀거리는 연필자국 가득한 노트와 책을 펼친 채로 수업시간 내내 멍하니 딴 생각을 하거나 낙서를 하곤 했다. '10문장 중에 딱 한 문장만 이쁘게 써보자'를 시작으로, 없는 칭찬을 마른 빨래 쥐어짜듯 짜내어 폭풍 칭찬을하고 조금이라도 숙제를 한 날은 친구들 앞에서 제일 먼저 발표시키고, 물개 박수를 쳐주고 하면서 조금씩 '수업을 들을 수 있는 상태'로 바꿔나갔다. 알아볼 수 없던 글씨는 또박또박까지는 아니어도 봐줄만하게 되었고, 숙제도 5번중에 한번 해오던 녀석이 5번중 한번 안 해오는 수준으로 나아졌다.


이제 나와 눈을 맞추고, 글씨도 최소한 상대방이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는 쓰고, 숙제를 다는 아니어도 일부라도 해오기 시작했는데. 실력이 늘지 않아 그만 두겠다니. 늘고 말고 할 실력이 있어야지. 수업을 받아들일 준비조차 안되있었는데...옷입히고 양말신기고 신발신겨 달리기 시합 준비시켜놨더니 경기 시작도 전에 3등안에 못든다고 다른 팀에 가겠다는 판이다. 이런 일이 처음도 아닌데, 유난히 맥이 풀린 이유는 뭘 해도 의욕없고 심드렁하던 동동이가 글씨 칭찬받고, 숙제 잘했다 박수받으며 그래도 표정이 밝아지고 수업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영어실력 느는 것보다 훨씬 더 감사하고 기쁜 변화였는데 앞으로 어디서 공부하든 그 변화가 오래 지속되길 바랄 뿐...


속상해서 오늘 있었던 일을 숙제하는 중인 장초딩에게 이야기했다. 동동이의 글씨 쓰기 비포어&애프터 사진도 보여주며, 뭐 딱히 반응을 기대한 건 아니고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하는 심정으로 장초딩을 대나무 숲 삼아 넋두리하듯...

"그래서 말야.. 가방만 메고 왔다갔다하면 저절로 애 머릿속에 뭐가 들어갈 거라고 생각하는 거 아니니? 그런 애들이 학원에 전기세 내주는거야.. 안 그래?"

그랬더니. 이 녀석 보소. 대답 한번 명쾌하다.

" 그 아줌마 참 답답하네, 세모를 넣으려면 먼저 구멍을 세모로 만들어야지."

"오.. 비유가 찰떡인데?"

"또 있지 엄마, 네모를 세모에 넣으려고 하면 귀퉁이를 잘라야 하잖아? 그러니까 애들이 생각없이 그냥 답지를 베끼는거야."

"음.. 그렇지 답을 베끼는 건 안되지. 이해가 안되서 공부하려고 참고하는 건 몰라도"

"숙제 안하면 혼나고, 시간은 없고, 그럼 별수 있어? 베껴야지? 걔들도 살려고 그러는거야."

"얼씨구.. 그래서 너는 지난번에 소장님이 숙제해오라니까 슬쩍 책을 학원에 두고 왔냐?" (문득 그때 일이 다시 떠올라 슬슬 열받기 시작하는 에미)

"에이... 엄마 그래두 난 대놓고 베끼진 않잖아. 안하면 안했지."

"자랑이다 이노무 시키야. 입만 나불거리지 말고 얼른 숙제 마저 해!!"

"아 눼...눼...또또.... 우리 엄마 급발진 하기 시작한다."

혀를 낼름 하며 무서운 척 숙제를 하는 녀석을 보며 생각한다.


비단 아이들 공부만 그럴까, 생각해보면 우리 삶의 많은 헛발질과 실수와 그로 인한 후회는 결국, 세모를 네모 구멍에, 네모를 동그라미 구멍에, 동그라미를 세모 구멍에 억지로 끼워넣으려는 것에서 시작되는 듯 하다. 공부를 하기 위해서 먼저 앉아있는 습관을 기르고, 글씨를 또박또박 쓰고 숙제 약속을 지키는 태도를 기르는 것 처럼 먼저 올바른 구멍을 제대로 만드는 것이 순서인데, 욕심 가득한 마음이 앞서, 순리를 어기고 엉뚱한 구멍 앞에 가서 들어갈 수 없다고 구멍 탓만 하는 건 아닌지. 그게 내 모습이기도 한 것 같아 괜히 낯이 뜨겁다. 안 맞는 구멍에 몸을 디밀다가 오도가도 못하고 끼어서 버둥대는 내 꼬락서니같기도 하고...이제라도 제자리를 찾아가려니 힘겨운게 당연하지... 매번 생각없이 코후비고 있는 것 같으면서도 가끔 이렇게 작은 철학자 같은 소리를 해서 엄마를 생각하게 만드는구나. 시간이 걸려도 너도 너에게 딱 맞는 모양의 구멍을 만들어가겠지. 그 과정이 때로는 힘들고 괴롭고 원하는 대로 되지 않는 경우도 많을거야. 그럴때마다 네가 억지로 몸을 구겨넣거나, 어느 한 귀퉁이를 잘라버리려 하지 않도록 언제나 너를 믿고 응원할게.

잘자라주고 있어서 고마워. 사랑한다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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