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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융이 Feb 11. 2024

녹차의 맛

영화 <녹차의 맛>을 본 후의 생각


나는 평소에 차를 즐겨 마시지 않는다. 워낙 달달한 것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카페에 가도 딸기라떼나 에이드를 주문한다. 마땅히 마실 게 없으면 복숭아 아이스티라도 시키는 사람이다. 커피는 주문하지 않는다. 써서 못 먹는다. 차도 굳이 사 먹고 싶은 메뉴는 아니다. 한 가지 예외가 있다면 얼그레이 차는 좋아한다. 전부터 얼그레이 쿠키, 밀크티는 좋아했기 때문에 비교적 쉽게 접하고 좋아하게 되었다.


카페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주로 얼음을 가득 넣은 얼그레이 차를 마셨다. 일하면서 갈증을 달래기에 가장 좋았다. 얼음이 녹아도 밍밍해지지 않는다. 오히려 두면 둘수록 깊은 맛이 우러난다. 물론 차는 커피의 진한 맛이나 에이드의 강한 단맛에 비하면 꽤 미적지근하다. 그렇지만 차만의 ‘깔끔한 맛’을 알게 됐다.


나에게 이런 차 같은 영화가 바로 일본 영화다. 최근에 본 영화 <녹차의 맛>은 도쿄 외곽 시골에 사는 가족들의 일상을 보여준다. 저마다 고민하는 모습과 기쁨을 느끼는 소소한 순간들을 담아낸다. 단출하지만 일명 골 때리는 상상력을 더해 2시간 20분가량 영화가 이어진다.


보통의 일본 영화는 지루하다. 졸음이 몰려온다. 괴짜스럽지만 일상과 가장 가까운 이야기. 동시에 현실이 영화만큼 아름답지는 않아서 나와는 동떨어진 듯한 이야기. 그래서 더 잠이 오는 이야기다. 어디서 웃어야 할지, 왜 웃긴 건지도 모르겠는 장면. 정적이고 어이없는 장면들의 연속처럼 느껴진다. 한마디로 재미없다. 뭘 얘기하고 싶은지도 잘 모를 때가 많다. 디즈니나 마블 영화같이 화려한 연출과 스토리에 비하면 확실히 심심한 맛이다.


하지만 그만큼 긴장 없이 편안하게 볼 수 있다. 엄청난 집중력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세계관을 이해하려고 애써 노력하지 않아도 된다. 심지어는 보다가 잠들어도 괜찮다. <녹차의 맛>과 더불어 대개의 일본 영화는 이야기가 점점 끝나갈 때쯤 본연의 맛을 드러낸다. 마치 냉수에 티백을 막무가내로 집어넣으면 한참이나 기다려야 차가 우려지는 것처럼 말이다.


물론 마무리만 잘한다고 해서 좋은 영화가 될 수는 없다. 다른 사람에게 추천하는 것도 망설여진다. 그래도 일본 영화를 보면 마음이 평화로워지고 삶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 보게 된다. 어느새 졸았던 것도 잊고 다시 영화를 트는 나 자신을 발견한다. 그 과정을 몇 번 반복하면 내 웃음 코드와 맞는 영화가 나타나기도 한다. 이런 기억 때문에 계속해서 일본 영화를 보게 된다. 나는 일본 영화를 안 좋아하지만 꽤 자주 감상하는 사람이 되었다.


<녹차의 맛>도 난해할지라도 웃음을 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안고 보았다. 결론 먼저 얘기하면 이 역시 영화를 보는 내내 알 수 없었다. 무슨 얘기를 하고 싶은 건지 도통 감을 잡기 어려웠다. 녹차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아니고 눈에 띄게 클로즈업해서 비추는 것도 아니다. 그저 가족이 모여서 차를 한 잔 마신다. 잠시 멍 때리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마저도 이 영화의 제목을 잊을 만큼 스근하게 지나가는 장면으로 나온다. 그저 크레딧이 내려갈 즈음 “아, 이건 녹차 같은 영화구나.” 하게 될 뿐이다.



개인적으로 녹차는 맹물에 가까운 맛이다. 그런데 물보다는 좋다. 뜨거운 것보다 미지근한 온도가 꼭 알맞다고 느껴진다. 입맛이나 취향에 따라 느끼는 바는 달라질 수 있다. 꼭 녹차가 아니더라도 누구에게나 이런 맛은 있을 것이다. 잘은 모르지만 내게 맞는 맛. 묘하지만 자꾸 찾게 되는 것. 이렇게 특별히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뜨뜻미지근한 것이 내 삶을 더 가득히 메운다고 느낄 때가 있다. 내게는 가끔 마시는 차와 일본 영화가 그렇다. 알 수 없는 의무감에 펼치는 책과 일기장이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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