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장>(2019), 정승오.
정승오 감독의 <이장>은 일종의 로드무비다. <이장>이 러닝타임의 꽤 많은 부분을 자동차 여행에 할애한다는 점 때문만은 아니다. <이장>은 네 자매가 가부장체제의 영역에 직접 발을 들여 작별을 고하는 내용이기도 하다. 가부장체제가 닦아놓은 길은 물리적으로는 매끄럽더라도 정서적으로는 완만하지 못하기에, 영화 내도록 질책과 아우성이 가득 찬 사운드가 들려오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러나 <이장>에서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는 갈등과 그 해소가 아니다. 이 영화는 가부장체제 특유의 정주성(定住性)을 부각시키면서 네 자매로 대변되는 운동성을 대립항으로 제시하고 있다.
본격적으로 이야기에 들어가기에 앞서 <이장>을 이끌어가는 네 자매를 소개하는 편이 좋겠다. 첫째 딸 혜영은 한부모가정의 보호자이자 곧 ‘경단녀’(경력단절 여성)가 될 처지다. 혜영은 육아휴직과 맞바꿔야 하는 퇴사 조치를 별다른 항의 없이 묵묵히 받아들인다. 자존심 강한 혜영으로서는 ADHD 증상을 보이고 있는 외아들 동민과 그를 향한 은근한 동정의 시선을 감당하기만도 벅찰 터이다. 둘째딸 금옥은 전업주부지만 이상적인 전업주부상과는 다른 삶을 살아가고 있다. 돈 잘 버는 남편과 금옥의 사이는 바람 잘 날 없다. 설상가상으로 남편은 외도 중이고 금옥은 남편의 돈으로 흥신소 직원을 붙여 그 행적을 추적 중이다. 셋째 금이는 곧 결혼식을 올리게 될 예비신부다. 예비신랑과 머리를 맞대고 설계해본 생활비는 빡빡하고, 시댁에 손을 벌리기에는 눈치가 보이고... 잘 벌면서 몇 푼도 챙겨주지 않는 큰언니한테는 못내 서운한 감정을 느낀다. 넷째 혜연은 아직 대학생이다. 언제 졸업하느냐는 걱정을 들을 정도니 나이는 꽤 찼다. 혜연은 학내 성폭력 문제를 고발하기 위해 대자보를 붙이는 등 동분서주하고 있다. 아주 짧게 자른 머리와 맨얼굴 때문에 큰어머니에게는 남동생 승락으로 오해받기도 한다. 가족의 막내이자 유일한 아들인 다섯째 승락은 그 순서에서 알 수 있듯이 아들을 낳기 위해 자매의 부모님이 기를 써서 가진 아이다. 어렸을 땐 양껏 오냐오냐 자랐을 터인데, 다 큰 뒤로는 어찌 된 일인지 누나들과는 거처도 트지 않고 지낼 정도로 척을 져 버렸다. 승락은 회피하고 싶은 문제에서 벗어나기 위해 소라게처럼 제 껍질 안에 틀어박히고, 이는 제때 장남을 모셔가지 않으면 안 되는 누나들의 애간장을 태운다.
<이장>은 혜영이 부친인 고 백철택의 묘를 이장하라는 통보 문자를 확인하면서부터 시작된다. 부친의 묫자리에 산업단지가 조성되었고, 네 자매는 보상금을 수령한 뒤 시신을 화장하여 수목장하기로 합의를 보았다. 걸림돌이 있다면 자매의 큰아버지다. 큰아버지는 생전 매장을 원했던 고인의 유지를 따르기를 강권하고 있다. 영화의 서사는 물리적으로나 관념적으로나 정박해 있는 이 가부장제의 옹호자에 의해서 흘러간다. 전반부는 큰댁으로 향하는 자매의 힘겨운 이동과 큰아버지의 대성일갈에 못 이겨 승락을 찾아 헤매는 과정에 소요되며, 클라이막스는 큰댁의 밥상에서 그의 참관 하에, 그의 참견으로 인해 펼쳐진다는 점이 그렇다. 범박하게 이분하자면 가부장체제의 피해자였던 자매들은 물리적으로나 감정의 고저에 있어서나 끊임없이 이동하고 변화하는 반면에 승락과 큰아버지로 대표되는 영화 속 남성 캐릭터들은 제자리에서 물러나오기를 거부하고 있는 상황이다. 가부장체제의 최대 수혜자 중 한 사람이었던 승락의 경우, 네 명의 누나들과 숙명적으로 편한 동행일 수 없다.
그와 더불어 영화는 감정이 고조되었을 때 튀어나오는 몇 마디 대사나 호칭(“망나니.”)을 통해 자매들과 죽은 아버지 사이에도 감정의 골이 깊었다는 사실을 밝힌다. 반대로 어머니에 대한 마음은 애틋하다. 셋째 금이는 생전의 어머니가 사용했던 구식 폴더형 핸드폰을 충전해서 가지고 다니며 미발송된 마지막 문자메시지를 종종 들여다본다. 수신인은 승락을 제외한 네 딸들, 내용은 마당에 꽃이 피었으며 엄마는 항상 너희들이 자랑스럽다는 것이다. 문자메시지 속 흰 눈 덮인 빨간 동백꽃 사진은 자매가 그 부모로부터 유산으로 물려받을 수 있었던 유일한 유형(有形)의 애정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자매의 어머니 또한 가부장체제에 순응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승락을 수혜자로, 딸들을 그 피해자로 키우는 데 일조해왔음이 드러난다. 밥상에서의 클라이막스는 승락이 살면서 ‘자연스럽게’ 누린 특혜가 결코 자연적인 것이 아니었음이 고발되는 장면이기도 하다. 누나들이 직접 겪은 차별에 대해 한 마디씩 보탤 때마다 승락의 표정은 어두워진다. (영화는 승락이 글재주가 있으며 그 나름대로 예민한 감수성을 가지고 있으리라는 점을 그가 붙박인 자취방의 서재 씬을 통해 간접적으로 귀띔해주었었다.) 모르긴 몰라도 승락 또한 누나들과 자신이 불공정한 수직관계를 형성하고 있었음을 알았을 것이고, 그 구조 안에서 심적으로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했으리라. 남매들이 그러거나 말거나 장남한테 최종 결정권이 있다고 믿는 큰아버지는 승락을 통해 아버지를 화장하는 대신 매장할 것을 종용한다. 자매들의 반발은 거세다. 자매들의 어머니 장례 때는 화장을 택했다는 사실이 화제에 오르고, 그 이유가 바로 어머니가 죽어서라도 가부장체제의 억압에서 탈출하기 위함이었다는 혜연의 말이 발화(發火)되는 순간 오래된 체제의 노성(怒聲)도 함께 폭발한다.
그러나 그 뒤로 일어난 한바탕 소란 끝에 조카들이 자신 앞에서 뿔뿔이 흩어지는 장면을 보게 된 큰아버지는 집안의 어른 남자라고 해서 더 이상 과거와 같이 중앙집권적 위치를 점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바로 뒤에 이어지는 씬은 동민의 이탈이라는 명목 하의 가족 산책, 몇 개의 핸드폰 불빛에만 의지한 채 나아가는 한갓진 밤 산책이다. 작지만 분명한 빛의 인도를 받아 나아가던 이 동행은 천둥소리와 함께 중단된다. 기존의 체제로부터 이탈하여 새로운 길을 찾아나서는 과정이 결코 쉽지 않을 것을 진언하는 듯하다. 앞서 고조되었던 감정의 불길을 꺼뜨리는 것은 주룩주룩 내리는 비이다. 오남매가 나란히 큰댁의 평상에 앉아 수평을 이루고 있는 오밤중의 풀 쇼트 안에서 서로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대화가 오간다. 누나들 앞에서 굳게 닫혀 있던 승락의 말문도 함께 열린다. 여기서 <이장>의 여정이 가지는 한계가 드러난다. 단단한 땅에 매장되어 있던 가부장체제를 파헤쳐 신랄하게 비판하는 듯 보이면서도, 새롭게 재구성된 대안적인 영토를 제시하고 있지는 않다는 것. 오히려 기존의 땅에서 강력하게 작동하는 가족주의라는 자장(磁場)에 자리를 내어주고 있다는 것.
영화에서 자매들끼리, 혹은 남매들끼리 반목하다가 전환점을 맞는 장면은 크게 세 가지다. 첫째, 금옥의 남편의 외도 현장을 목도한 자매들의 의기투합. 둘째, 임신중단과 그에 따른 전 연인의 배상을 원하는 승락의 전 여자친구 윤화의 등장. 그리고 한 가지 더, (결정적이라기엔 잦게, 영화의 초반부터 후반까지 일관되게) 막상 연락이 닿고 얼굴을 마주했을 때 이들 가족들이 서로에게 가지고 있던 모난 마음이 무르게 이지러지고 만다는 점이다. 이 영화는 근본적으로 가족애에 크게 기대어 작동하고 있다. “나 얘 진짜 싫어.”, “내려!”, “난 네가 진짜 싫다.”고 토로하면서도 언니는 동생을 픽업하러 차를 돌리고, 급발진한 감정을 다시 후진시키고, 대신 계좌에 돈을 입금해주겠노라 약속한다. 해소되지 않은 갈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큰아버지는 조카들이 묵는 방이 찰까봐 한밤중에 일어나 남몰래 장작을 더 넣는 모습을 보여준다. 영화 후반부에서 그는 조카들에 대한 반기를 아내의 몇 마디로 누그러뜨리는데, 그 내용(“그냥 쟤네들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냅둬요. 따지고 보면 우리 새끼들도 아니지 않소.”)은 직계가족이 아니라는 점을 이유로 체념을 권고한다는 점에서 앞으로 나아가는 형태의 운동이 아닌 뒤로 물러나는 형태의 후진적 이동, 즉 혈연중심의 가족주의나 마찬가지다. 금옥과 윤화를 활용하여 당면한 갈등을 잠재우는 해결책 또한 온당하다고 볼 수만은 없다. 한 여성의 불행에 대해 다른 여성이 취하는 일시적이고 감정적인 반응들에 기대어 갈등을 봉합하고 있다는 점이 문제다. 같은 맥락에서 네 자매가 딸로서 가부장체제의 피해자였던 어머니에게 연민을 가지고 있다는 언급은 종종 나오지만, 여성 대 여성으로서 어머니와 연대했던 기억이나 삶의 가치관을 공유할 수 있었다는 단서는 어디에도 나오지 않는다. 자매 혹은 남매들끼리 모여서 발휘할 수 있는 집합적인 에너지라는 게 과연 존재하기는 하는 걸까? 이들 가족은 이장을 계기로 이동하여 짧게 뭉쳤다가 다시 이동하며 흩어져갈 운명이다. 이 점은 <이장>이 기본적으로 ‘로드무비’라는 점에 근거하여 나타나는 특징이기도 하다.
혜영의 아들인 동민은 후세대이자 앞서 언급한 남성 캐릭터들과 다르게 운동성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캐릭터다. 상기했다시피 동민은 ADHD 환자다. ADHD의 주된 증상은 산만함이며, 산만함은 곧 끊임없는 이동성이라고도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동민은 수업 중에도 이동하고 여행 중 들린 휴게소에서는 숨바꼭질에 골몰하며 차 안에서 한시도 가만히 있지 않고 떠들거나 장난을 친다. 상기했듯이 큰댁은 가부장제의 영역인 동시에 가족주의의 자장이 미치는 곳이다. 가부장 그 자체인 큰아버지는 동민이 머문 짧은 기간 동안 아이에게 인간적인 면모를 보여준다. 영화 전체를 봤을 때 동민이 남자아이가 아니었다면 그가 최소한의 친밀감이라도 표현했을지 의심스럽기는 하지만 말이다. 동민은 큰댁에서 술래잡기를 하는 양 도망 나온 뒤 마을을 돌아다니다가 한 폐가로 들어간다. 그곳 마당의 한구석에서 동민이 발견하게 되는 붉은 동백꽃은 지금은 아무도 살지 않는 이 집이 동민의 외가이자 네 자매의 본가였을 수도 있다는 점을 알려준다. 뒤늦게 큰아버지에게 발견당해 끌려 나오는 과정에서 동민은 몸부림을 치지만 반항은 길지 않다. 영화 초반에는 거칠고 산만했던 동민이 후반부에 들어서서는 얌전해지는 양상을 보인다. 동민이 변화하기 시작하는 시점은 마당에서 동백꽃을 발견하면서부터다. 이 영화에서 동백꽃은 가족애의 상징이고, 가족애는 가부장체제가 입력한 가족주의의 이데올로기적 코드이기도 하다. 가부장체제-가족주의 영역의 분위기는 현실세계의 학교나 이모들처럼 동민을 자극시키기보다는 도리어 안정시키는 듯하다. 요컨대 <이장>의 큰댁은 자매들의 공간인 이동 중인 자동차 안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곳이면서 남매간 반목의 원인인 가부장체제의 뿌리가 가족주의의 토양 깊이 안착해 있는 장소이자, 불안정한 어린 아이에게는 안정감을 줄 수 있는 전통적 가족애의 환경을 조성하고 있기도 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장>은 가부장제와 가족주의의 기묘한 합장을 보여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공존에는 타협이 불가피하나, 이 두 항의 경우는 오랜 세월 공조관계에 놓여 있었으므로 충돌할 이유도 없을 것이다.
여기까지만 보면 <이장>은 가부장체제를 비판하는 시늉을 하면서 더 넓고 온건한 가족주의 이데올로기로 논의 자체를 감싸버리고 있다는 지적을 피하기 어렵다. <이장>이 그와 같은 비판을 비껴갈 수 있는 이유는 이름조차 주어지지 않은 불가해한 ‘중년 남자’ 캐릭터와 윤화 덕택이다. 중년 남자는 총 세 군데의 장소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네 자매와 동민이 들린 휴게소, 오남매와 윤화가 앉아있던 선착장 휴게실, 마지막으로 큰아버지가 나와 있던 화장터 흡연구역이다. 휴게소에서는 뛰어다니는 동민을 저지하고 휴게실에서는 바닥청소를 하며 흡연구역에서는 담배를 피고 있는 이 남자의 정체를 정확하게 추측하기는 힘들다. 다만 그가 자매들과 남매들의 여정을 따라 이동하고 있으며, 그들보다 앞서 경유지에 도착해 있다는 점은 그의 운동성이 영화 속 모든 등장인물들의 그것보다 월등함을 암시한다. 이 경우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한데, 첫째는 남자가 가부장체제의 육적 화신으로서 디제시스 영역의 문턱에 걸터앉아있는 인물이라는 것이다. 이때 영화는 그 어떤 수로도 가부장체제의 속도와 변수를 따라잡을 수 없다는 체념의 서사로 읽히게 된다. 둘째는 남자를 가부장체제에서 특권을 부여하는 전형인 중년 남성의 육체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변두리를 자처하는 탈-서사적 인물로 독해하는 것이다. 이 경우 남자는 인간의 물리적 이동보다 더욱 빠르게 옮겨가는 관념적 변화를 의미하게 된다. 한편 영화 중반부터 등장하는 윤화는 큰댁까지 가는 남매의 여정에 동참하기는 하지만 표면적으로는 생각이나 감정의 변화를 보여주고 있지는 않은 인물이다. 임신 상태를 중단하겠다는 윤화의 마음은 굳건하다. 전통적인 멜로드라마라면 윤화가 이 여정을 통해서 가족의 일원이 되기로 결심하는 전개를 보여주었을 것이다. ‘장남’의 아이를 가졌다는 점은 윤화를 가부장체제 내에서 누구보다도 환영받을 위치로 만들어준다. 그러나 윤화 자신은 끝내 그 자리를 거부함으로써 체제 내로 편입되지 않겠다는 의사를 밝히고 있다. 이는 곧 가부장체제가 갈망하는 미래 존속의 가능성을 단절시키는 행위에 다름 아니다. 표면적으로 보았을 때는 네 자매에 비해 정주성을 담지하고 있는 윤화가 정말은 자신을 정박시키려는 체제로부터 탈주하려 든다는 점, 그 결심을 몇 번이고 입 밖에 내어 말하고 있다는 점, 다른 이들이 그런 윤화를 가족애나 가족주의로 흔들어놓는 대신 염려하고 존중해준다는 점은 <이장>의 주목할 만한 미덕이다. 다시 말해 <이장>은 현 체제의 변두리와 그 너머를 상상해 볼 수 있는 일말의 가능성을 (가부장체제의 중심부를 가장 잘 보여줄 수 있는 한편 가족애-가족주의의 한계를 짊어질 수밖에 없는) 백씨 가족의 바깥에 위치한 두 인물의 운동성을 통해 제공하고 있다.
막바지에 노부부가 오남매와 동민에게 작별을 고하고 배에 올라타는 장면은 가부장체제라는 선박이 수용할 수 있는 세대와 인원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점을 시사한다. 그러나 체제는 늙은 만큼 거대하고 오래된 만큼 정교한 힘을 발휘하므로 결코 쉽게 끝을 보이지 않을 것이다. 체제의 진앙으로부터 멀어진다고 하더라도 그 힘은 일상적인 관계의 구석구석에 스며 있다. 카메라는 육지로 돌아가는 오남매와 윤화, 동민의 얼굴을 한명씩 차례차례 비춘다. 이 지긋한 응시의 시선은 가부장체제의 영향 아래 놓인 후세대들이 탑승한 승합차가 지속가능한 동력을 가지고 긴 터널을 관통할 수 있을지에 대한 여운을 남긴다. 그렇더라도 영화는 그들이 탄 차가 곧게 뻗은 길로 쭉 달리게끔 내버려 두며 끝이 난다. 공존의 전체집합이 무사히 제자리에 도달하기를 바라는 소망이 반영된 엔딩이 아닐까.
연결되지 않을 통화음이 울린다. 달이 뜨기에는 한참 이른 오후 시간대, 아이는 하늘을 쳐다보고 있다. 이지러진 낮달과 함께 타이틀이 떠오른다. 앞으로 펼쳐질 이야기가 우리가 기대하고 소망하는 한밤의 충만한 보름달처럼 완전하지는 않을 거라는 예고인 양. 그렇다고 하더라도 신호는 계속된다. 통화음은 이어지지 않은 섬과 섬 사이를 끊임없이 두드린다. 소통이라는 완전한 연대의 기실 불가능한 가능성을 이야기하기보다는, 교통이라는 물리적인 이동과 그로 인한 충돌 내지는 마주침의 순간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이장>은 가장 정직한 방식으로 체제와 세대의 현주소에 희망을 표하는 영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