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파르 파니히, 그저 사고였을 뿐
* <그저 사고였을 뿐>의 스포일러가 담겨 있습니다.
자파르 파니히의 <그저 사고였을 뿐>을 봤다. 두 시간 가까운 길이에도 불구하고 짧다고 느꼈다. 차를 타고 이동하는 한 가족이 우연히 개를 치어 죽이게 되는 사건을 다루는 도입부, 고문 피해자인 바히드와 다른 피해자들이 자신을 고문한 정보부 요원 에크발의 처분을 두고 논쟁하며 이동하는 중간부, 그리고 바히드가 자기 신념에 따른 선택의 결과를 마주하게 되는 결말부 어느 한 부분도 느슨하지 않다. 도입부는 영화를 관통하는 하나의 문장을, 중간부는 영화의 재미를, 그리고 결말은 관객들에게 윤리적 질문을 던지는 역할을 담당한다. 질문의 무게가 깊지만, 재미도 놓치지 않는다.
변명과 냉소로 일관하는 폭력적인 체제 앞에서, 피해자들은 갈라지고 반목한다. 그리고 그중 가장 옳다고 생각했던 바대로 행동하는 피해자는 그 신념의 결과로 감당하기 어려운 결말을 맞아야만 한다. 영화는 용서와 복수 어느 한쪽으로 쉽사리 기울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영화는 그 두 가지 모두 불가능하다는 사실에 절망하는 피해자들의 삶을 부각하는 데 집중한다. 영화가 할 수 있는 말은 여기까지다. 그 나머지 말은 관객의 몫이다. 그러나 어떻게?
영화는 만삭의 아내와 어린 딸을 태우고 어두운 밤 길을 운전하는 한 남자로부터 시작한다. 가로등도 없는 어두운 길엔 들개 울음소리만이 울려 퍼진다. 마주 오는 차의 뒤꽁무니를 쫓는 개들이 빛에 스치고 나면, 차는 묵직한 충돌음을 내며 멈춘다. 카메라는 고개를 숙이지 않지만, 갑자기 길로 뛰어들어온 개와 부딪힌 게 분명하다. 남자는 안타까운 눈빛으로 죽은 개를 길 옆으로 들어 옮기고 다시 운전석에 앉는다. 그에겐 길이 어두웠기에 벌어진 불운한 사고였다. 모든 게 신의 뜻이다. 하지만 딸은 의아한 얼굴로 되묻는다. 개를 차로 친 건 아빤데, 왜 신을 찾아?
과거 반체제 운동가들에 대한 고문을 담당하던 정보부 요원 에크발은 체제의 훌륭한 하수인이다. 국가와 체제, 이데올로기에 위협을 가할 수 있는 운동가들을 닥치는 대로 잡아들이고, 잔인한 고문으로 수치심과 모욕감을 안겼다. 때로는 바히드처럼 정치와 무관한 인물도 단지 임금 체불에 항의했다는 이유로 잡아들여 고문을 가했다. 어쩌면 그에게 바히드는 갑작스럽게 달려든 개와 같은 처지일 뿐이다. 그가 고문을 당하고 신장이 파열돼 허리에 손을 줄곧 얹고 다니게 된 건 ‘단지 사고일 뿐’이다. 이후의 시퀀스에서 바히드가 자신이 납치한 이 남자가 에크발인지 아닌지 의심하는 것과 별개로, 감독은 이미 사고에 대처하는 그의 대사를 통해 바로 그가 에크발임을 강하게 암시한다. 단지 바히드가 이 말을 듣지 못했기에 영화가 계속될 뿐이다.
영화는 미스터리와 로드무비의 탈을 쓰고 진행되지만, 사실 그건 약간의 트릭에 불과한 듯하다. 그에게도 사랑하는 아내가 있고, 곧 태어날 아이가 있다. 자신을 애타게 찾는 순진무구한 딸도 있다. 그래서 뭐가 달라지는가? <존 오브 인터레스트>에 등장하는 나치 독일의 군인들 가운데 그런 인간미가 없는 사람들도 있던가? 1980년대 학생들을 잡아다 고문하던 경찰들도 고문 중간에 때때로 자상한 목소리로 자녀의 안부를 묻는 통화를 했다고 한다. 인간미는 그의 ‘무고함’과 별개의 문제다. 이 영화에서 그가 에크발인지 아닌지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 그는 영화의 말미가 되면 자신이 에크발이라고 자백한다. 그가 고문에 못 이겨 자백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게 자백한 것 치고 너무나 정확하고 자세한 정보를 털어놓는다. 그가 사실은 기절하지 않은 채로 일행의 모든 내용을 엿듣지 않고서야, 그의 자백은 무고한 사람이 알만한 수준을 넘어선다. 연출상의 모호함과 별개로, 영화 내에서 결론은 이미 내려졌다.
영화가 겨냥하고 있는 것은 그가 진짜로 그 사람이냐가 아니다. 그렇든 아니든 진짜 과녁은 이 감당하기 어려운 문제에 피해자들이 어떻게 대응하고 있느냐는 거다. 다양한 군상의 피해자들이 보여주는 반응들은 이 거대한 체제의 폭력을 겪은 자들 사이를 갈라놓는 균열이 무엇인지 드러낸다. 체제에 대한 복수는 끝내 이루어지지 못할 것이다. 체제가 가한 비인간적인 고문은 피해자들에게 딜레마를 만든다. 그들과 닮을 수도 없고 그들과 다른 방법으로 복수를 이룰 방법도 없다. 그 사이 지친 피해자들 사이에선 갈등과 반목이 터져 나오고, 누군가는 제풀에 지쳐 떠나가고, 누군가는 자신만의 방법으로 용서한다. 그러는 동안 단 한순간도 체제는 냉소를 거두지 않는다. (영화 속에서 반복되는 뇌물과 관례는 그러한 냉소의 또 다른 얼굴이다)
바히드는 에크발처럼 차로 위에 서 있는 개를 치지 못한다. 에크발을 향해 돌진하던 그의 밴은 마지막 순간에 방향을 튼다. 바히드는 수년간 자신을 괴롭히던 그의 의수가 내는 특유의 끄는 소리를 단박에 알아챘다. 비록 눈은 가려졌지만, 잔혹한 고문의 와중에 들려오던 기괴한 마찰음을 잊을 리 없다. 수년간 잊고 지냈던 그의 복수심이 곧바로 불타오를 정도로, 그는 이 사람이 에크발임을 직감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사막 한가운데 반쯤 묻었던 에크발을 다시 꺼내 밴에 태우고 다닌다. 바히드는 에크발처럼 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증거도 없이 무고한 사람을 고문하고, 괴롭혀서 끝내 지우지 못할 상처들을 남기는 악인이 되고 싶지는 않다. 복수 이전에, 그가 정말로 복수를 감당해야 하는 인물인지 확인해야만 한다.
그는 자신과 같은 고문 피해자들에게 이 사람의 정체를 확인받기 위해 애쓴다. 하지만 그들도 에크발의 얼굴은 본 적이 없다. 그가 소리를 기억했던 것처럼, 누군가는 냄새를 기억하고, 누군가는 손 끝의 감각을 기억한다. 이 불확실한 정보에 기대어 그에게 복수를 가할 것인지를 두고 피해자들 사이엔 균열이 만들어진다. 그의 자백을 필요로 하지 않으며, 내가 결과를 감당할 테니 복수를 감행하자는 하미드와 확실치도 않은 정보들로 무고한 사람을 죽게 만들면 우리도 그들과 다를 바 없다는 시바 사이의 골은 메워지기 어려워 보인다. 하지만 하미드도, 시바도 서로를 자신의 자리로 이끌기는 어려웠다. 때마침 울리는 에크발의 전화와 그로 인해 벌어지는 사건들은 끝내 피해자들을 뿔뿔이 흩어지게 만든다. 복수를 포기하고 떠나간 사람들을 뒤로하고, 바히드와 시바는 마지막 심문을 진행한다.
마지막 심문에서 그는 비교적 싱겁게 자신이 당신들이 찾는 에크발이라고 고백한다. 그리고 자신은 그저 하수인일 뿐, 너희들과 다르지 않은 평범한 인간임을 호소한다. 어린아이처럼 미안하다고 울부짖는 그의 모습에서 실질적인 복수는 끝났다고 생각했을까. 바히드와 시바는 이 폭력의 순환을 끊겠다는 자신들의 신념을 지킨다. 그를 풀어주고, 도시로 되돌아가도록 내버려 둔다. 그리고 영화는 그 신념에 따른 섬뜩한 결과를 외면하지 않는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고, 일상으로 완전히 복귀한 바히드의 등 뒤로 익숙한 의수의 마찰음이 들린다. 소리는 점점 커지고, 그는 그 자리에 얼어붙어 뒤를 돌아보지 못한다. 관객들의 피도 얼어붙었으리라. 환청일까, 아니면 진짜 에크발의 발소리일까. 그는 이곳에 처음 왔을까, 아니면 모두를 거쳐 마침내 도달한 것일까. 화면이 암전 된 뒤에도 들리는 발소리는 어느 쪽으로도 명료하지 않다.
체제의 하수인은 ‘그저 사고였을 뿐’이라고 비겁한 변명을 내뱉으면서도 동시에 위대한 용서에 대해서 냉소적이다. 바히드의 방법이 옳다고 믿는 건 그의 등 뒤에 다시금 다가오는 에크발의 발소리가 자아내는 복수의 공포와도 익숙해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고 하미드의 말대로 빈약한 근거에 기대 (지나고 보면 사실은 명료한 근거였을 것이나 우리는 그 누구도 미래에서 오늘을 돌아볼 수 없다) 누군가의 목숨을 빼앗아야 한다는 모험을 감수하는 일을 권장할 수도 없다. 우리는 그 순간 에크발과 같은 처지에 서게 될 뿐이다. 복수에 대한 이야기지만 진부해지지 않는 건, 용서할 줄 아는 용기를 강조하면서도 그 용기에 비릿한 웃음을 짓는 폭력적인 체제를 끝까지 응시하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이 영화를 보고 ‘복수’만큼 ‘용서’만을 강조하는 자만큼 에크발에 가까운 사람도 없으리라. 이 영화는 무자비한 체제의 폭력 앞에서 복수의 원환을 끊고 미래로 나아가는 일의 불가능함에 대한 이야기다. 손쉽게 복수도 용서도 가능하지 않은 지긋지긋한 현실에 대한 이야기다. 강고한 체제 앞에서 모였다 흩어지고 끝내 개인으로서 대응하는 데 그칠 수밖에 없는 피해자들의 절대적인 고통에 대한 이야기다. 여기엔 카타르시스도, 손쉬운 해결책도 없다. 이토록 곤란한 진짜 삶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