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틴 로젠, 경험의 멸종
미국의 기술철학자 루이스 멈퍼드는 1934년 기술이 문명을 어떻게 변화시켰는지 글을 썼다. 글의 초점은 주로 각 시대에 등장한 발명품에 맞춰지지만 그 발명품이 뿌리를 내리기 전에 일어난 태도의 변화, 즉 "소망, 습관, 아이디어, 목표의 재조정"도 그만큼 중요하다고 했다.(46)
크리스틴 로젠의 <경험의 멸종>(어크로스, 이영래 옮김, 2025)을 읽었다. 저자는 "컴퓨터, 스마트폰, 스마트 스피커, 웨어러블 기기, 미래에 등장할 삽입형 기구는 물론, 이런 장치들이 수집할 데이터를 번역해 줄 소프트웨어, 알고리즘, 인터넷 플랫폼"(12)의 발달로 인해 오늘날 "특정 유형의 경험들" 즉 "서로 얼굴을 맞대는 상호작용이나 쾌락을 추구하는 여러 활동과 같이 진화의 역사에 깊이 뿌리내린 경험들"(11)이 사라지고 있다고 말한다.
그가 보기에 우리는 발달한 매개 기술로 인해 현실과 매개된 세계 사이를 구별하는 능력과 필요성을 상실해가고 있다. 큐어논(QAnon)이 온라인 정보에 익숙해진 나머지 그것을 진실로 믿고 현실 세계에 테러를 가하는 것 - 그리고 더 나아가 그 매개된 진실을 현실로 실현하고자 하는 의도로 - 이 그 사례인데, 굳이 멀리 가지 않아도 우리는 이런 태도를 가진 사람들을 근처에서 자주 마주하고 있다.
왜 이런 구분의 '혼동'이 발생하는가? 저자는 "알고리즘을 기반으로 개인화된 경험이 지배하는 가짜 현실 psuedo-reality"에 우리가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라고 본다. 매개된 경험에 너무나 익숙해진 나머지, 우리는 매개된 경험이 일종의 환상임을 자각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물론 그도 큐아논을 예외적인 사례라고 언급하긴 한다. 대부분은 그 수준까진 가지 않는다.)
우리는 이미 너무 많은 정보를 알고리즘의 먹이로 제공했다. 플랫폼이 우리의 삶의 일부분이 되는 과정은 그 충격과 후폭풍에 비해 너무 매끄럽게 이루어졌다. 그것은 플랫폼이 제공하는 약속이 우리가 열망하던 바에 맞닿아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번거로운 일을 줄여주는 것, 불필요한 비용을 줄여주는 것, 불편한 관계를 피하게 해주는 것.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는 대신, 호객꾼과 진상, 재수 없는 상사, 오래된 회사들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해 준다는 약속이 우리에게 얼마나 '매력적'이었는가 생각해 보라.
"항공 업계에서는 불연성 소재로 좌석 쿠션을 만들어가 통로에 비상등을 추가하는 등 재료와 구조를 바꿔서 항공기의 위험을 줄이는 복잡한 과정을 "치명성 제거"라고 부른다. 디지털 시대의 쾌락도 비슷한 치명성 제거의 과정을 거쳤다."(222)
물론 그 부작용이 만만치 않다. 우리는 인간 대 인간으로 대면하여 커뮤니케이션을 지속할 능력을 점차 잃어가고 있고, 우리가 무엇을 먹고 마시고 어디서 잘 지를 스스로 결정하는 힘을 빼앗겼다.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기보다 그것을 전시하기 위해 기록하는 데 몰두하게 만들었다. (우리는 이태원 참사의 현장에서 진행된 수많은 라이브 방송을 기억한다. 영원히 잊기 어려운 그 무심한 카메라들을.) 몇 가지 패턴화 된 감정 표현 이외에 연결의 수단을 상실하고도 우리는 좋아요, 싫어요, 하트, 리트윗을 누르며 '연결되었다는' 환상을 재현한다. 아니면 '밈'을 반복하면서 우리가 같은 세계와 감정 속에 있음을 드러내려 애쓰거나.
글씨 쓰기와 같은 다양한 신체적 활동들이 온라인상의 활동으로 대체되면서, 우리는 체화된 행위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었던 경험을 상실한다. 인간 삶의 상당 기간을 차지하는 지루한 시간을 기다리지 못하고, 우리의 관심을 잡아끄는 쇼츠에 시간을 낭비한다. 그리하여 "딴생각"이 우리에게 가져다준 위대한 발견이 재현될 가능성은 점차 축소된다. 비는 시간은 일종의 경멸의 대상이 된다. 숙고는 정치의 장에서도 제거되고, '사이다'만이 남는다. 모든 정책은 언제나 시간과 기다림, 지루한 논쟁의 결과물임에도 불구하고.
대면 관계의 상실은 결국 우리가 우리 행동의 실제 영향력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게 만든다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 우리는 사람 앞에서 직접 할 수 없는 말을 온라인에선 거리낌 없이 내뱉는다. 이제는 더 나아가 사람이 앞에 있어도 막말을 한다는 사례를 심심치 않게 본다. '너한테 하는 말이 아니었다'는 대꾸는 덤이다. 저자는 이러한 무례가 결국 실제로 대면한 사람의 감정을 읽는 훈련이 되어 있지 않은 것 때문 아니냐고 말한다. 복잡하고 미묘하게 뒤섞인 인간의 감정은 결국 대면 커뮤니케이션을 통해서만 체득할 수 있는데, 그게 안 되니까.
"현재 많은 기술은 사람조차 문제로 보는 것 같다. 장치, 플랫폼, 알고리즘을 통해 해결책을 제시해야 하는 문제로 말이다. 과거의 기술이 인간의 감각을 증폭시키는 것이었다면 오늘날의 기술은 자신의 감각을 불신하고 대신 기술에 의존하도록 우리를 훈련시킨다."(17)
감정의 오해, 식당 선정의 실패와 같은 '위험'을 제거하기 위해 매개된 경험에 의존하게 되면 "데이터에 근거하지 않은 경험에 거부감을 느끼고 불신하며, 다른 사람이 추천하거나 평가하거나 순위를 매기지 않은 대상에 대해 불안감을 느끼게 된다."(226) 당장 저녁에 뭔가를 새롭게 먹고 싶다고 할 때, 우리는 지도 앱을 켜고 별점을 보고, 후기를 읽고, 사진을 본다. 만약 리뷰가 부실하거나, 아예 없는 곳이라면 가볼 시도조차 안 한다. 예전이라면 우리는 실패를 감수하고 동네 마실을 나갔겠지만, 이제 별점이 있는 한 우리는 오로지 목적지로 가기 위한 이동만을 한다. 그리고 그것을 '합리적인 시간 활용'으로 받아들인다.
"여행은 예상치 못한 것, 방향 감각을 상실한 혼미한 상태에 자신을 맡기는 것이고 관광은 안전하고 통제된 것, 미리 정해진 것이다."(228)
우리는 이제 근처에 밥을 먹으러 갈 때에도 여행이 아닌 관광을 한다. 관광은 우리 대신 유튜버들이 한다. 그들이 먹어보고 내리는 평가, 그들이 가보고 보여주는 풍경이 우리의 관광 루트를 결정한다. 우리는 그들의 뒤를 밟으면서 그들이 보여준 화면을 개인적으로 '재소장'하기 위해서 같은 구도로 사진을 찍고, 영상을 찍고, 그 음식점으로 간다. 거기에 어떤 우연이 있나? 어떤 창의성이 있나? 이것이 저자의 문제의식이다. (그런데 이것이 정말로 새로운 매개 기술이 불러일으키는 특유한 문제인가?)
게다가 모든 순간을 기록할 수 있고, 그 순간을 전시하는 것이 사회적 관심을 끌어낼 수 있게 되면서 모든 경험은 '전시 가능한' 것과 그렇지 못한 것으로 서열화된다. 인스타그램에 올릴만한 경험을 제공하지 못하는 모든 공간은 그 스스로 인스타그래머블해지거나 관심 밖으로 밀려나게 된다. 숙고가 필수불가결한 미술관과 전시관이 사진 명소가 되고, 공간 스스로 인스타에 올리기에 적합한 포토존을 운영하는 방식으로 상호 발전하면서 경험 그 자체보다 '박제' 가능한 경험이 더 중시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사진을 다시 만들어내려고 하는 것은 아닐지 궁금했습니다. 우리는 사진의 사진을 재생산하려고 애쓰는 것이 아닐까요?"(236)
이러한 비판은 경험을 매개하는 새로운 기술들이 등장할 때마다 반복된다. 사진, 라디오, 영화, TV와 같이 대중의 지각과 경험에 영향을 미치는 매개 기술들이 등장했을 때 수많은 비평가들은 기존의 '경험'이 멸종될지 모른다는 우려를 내비쳤다. "사람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사진이 여행의 욕구를 대체할지 모른다고 걱정해 왔다."(237) "테오도어 아도르노는 1954년에 텔레비전이 만드는 "허위의 사실성"을 비판했다."(16) "벤야민은 말했다. "그림은 관람객을 사색으로 이끈다. 그림 앞에 선 관람객은 연상되는 것들에 자신을 맡긴다. 그러나 영화 프레임 앞에서는 그럴 수 없다. 장면은 눈에 포착되자마자 바뀐다." (246) 그렇다면 이번 기술은 이전의 기술에 비해 어떤 부분에서 질적으로 다른 걸까?
안타깝게도 이 부분을 상세하게 파고드는 기술을 찾기란 어렵다. "디지털 기술은 TV보다 더 큰 규모로 미래에 대한 우리의 예상 방식을 바꾼다."(16) 거나 "디지털 플랫폼에서는 그만의 기준을 따라야 하고 우리가 열심히 "공유"하는 이미지에 대한 소유권을 넘겨야 한다."(268)는 정도의 차이를 설명하긴 하는데, 이것이 기존의 매체 기술 비판과 얼마만큼 다른 궤인지를 구별하긴 어렵다.
그래서일까? 대안이 빈약하다. "많은 기술이 대면 대화의 어색함과 신체적인 한계 같은 것들을 "마찰 없이" 매끄럽게 만들고자 하지만 바로 그런 것들이야말로 우리를 인간답게 만드는 "딱 떨어지지 않는 경험의 조각들"이다."(41) "역사학자 루이스 멈퍼드가 그의 저서 <기술과 문명>에서 언급했듯이 "기술은 해방의 도구이자 억압의 도구다." 건전치 못한 영향으로부터 자신을 해방시키기 위해서는 기술로 가능해진 매끄러운 삶에 다시 마찰을 도입해야 한다."(325) 큰 방향에서 동의하는 것과 별개로, 이런 접근은 우리가 왜 '매개된 세계'로 도피하고자 했는지를 진지하게 고민하지 않은 것이 아닌지 의심하게 만든다.
책에서 말하는 것처럼 매개된 경험 자체가 모두 부정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거다. 빠니보틀의 여행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 세계 바깥의 사람과 삶에 대한 무지를 깨트릴 수 있고, 더 나아가 나 또한 여행을 가보고 싶다는 마음을 먹게 될 수도 있다. 이원일과 홍석천의 맛집 탐방을 보면서 그 지역에 출장을 가면 먹어볼 만한 음식들이 뭐가 있는지 알게 될 수도 있다. 매개된 경험이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지평의 확장이라는 건 그저 거짓되고 무의미할 뿐인가? 반드시 직접 접해야만 알 수 있는가? (예컨대 지금 당장 가자지구에 가야만 우리는 그곳에 대한 '진정한' 경험을 하는 것인가?)
우리가 손쉽게 잃어버리고 있는 게 무엇인지를 지적하는 것은 좋은데, 우리가 그것들을 정말로 잃어버리면 안 되는지, 그리고 그것을 대신하는 경험은 없는지, 그것이 언제나 불충분한지, 우리가 왜 그것들을 '버리겠다'라고 마음먹었는지도 같이 지적해야, 그것들을 어떻게 '구제'할지도 말할 수 있는 것 아닌가? 지금으로선 말 그대로 X세대의 복고풍 향수 이상의 인상비평을 넘어서기 어렵지 않나? (젊은 세대에 대한 비판도 곁들여서.)
오히려 오늘날 매개 기술이 발달하면서 그간 문제가 되지 않았던 것들이 문제가 되고, 그로 인해 우리의 선호체계와 윤리적 감각이 어떻게 변해왔는지, 그리고 그것이 만들어 내는 변화들에 조금 더 집중했으면 어땠을까 싶고. 다양한 분야에서 우리의 경험이 멸실되어 가는 과정을 짚어보는 것도 좋았지만, 우리가 그 과정에서 무엇이 더 낫다고 여기게 되었는지 그 변화를 짚어보는 게 나로선 더 깊게 파고들만한 주제가 아니었나 싶었다. (그렇다고 이 책이 쓰레기라는 게 아니다. 오히려 끝까지 읽게 만드는 힘이 있었기에 아쉬움도 느끼는 거다)
진짜/가짜의 도식적인 구분도 한편으로는 아쉬운 것이, 매개된 경험과 그렇지 않은 경험을 무 자르듯 나눌 수는 있는 건가? 수반되는 질문들이 꼬리를 물지만, 뭔가 '아날로그의 반격' 정도의 느낌으로 끝맺는 게 뒷맛이 쓰다. 결정적으로 이 모든 문제의 궁극적인 해결책이 '개인'에게 맞춰져 있는 거 같은 기분을 끝내 떨치지 못했다. 실패든 뭐든, 결국 그것도 시간과 돈이 주어진 사람들에게만 주어지고 있는 게 아닌가. 현대인의 '회피'가 사회적으로 조장되고 있는 것이라면, 그것을 극복하는 것도 사회적인 대안을 필요로 하겠지. 그런데 그게 이 책에서 드러나진 않는 것 같다. 플랫폼에 맞서서 개인들이 탈-플랫폼을 하면 된다는 건가? (잘 모르겠다 정말로.)
좋은 문제의식과 다양한 예시들, 그러나 한편으로 마지막으로 갈수록 그래서 우리에게 어떻게 나아가야 할지에 대해선 함구하는 부분이 아쉬운 책이었다. 역시나 그것은 이 책을 집어들 만큼 잃어버린 경험들의 소중함에 대해 공감하고 있을 독자들의 몫인가...라고 SNS에 포스팅한다.
TV야말로 이 '매개 기술'의 원조 격으로 엄청난 공격을 받았고 나는 그곳에서 무언가를 만드는 일을 업으로 삼고 있는데, 여전히 이 모순을 해결할 방법이 별로 없어 보인다. 정말로, 어쩔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