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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현 Nov 05. 2020

도망친 여자는 과연 제 영역을 가질 수 있을 것인가

<도망친 여자>(2019), 홍상수.



<도망친 여자>에서 감희(김민희)는 총 세 명의 여자 친구들을 방문하거나, 우연히 마주친다. 앞선 두 사람 영순(서영화)과 수영(송선미)은 각각 자신만의 공간을 구축한 모습이다. 그러나 그들의 공간이 완전히 안전한 건 아니다. 영순과 영순의 파트너는 길고양이에게 먹이를 주는 일을 그만두어달라고 종용하는 이웃남자와 기 싸움을 벌여야 하고, 수영은 구애해오는 젊은 시인을 언성을 높여 내쫓아야 하는 처지다. 말하자면 두 사람은 스스로 만족하여 가꾸어나갈 수 있는 제 공간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외부세계(그리고 남성)로부터의 상습적인 습격을 염두에 둘 수밖에 없는 것이다.



복합문화공간에서 만나게 되는 친구 우진(김새벽)의 경우 만남은 예정된 것이 아니었다. 감희는 영화를 보러왔다고 말하지만, 이후의 대사들로 유추해보건대 옛 연인이었던 정 선생(권해효)의 행사 소식을 접하고 그와 마주칠 계기를 만들기 위해 그곳에 갔을 가능성 또한 배제할 수 없다. 자신의 연인을 가로챘던 우진과의 마주함, 과거를 사죄하고 근황을 공유하는 담화의 과정, 그리고 극장이라는 장소를 거치면서 감희는 자기 의지로 행로를 바꾸어 우진의 사무실에 다시 ‘방문’한다. 공간을 빠져나가다가 정 선생과 마주친 감희는 정말 영화를 보러 온 게 맞느냐고 집요하게 캐묻는 그에게 우진과 나누었던 대화를 톡 쏘듯 돌려준다. “이제 그만 말하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우진 또한 앞선 두 사람과 크게 다를 건 없다. ‘자기만의 방’을 가지고 있으며, 그 공간을 여유로이 관장하는 한편 지켜내려고 최선을 다해 방어하고 있다는 점에서 말이다. 우진이 모르고 있거나 모른 척 넘어가는 것은 감희가 자신의 공간을 위협하는 요소로 작동할 수도 있었다는 점이다. 결국 감희는 정 선생과의 조우 현장에서 스스로 ‘도망’침으로써 우진이 관할하는 공간의 안정성을 지켜준다. 그러나 정말은 감희가 망가뜨릴 수도 있었던 이 법적 결혼관계가 우진의 공간 자체에는 그렇게까지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우진은 독립된 공간을 제 일터로 가지고 있었고, 이는 그가 못마땅해하는 ‘바깥양반’ 정 선생마저도 침해할 수 없는 곳이었다. 영순 역시 일반적인 결혼 제도 바깥에서 동성의 파트너와 함께 자기 공간을 꾸려나간다. 비혼 여성인 수영도 결혼에 구애받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결국 이 영화에서 남편과 그로 인한 정주(定住)의 영향 아래 놓인 여자는 감희밖에 없는 것이다.



감희는 영화 내도록 남편이 출장 중이라고 설명하며 “우리는 (그동안) 떨어져 본 적이 없어. 그 사람은 사랑하면 그래야한다고 생각하나봐.”라고 덧붙인다. 홀로 돌아다니는 감희의 등 뒤로 떠오르는 <도망친 여자>라는 타이틀은 감희의 그 말이 세 번째 방문과 마찬가지로 거짓일 수 있다는 점을 암시하고 있다. 그 경우 감희의 유(由)함은 속박을 벗어나, 보다 단단하게 자신의 뿌리를 내린 이들의 거(居)함을 확인해보려는 의지가 된다. 감희의 손을 지그시 얽어오는 우진의 손은 뿌리처럼도 보이고, 진심을 담은 우진의 말 몇 마디는 감희로 하여금 옛 토양에 정주하려는 미련을 벗어나게끔 만든다. 그렇게 잔잔하고도 단단한 뿌리들과 자기 뿌리를 얽고 또 풀어헤치는 과정을 통해 감희는 표류의 상태를 유지하기보다는 체류의 상황을 반복할 수 있는 것이리라. 완벽한 공간은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면서, 하지만 제 영역을 가지고 가꾸어나갈 수 있다는 점도 확인하면서.



(<도망친 여자>가 여성의 독립과 여성간의 유대에 관한 영화로 독해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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