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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ylvia Jul 07. 2021

나이 들어간다는 것에 대하여

얼마 전 사진에 찍힌 내 눈가의 주름을 보고 놀랐다. 아직도 머릿속 나는 20대 파릇파릇한 청춘인데 이상하게도 몸은 내가 서른 중반 이라는 것을 아는 것 같다. 영원히 팽팽할 것 같았던 동그란 얼굴에도 주름이 서서히 자리 잡아가고 있다는 게 아직은 신기하다. 흰머리 발견되는 날은 더 생경한 날이 되겠지.


나이 든다는 것이 마냥 슬플 줄만 알았는데 이상하게도 늘어가는 주름이 그렇게 싫지만은 않다.

물론 솔직히 말하면 20대의 파릇한 싱그러움과 젊음의 상징인 탱글한 피부가 더 이상 없다는 사실은 내 심장에 작은 스크래치를 남겨 놓지만, 30대가 되어 이렇게 하나둘씩 늘어가는 주름도 나름 "멋"이라는 생각이 든다. 


예전에 학교 일이 힘들고 질풍노도를 겪는 중학생 아이들이 하나같이 말을 드럽게 안 들을 때, 지긋이 나이가 드신 동료 선생님께 물은 적이 있다. "선생님은 어떻게 그렇게 가르치시죠? 언제쯤 저도 그렇게 아이들을 가르칠 수 있을까요?" 내 질문에 호탕하게 웃으시더니 세월이 지나고 보니 어느덧 그렇게 하고 있더라 말씀을 하셨다. 


“지금 네가 겪고 있는 것들을 통해 너는 많이 배울 것이고 시간이 지나면 그것들이 헛된 수고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될 거야.
너를 괴롭히고 있는 것들이 덜 힘들어 질테니 조금만 힘내.”

과연 그럴까? 내가 이곳에서 무엇을 배우고 있는 것이며 먼 훗날 나는 어떤 모습이 되었을지 상상이 되지 않아 이 선생님의 말을 의심했다. 의미없이 고개만 끄덕이며 나에겐 절대 그런 날이 오지 않을 거라 확신했지만 그때 해주셨던 그 말과 선생님의 웃는 얼굴에 그려졌던 크고 작은 주름이 인상 깊게 남았다. 그날 이후에도 어떤 힘든 일을 겪을 때 이 대화가 종종 떠오르곤 한다. 


과테말라에서 처음 교사 생활을 시작했다. 그때 배웠던 여러 가지 방법들이 지금 학생들을 가르치는데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 일일이 다 나열 할 수는 없지만 이 경험을 통해서 가장 크게 배웠던 것 하나가 클래스 미팅이었다. 이 학교에서는 일주일에 한 번씩 학생들과 함께 클래스 미팅을 했는데 그때 배웠던 방법이 학생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일을 처리하는 데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해주고 있다. 


클래스 미팅은 서로를 존중하고 협력하는 공동체를 만들기 위한 학급회의 시간이다. 모두가 동등한 위치에 있을 수 있도록 동그란 원을 만들어 앉는다. 보통 때 보다는 조금 더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토킹피스 (Talking piece) 를 패스하며 한명씩 자기의 감정을 표현하고 학급에서 보이는 문제가 있으면 제시한다. 특정인을 지목하지 않고 진행되기 때문에 학생들은 자기의 생각을 솔직히 표현하고 서로의 의견을 진지하게 들을 수 있는 시간을 갖는다.  


이 시간을 통해 학생들은 그동안 알지 못했던 서로의 모습을 좀 더 알아갈 수 있다. 서로를 존중하는 대등한 관계에서 미팅이 진행되다 보니 아이들도 자기의 의견과 감정이 중요하다고 느끼게 된다. 더불어 내 의견만큼 다른사람의 의견도 소중하다는 것을 알게되는 시간이기도 하다. 인간과 인간 사이에 존재하는 선에 대해서 배우고 그 선을 넘으면 안 된다는 것과, 넘게 되면 어떤 결과가 오는지 함께 얘기를 한다. 


몇년 전 내 눈물 콧물을 쏙 빠지게 만들었던 한 학생이 있다. 선생님이건 아이들이건 상관없이 직간접적인 언어와 육체적 폭력을 행하던 아이었다. (내 주름의 8할은 그 학생 덕분에 생겼다.) 도저히 돌파구가 보이지 않을 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클래스 미팅을 시작했는데 기대했던 것보다 더 큰 의외의 효과를 보았다. 이 시간을 통해 그는 자기의 행동이 얼마나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지 자각했고 비로소 조금씩 자신의 감정을 조절하며 학교생활에 적응해갔다.


그는 학기말 마지막 미팅에서 눈물을 꾹꾹 참으며 이런 말을 전했다. 


“지금까지 6-7개 학교를 다녔었는데 지금 이 학교가 최고였어. 그동안 내 무례한 행동 참아 줘서 고마워. 선생님도 나같은 학생을 만나본 적 없을텐데 노력해줘서 고마워요.” 


깨진 독에 물 붓는 것만 같은 시간이었는데 학생이 그간 내 노력을 알아 줬다는 것에 감동했다. 수많은 클래스 미팅의 이야기를 통해 아이들은 성장하고 성숙해졌고, 그들이 자란만큼 나도 선생으로서 많이 성장했다. 아이들을 위해서 시작한 클래스 미팅이었는데 오히려 그것이 내가 더 좋은 선생이 되도록, 더 나은 사람이 되도록 가르쳐주고 있다. 물론 아직도 미숙해서 종종 크고 작은 실수를 하기도 하지만 한 해가 거듭날 수록 쌓이는 경험을 통해 내가 감지하고 있던 것 이상의 성장을 했다는 것을 느낀다. 그 전에 나였더라면 굉장히 스트레스받았을 법 한 일들인데 신기하게도 그런 일들로 더 이상 씨름을 하지 않으니까 말이다. 학생들이 하는 행동이나 말에 즉각적으로 반응하고 그것으로 인해 스트레스받았던 예전의 나는 많이 사라졌다. 아직도 분명 학생들이 두통을 선사해 주는 날이 있긴 하지만 지금은 이 날도 지나갈 거라는 걸 알기에 그전보다는 조금 더 여유로운 마음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이제야 동료 선생님이 했던 말에 조금이나마 공감을 할 수 있게 됐달까. 


이런 날도 있으면 저런 날도 있는 거지.

오늘은 비가 왔다면 내일은 해가 뜨겠지.

너무 걱정하지 말자.

비가 오고 난 뒤에는 꼭 해가 뜨니까.

태풍 뒤에는 가끔 무지개가 뜨기도 하니까.


변화하는 나의 모습을 통해 씨름하고 울고불고 난리 쳤던 순간들도 결국 지금의 나를 만드는데 필요한 시간이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기억하고 싶은 시간과 지우고 싶은 시간들은 얽히고 뒤섞여 앞으로 살아갈 날들의 밑거름이 된다. 그 모든 순간들은 인생의 기쁨과 시련을 다 안을 수 있는 넓은 텃밭을 내 마음 안에 마련해 준다.


정말 도망가고 싶고 그만두고 싶었던 적도 많았는데..어찌저찌 해서 그 시간을 견디고 버티다 보니 내가 모르는 사이에 내 안에 밑거름 좋은 텃밭이 하나 생겼다. 그것을 잘 가꿀 수 있는 내면의 힘도 조금 길렀다. 단단해진 내면의 힘은 힘든 날은 반드시 지나갈 거라는 믿음을 심어 주었고 해 뜰 날을 기대하는 희망도 품을 수 있게 해준다. 한해 두해 나이를 먹으며 인생이 나에게 주는 숙제를 풀다보면 언젠가는 지금 마련한 마음의 텃밭에 예쁜 꽃들이 피기도 하겠지? 


자글자글 주름이 신경쓰이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지난 몇년 간 변화한 나를 보며 처음으로, 나이 들어간다는 것은 참 멋있고 아름다운 일이라는 생각을 했다. 내면의 힘이 생기는 동안에 내 얼굴에는 주름이 생겼지만 이 선들이 그동안 나의 배움을 상징하는 것이라면 그것보다 더 아름다운 것 또한 없지 않을까. 먼 훗날 젊음이 스치고 지나간 자리에 삶이 선물해준 멋진 주름 몇 개 가지고 있는 품위있는 어른이 되고 싶다. 내 얼굴에 곱게 자리 잡은 주름이 내 인생을 말해주는 증표가 되어 준다면 그것처럼 멋진 것도 없지 않나. 하지만 이왕 생길거 아름답고 우아하게 잡혔으면 좋겠다는 욕심은 부려본다. 



아, 정말 비싼 아이크림을 사야 할 때가 온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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