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토머스 앤더슨,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
폴 토머스 앤더슨(PTA)의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를 봤다. 다음 세대에게 반복되는 전투(one battle after aonther)의 짐을 물려준 세대의 ‘미안함’이 핵심이라 느꼈다. 과거 몸을 바쳐 투신했던 혁명은 빛이 바랬고, 그 여파로 혁명가들은 편집증을 앓거나 알코올 중독에 빠졌다. 아니면 영원한 혁명의 대의에 복무한다면서 가족과 동료를 위기로 몰아넣거나.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의 모순은 여전하기에 전투는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으며, 다음 세대는 정신을 차릴 새도 없이 그들의 전투를 맞이해야 한다. 이 영화는 그들에게 제대로 된 준비조차 마련해주지 못한 어른 세대의 멋쩍은 퇴장 소동극이다.
영화엔 윌라의 두 명의 명시적인 아버지가 등장한다. 첫째는 스티븐 J. 록조 대령이다. 그는 지독한 인종차별주의자인 동시에 변태성욕자다. 자신을 괴롭히는 권력에 굴종하는 데에서 성적인 쾌락을 맛본다. 그래서일까? 누군가를 괴롭히고, 깔보고, 모욕하는 데에서 희열을 느끼는 혁명가 퍼피디아 베벌리힐스와 궁합이 잘 맞는다. 서로 총을 겨누며 쫓고 쫓기는 사이지만, 누구보다도 서로의 성욕을 만족시킬 수 있는 존재임을 알고 있다. 상성 때문일까? 퍼피디아는 체포된 후 록조의 회유에 넘어가 동료를 밀고한다. (물론 끝내 퍼피디아는 록조의 소유가 될 수는 없었다. 록조만 몰랐을 뿐)
그가 퍼피디아의 딸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 건, 퍼피디아가 몸담은 과격 단체 프렌치75를 일망타진한 공으로 크리스마스 모험가 클럽에 가입할 수 있게 되면서다. 지독한 인종차별주의자들의 모임인 이곳은 사회적 영향력을 지닌 명망가들의 모임이기도 하다. 이 조직에 가입한다는 건 권력을 탐하는 록조에게 크나큰 영광일 것이다. 하지만 마음에 걸리는 게 있다. 클럽 가입을 위한 질문 하나 때문이다. 다른 인종과 성적 관계를 맺은 적이 있느냐는 질문에 록조는 그런 적 없다고 대답하지만, 우리는 안다. 이 사실을 들킨다면 그는 모든 성과를 잃어버릴지도 모른다. 만약 16년 전, 퍼피디아가 낳은 딸이 내 딸이라면? ‘그딴’ 게 내 인생을 가로막을 수는 없다. 질문을 마치고 방을 나서는 그의 얼굴에 살의가 스친다.
그는 모든 수를 동원해서 퍼피디아의 딸을 찾는다. 그 과정에서 온갖 명분으로 불법 이민자들이 모여있는 도시에 군대를 투입한다. (그것이 나중에 그의 발목을 잡고 만다) 프렌치75의 옛 동료들은 윌라를 어떻게든 빼내려고 애쓰지만, 결국 강력한 무력과 권력에 대한 욕망으로 눈이 멀어버린 록조의 그물망을 벗어날 수는 없었다. 팻을 제외한 거의 모든 조직원들을 체포하고, 끝내 수녀원까지도 완전히 장악한다. 휴대용 친자 검사기라는 기묘한 물건으로 윌라가 자신의 딸임을 확인한 후, 그는 그녀를 처리하려 한다. 자신의 인생에 짐이 되는 자식을 지워버리면서도 양심의 가책 따윈 없다. 있다면, 자기 손으로 죽이긴 좀 그래서 용병에게 떠넘겼다는 것 정도. (그리고 그것이 또 한 번 자신의 발목을 잡는다)
그는 자신의 비밀을 알게 된 크리스마스 모험가 클럽의 청부업자로부터 총격을 당하지만, 그 청부업자의 죽음 덕분에 다시 한번 클럽의 입회 자격을 얻게 된다(고 믿었다). 클럽의 회원은 묻는다. 흑인 여성과 관계했나? 그는 성관계를 부정하지는 않은 채 아이러니한 변명을 한다. 그건 내 힘을 탐한 그 여자가 나에게 약을 먹이고 역으로 강간한 거라고. 도대체 힘이 있었다는 건지 없었다는 건지 모르겠지만, 그는 그 질문을 끝으로 클럽 가입을 허락받는다. 그리고 55번 방을 배정받는다. 드디어 모든 것을 이루었다고 여기고 의자에 편안히 기댄 그 순간, 그는 그곳이 가스실인지조차 깨닫지 못하고 잠든다. 그리고 빌딩 속 모처에 있는 화장장에서 허망한 최후를 맞이한다. 반유대주의자들의 홀로코스트는 이토록 우스꽝스럽게 재현된다.
록조는 크로노스와 같이 운명을 거스르지 못한다. 장차 자식이 자신을 죽일 것이라는 ‘신탁’을 피하기 위해 자식을 죽이려고 갖은 애를 쓰지만, 바로 그렇게 애쓴 탓에 죽음을 맞이한다. 자식이 직접 죽이는 건 아니지만 말이다.
두 번째 아버지 팻 칼훈은 실패한 아버지다. 프렌치75의 조직원이었던 그는 폭탄 제조에 능했고, 한 때 퍼피디아의 연인이었다. 하지만 혁명이 가족보다 우선이었던 그녀가 딸인 윌라를 자신의 품에 남겨두고 홀연히 떠나버렸을 때, 그는 딸을 지키기 위해 삶을 바치는 쪽으로 인생의 경로를 틀었다. 사실 그전부터 틀고 싶었는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에게 혁명은 그렇게 진지한 대상처럼 보이지 않았다. 퍼피디아도 그렇지만 프렌치75가 혁명이랍시고 하는 일들이 정확히 무엇인지 알기 어렵다. 무엇인가 다 때려 부수는 것이 정말로 혁명인가? 오히려 뭘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른 채 스스로가 휘두르는 권력의 맛에 취해 있었던 이들이 너무 많았던 것 아닌가? 그렇게 취한 사람들만이 쉽게 권력에 굴복하는 법이다.
혁명은 단판의 싸움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건물을 부수고, 협박해서 단박에 전세를 뒤집으려는 시도들을 계속했다. 그 끝이 지리멸렬할 수밖에 없다. PTA가 극단적인 무장 투쟁을 이야기하는 이들, 한 번의 싸움으로 모든 것을 결정지으려는 과격분자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그들은 퍼피디아처럼 배신하거나, 지리멸렬해진 싸움의 끝에 지쳐버리거나, 아니면 언제든 자신을 잡으러 올 수 있다는 편집증에 시달리며 누구도 믿지 못하게 된다. 퍼피디아의 배신으로 동료들 대부분은 처단되거나 신분을 숨겨 도망갔다. 그 역시 이름을 바꾸고 박탄 크로스에 숨어든다. 반혁명의 파도가 자신을 비껴가길 기다리며 시간을 보내는 동안 그는 알코올에 의존한다.
록조가 자신의 과거를 깨끗하게 청소하기 위해 박탄 크로스에 들이닥치자 그는 도망가기 시작한다. 무도회장에 갔던 딸은 옛 동료들이 데리고 갔다고 하지만, 정작 어디로 갔는지는 알지 못한다. 한 때 달달 외웠던 혁명 이론과 암구호는 술과 약에 찌든 그의 머릿속에서 지워진 지 오래다. 몸은 얼마나 약해졌는지, 단속국의 추격을 피해 달아나다가 옥상에서 떨어져 버리는 바람에 싱겁게 체포당하고 만다. 나중에 딸을 록조로부터 구할 수 있는 결정적인 순간에도 제대로 총을 조준하지도 못해 엉뚱한 곳에 쏴버리고 위치만 들통나기도 한다. 그가 전적으로 의지하던 위치 추적기는 제대로 작동조차 하지도 않아 딸이 탄 차가 마주쳐 지나가는데도 알아채는 데 실패한다. 그가 딸과 만나게 되는 건, 딸이 모든 것을 해결한 후다. 그가 마음이 나쁜 사람은 아니지만, 솔직히 딸을 지켜주는 덴 한없이 무능한 사람이다.
윌라를 사실상 지탱하고 있는 건 세르히오 세인트 카를로스다. 그는 박탄 크로스의 가라데 관장이자, 불법 이민자들의 삶을 돌보는 보스다. 그의 자비는 박탄 크로스 전체에 걸쳐 있다. 그의 말 한마디에 수많은 사람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인다. 그는 윌라의 아버지 자리를 대체하려는 의도는 없었다. 단지 이곳에 모여든 수많은 이민자들에게 그러했듯, 그도 윌라를 도장 안에 품었을 뿐이다. 그러나 그 덕에 윌라는 아버지 노릇하지 못하는 인간들의 틈바구니 속에서도 어긋나지 않은 채 자라났다. 그뿐인가? 팻이 체포되던 순간에도 카를로스의 사람들이 탈출구를 만들어주어 그가 끝내 윌라를 뒤쫓을 수 있게 만들어준다.
그는 시종일관 팻에게 파도를 떠올리며 진정하라고 말한다. 그 너울 너머에 대체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지만, 그럼에도 차분하게 상황에 유연하게 대처하며 버텨나가기를 주문한다. 가라데를 배우던 윌라가 그 가르침을 실현하는 건 결정적으로 너울 치는 사막의 도로에서였다. 언덕 넘어의 모습이 이전과 같을 것이라 추측하는 이들에게 한 방 먹이고 전세를 일거에 역전시키는 건 결국 카를로스의 가르침 덕분이지 않나? 그는 수많은 이민자들을 단속반의 폭력으로부터 구해내고, 팻과 윌라가 다시 가족으로서 굳게 뭉칠 수 있도록 해주면서, 그 자신은 음주운전 단속에 걸린 후에 덩실덩실 춤을 추는 그런 기묘한 사람이다. 영화 속에서 출연 비중이 매우 작지만, 왜 베니치오 델 토로라는 배우가 필요했는지 알 것 같다. 그는 이 위태로운 혁명의 불씨를 계속해서 보호하고 넘겨주는 가교이며, 대부다. (하지만 시카리오에선 피도 눈물도 말라버린 남자였…)
엄마는? 수많은 혁명가 남편네들처럼, 퍼피디아는 딸을 버리고 혁명의 대의를 따르러 떠난다. (이 영화를 보고 퍼피디아에게 어떤 짜증을 느꼈다면, 아마 PTA가 생각하는 그 의도에 제대로 부합하는 것일 텐데) 그는 ‘성’만 뒤집은 기성 혁명가들의 모습 그대로다. 그에게 윌라는 혁명에 방해가 될 뿐인 거추장스러운 존재, 삶을 보수적으로 이끄는 끔찍한 성애의 부산물 정도였을지도 모르겠다. 그의 삶은 ‘안전장치’ 같은 게 없다. 그저 자신의 욕망에 따라 앞으로 나아갈 뿐이다. 폭약의 안전장치를 설명하는 팻의 말을 끊어버리고 바로 에로틱한 상황으로 나아가는 초반 시퀀스는 노골적이다.
하지만 그리고 끝에 가서야 그녀는 자신이 얼마나 이기적이었는지 깨닫는다. 자신이 엄마라는 사실을 애써 부정했지만 - 임신한 채로도 사격 연습을 하는 모습을 보라 - 한 세대가 전투에서 온전하게 퇴장한 후에야 자신의 처지를 정확히 이해한다. 물론 그래서 퍼피디아가 개과천선했냐 이런 건 알 수 없는 일이다. 혹은 애초에 관심 밖의 문제다. 그거야 알아서들 하시라는 거겠지.
싸움을 단판 승부로 끝내려 했던 세대가 저마다의 방식으로 퇴장한다. 누군가는 그토록 들어가고 싶어 했던 조직이 혐오하는 대상을 대하는 방식대로, 누군가는 자신이 사실상 떠맡아야 할 책임으로부터 회피했다는 반성을 통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다. PTA는 영화에서 노골적으로 록조와 팻, 퍼피디아 모두 자격 미달이라고 말한다. 히피도, 블랙팬서도, 인종차별자들도 다 틀려먹었다는 거지. 그리고 딸은 그런 엄마의 편지를 받아 든 후에 자신만의 싸움을 위한 전장으로 나아간다. 자기만의 방식으로, 자기들의 대의를 위해. 그 싸움은 이전과 같을까, 아니면 더 나을까? 여전히 비밀스러운 무선 통신은 계속되고 있지만 시위를 선동하는 게 아니라 시위에 참여하는 방식으로 전투를 이어가는 윌라가 운전대를 잡는 모습으로 끝나는 영화는 약간의 희망을 이야기하고 싶은지도 모른다. 어차피 모르는 것이라면, 낙관하는 쪽이 살아가는 편에 낫지. 안 그런가?
극 중 팻이 보고 있던 <알제리 전투>는 아주아주 노골적인 레퍼런스다. 프랑스의 식민지 정책에 대항하여 일어난 알제리 반군과 이를 억압하려는 프랑스 사이에서 상호 확증하는 폭력을 보여주는 이 영화는 끝내 FLN이 궤멸적 타격을 입지만 그로 인해 알제리 국민들의 집단적인 저항과 봉기가 더 크게 일어났고, 이로서 프랑스가 알제리로부터 철수하게 되는 결과로 나아갔다고 말한다. 단판의 싸움이나 테러가 원하는 바를 달성하게 만들어주지는 않는다는 건 이 영화 속 인물들의 말들에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폭력행위로는 전쟁에서 이길 수 없고, 혁명도 성공하지 못한다. 테러는 처음엔 효과가 있지만 결국 민중이 스스로 움직여야 하지.” “혁명을 일으킨다는 건 정말 힘든 일이네. 혁명을 유지하는 건 더 힘든 일이고. 가장 힘든 건 혁명에 성공하는 것일 테지. 그러나 진정한 어려움은 우리가 혁명에 성공한 뒤에야 비로소 시작될 것이야.” 같은.
추상적인 사회적인 이야기를 가족애라는 가장 직관적인 방식으로 그려내면서, 진부하거나 고리타분하지는 않았던 영화. 이 영화를 보고 나서 마음에 남는 대사가 ‘땡큐 센세, 땡큐! 비바 라 레볼루씨옹!’이라는 건 좋은 건가 나쁜 건가. 센세 덕에 또 다른 전투를 계속할 수 있게 되었어요. 물론 이번 레볼루씨옹은 전과는 다른 방식이어야겠죠. (유나바머급인 팻을 비교적 온정적으로 다루긴 하지만) 멍청한 주인공들이 아니라, 어디엔가 있었을 수많은 ‘카를로스’들의 공헌에 대한 찬사가 담겨 있다는 게 여러 모로 맘에 들었다. 최고의 영화냐, 그건 뭐 사람 생각하기 나름인 것 같고. 하지만 전혀 돈이 아깝다고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땡큐 PTA 땡큐 비바 라 시네마. (그런데 음악감독이 일은 참 잘하는데 말이죠 그…)
+ 말장난 개그들이 웃겼는데 자막 번역이 좀 아쉬웠다. 아니 왜 드립 번역을 많이 안 해주시냐고. 물론 스페인어 번역 안 하는 건 의도적인 거라서 좋았긴 한데.
+ Wagon Burner는 정말 모르면 왜 아반티 Q가 갑자기 빡돌아버리는질 이해를 못 한다고. 하지만 이걸 자막에 주석을 달아줄 수는 없는 노릇이긴 하다. 피아를 구분하는 암구호가 질 스콧 헤론의 The Revolution will not be televised의 가사라는 것도 그렇고. 이런 건 정말 문화적 장벽인 것 같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