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 시리즈 <마이코네 행복한 밥상>이 반(反)여성 서사 작품인 이유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늙었나?"
처음으로 이 말을 했던 때가 언제였던가. 2015년 부산국제영화제, 영화의 전당에서 아직 개봉 전이었던 <바닷마을 다이어리>(2015)를 본 직후였다.
<바닷마을 다이어리>는 고레에다가 천착해 온 주제인 대안 가족의 연장선에 있는 영화이긴 했다. 외모와 연기력 모두를 인정받는 여배우들을 고루 데려다가 하하호호 소꿉놀이를 찍어놨다는 점만 빼면. 불편했다는 말이 아니다. 반대로 <바닷마을 다이어리>는 그 누가 보더라도 불편하지 않을, 무해하고 온건하고 보기 좋은 예쁜 영화, 소위 '착한 영화'였다. 바로 그 점 때문에 나는 고레에다의 노화에 의심을 품었다. 저것이 고레에다란 말인가? 정상가족신화를 자근자근 즈려 밟아 균열을 내고, 깨진 조각들이 나름의 제자리를 찾아가거나 영원히 파편으로 남고 마는 꼴을 첨예한 시선으로, 때로는 어루만지듯이 가만가만 조망하던 사람의 영화가 맞나? 감히 추측컨대, 내가 본 <바닷마을 다이어리>는 예쁜 배우들로 예쁜 영화를 만들고 싶은 욕망의 산물이었다. 그 욕망 자체는 비난할 만한 것은 못 된다. 다만 고레에다는 거장으로 인식되는 영화 연출자고 내가 거장의 시선, 거장의 매 작품에 번뜩이는 인식이 깃들기를 기대했다는 게 문제다.
그 뒤 고레에다는 <태풍이 지나가고>(2016)를 찍었고 <어느 가족>(2018)으로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거머쥐었다. 가족이라는 주제에서 벗어나 사회적인 작품을 만들어보고 싶다던 염원은 후쿠야마 마사하루와 야쿠쇼 코지의 열연이 돋보이는 <세 번째 살인>(2017)으로, 국제적인 프로젝트는 카트린 드뇌브를 주연으로 한 <파비안느의 진실>(2019)로 이루었다. <태풍이 지나가고>는 마음대로 되지 않는 부모자식관계와 인간사의 애환을 성찰하는 데 있어 극도의 원숙함을 보여주고 있으며, 고레에다의 대안가족 세계관의 집대성인 <어느 가족>은 문자 그대로 세계가 인정하는 성취를 이루어냈다. 그렇게 고레에다는 명실상부한 거장으로 거듭났다. <어느 가족>의 자가복제 아류작이라고 할 수 있는 근작 <브로커>(2022)는 다소 실망스러운 영화다. 배우들의 국적과 이야기의 배경이 한국이어야 할 그 어떤 이유도 찾아볼 수 없으며, (영화에서 한국적인 것을 찾아볼 수 없다는 뜻인데, 반드시 한국적인 것을 드러내 보여주어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다만 어째서 한국을 배경으로 했으며 한국인 배우들을 데려다가 찍는 수고를 감내했는지 알 도리가 없다는 거다.) 모성 신화를 돌파하는 대신 오히려 그 신화화에 기여하는 형태로 영화를 성급하게, 억지스럽게 마무리짓고 있으니까.
서론이 길었다. <바닷마을 다이어리>에서 느낀 실망감은 역으로 고레에다의 작품 활동을 끈기 있게 지켜보길 포기하지 않게 만든 동력이 되어주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명철한 시선을 유지하고 그에 합당한 표현 방식을 사용, 심화시키는 감독이라는 확신이 필요했으므로. 그런데 고레에다가 넷플릭스와 손을 잡고 내놓은 신작 시리즈 <마이코네 행복한 밥상(영제 : The Makanai)>(2023) 속 '마이코네'와 '행복한 밥상'을 본 뒤에는 다소 무례하고 문제적인 아래 문장을 의문문이 아닌 감탄문으로 뱉게 되더라.
"고레에다씨, 당신 나이가 드셨군요!"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10대 소녀들이 배꽃처럼 화사하게 까르르 웃고, 꿈을 이루기 위해 기예 단련에 매진하고, 지친 몸을 이끌고 합숙소로 돌아가면 상냥한 미소와 함께 내밀어지는 먹음직스러운 야식에 "우와-아-"하는 감탄사와 함께 기뻐하는 모습, 어느 정도 속 얘기를 꺼내놓기도 하는... 그렇고 그런 예쁘고 살가운 풍경을 보여주려던 게 맞다. 고레에다의 마음 속에는 이미 그런 보기 좋은 소녀들의 보기 좋은 그림에 대한 욕망이 자리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바닷마을 다이어리>와 <마이코네 행복한 밥상>이 썩 다른 그림을 보여주고 있는 건 아니니까 말이다.
하지만 <바닷마을 다이어리>에는 적어도 정상가족신화 내지는 원가족중심주의에 대한 저항의 낌새가 있었다. 사치, 요시노, 치카는 가정을 파탄낸 아버지가 후처와의 사이에서 낳은 여동생 스즈를 사랑으로 보살핀다. 정상가족을 부수고 떠났던 부계의 또다른 핏줄을 기꺼이 자매로 받아들임으로써 그들 나름의 새로운 가족을 형성한 것이다. 또한 세 자매는 죽은 아버지를 향해 원망을 성토하기보다는 아버지와의 추억을 즐거이 회상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일상을 갉아먹는 미움의 에너지도, 원망을 대물림한 사람도 등장하지 않는다. 자매의 모친이 '어머니'라는 기대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 역할을 대신했던 큰딸에게 원망을 듣기는 하지만, 그런 그녀조차 바람난 전남편 소생의 어린 여자아이를 대할 때는 지극히 조심스럽고 어른스럽다. 어른들의 이기적인 결정으로 고생깨나 했을 어린 여자아이들이 성인 여성이 된 후, 다시 어른들 사이에서 오갈 데 없는 처지가 된 어린 여자아이를 가족으로 보듬는다, 이 점 하나만 놓고 보더라도 <바닷마을 다이어리>는 아름다운 여성 서사로 받아들여질 수 있었다. 비록 지나치게 목가적이고 예쁜 화면만을 내보내고 있더라도 말이다.
<마이코네 행복한 밥상>은 다르다. 마찬가지로 여성들로 구성된 유사가족의 화목함을 내세우는 듯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전통적인 정상가족신화를 배격하기는커녕 정상가족신화가 은폐하고 있는 대상들에 동화되어 있는 극임을 확인할 수 있다. 여기서 표면적으로 '어머니' 역할을 맡은 사람은 '마카나이상'(요리사 씨)인 주인공 키요다.
키요는 마이코가 되겠다는 꿈을 안고, 정확하게는 마이코가 되겠다는 꿈을 품은 단짝친구 스미레의 손을 잡고 교토의 오키야 사쿠에 입소한다. 마이코가 되기 위해서는 무용을 익히는 게 필수적인데 키요에게는 지지리도 소질이 없다. 결국 사쿠에서 쫓겨날 처지가 된 키요는 사쿠의 전담 요리사가 허리를 다친 사건을 계기로 할머니와 함께 살면서 익힌 요리 실력을 발휘한다. 키요는 마이코 대신 마카나이(요리사)가 되어 사쿠에 머물며 스미레와 사쿠 소속의 마이코 일동, 오키야의 경영자인 두 어머니들의 삼시 세 끼를 책임지게 된다.
키요가 요리사가 된 이후 사쿠 구성원들의 일상은 대략 세 갈래로 나뉜다. 사쿠 식구들을 먹이기 위해 하루종일 장을 보고 밥을 짓는 키요의 일상, 기예를 단련하는 스미레와 역시 기예를 단련한 뒤 연회에 나가는 사쿠 소속 마이코들, 경우에 따라 상대해야 할 사람들을 상대하는 어머니들의 일상. 집의 안팎에서 이루어지는 두 갈래의 일상이 하나로 모이게 되는 부엌-밥상의 일상이다. 마이코들이 수련생 겸 직장인이라면 키요는 전업 주부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키요가 내놓는 따끈한 밥상이나 야식 한 접시는 마이코들의 생활을 지탱하고 피로를 달래주지만, 키요 본인은 마이코들이 경험하는 세계를 직접 보고 겪지 못한다. 일례로, 사쿠의 선배이자 뛰어난 게이코인 모모코가 좀비를 주제로 한 연극을 기획하고 연습시킬 때에도 키요는 야식을 가져다주고 퇴장할 뿐 연습에 참여하거나 무대를 직접 관람할 기회를 가지지 못한다. 시리즈를 통틀어 키요와 마이코들이 겸상하는 장면이 나오지 않는다는 점은 분명 이상하다. 말이 좋아 어머니지 식모 내지는 집요정에 더 가깝지 않나. 이처럼 요리사와 마이코들 사이에는 일상에서의 엄격한 역할 분배가 이루어지고 있는데 고레에다는 이 간극을 없는 것인 양, 정확하게는 밥상에서 하나 되는 양 말끔하게 지워버린다. 또래의 여자아이들끼리 사이가 좋으니 그만이라는 걸까? 글쎄다, 중년 여성에 경력자인 사치코가 아니라 동년배인 키요가 요리사인데, 위화감이 배가 되는 것은 당연하지 않을까?
이에 더해 시청자를 불편하게 만드는 건 키요가 갓 중학교를 졸업한 미성년자로서 역시 미성년자인 대다수의 마이코들보다 더 어리다는 점이다. 저렇게 어린 아이에게 마르크스가 <자본론>에서 설파했던 전업 주부의 역할을 짊어지운다고? 설상가상으로 키요가 오키야의 경영자인 어머니들에게 노동의 대가로 임금을 받거나 목욕 이외의 여가 활동을 하는 장면은 일절 나오지 않는다.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스트라면 여성들로만 구성된 사쿠의 화기애애한 풍경을 슥 돌아본 뒤 한 마디할 것이다. "키요는 착취당하고 있다!"라고.
허나 키요는 사쿠의 부엌에 애착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거나, 자신은 요리사가 되기 위해 이 곳에 온 것 같다고 베시시 웃거나 하는 식으로 시청자가 심란해할 여지를 차단한다. 주어진 노동을 기껍게 감내하면서 매일을 어떤 메뉴로 채울까 고민하는 아이, 누군가를 먹인다는 행위에서 기쁨을 느끼는 아이. 너무 깊게 생각하지도, 멀리 내다보지도 않는, 경청하고 수긍하고 환하게 웃어주는 그 말갛고 순한 얼굴을 보고 속이 편해지지 않을 이가 어디 있을까? 고레에다는 일본의 전통적이고 이상적이며 희생적인 어머니상을, 오즈 영화 속 젊은 하라 세츠코처럼 부자연스러울 만치 환하게 웃는 아름다운 얼굴을 16세의 중졸 여자아이에게 덧씌워버렸다.
이 시리즈가 키요와 키요의 작업인 요리를 조금이라도 존중했다면 재료 손질 과정이나 레시피를 보다 상세하게 보여주었을 것이다. 일본의 창작자들은 카테고리를 불문하고 요리라는 장르의 미학에 일가견이 있다. 이는 일상을 소중히, 계절의 흐름을 감사하게 받아들이고자 하는 특유의 국민성에서 비롯되었다는 게 정설이다. 잦은 자연재해로 인해 내재된 불안과 공포를 가장 손쉽게 잠재울 수 있는 방법이 매 끼니에 집중하는 일, 자연이 제공하는 재료의 식감과 조화를 음미하며 기쁘게 밥을 먹는 행위였을 것이다. 하여 <카모메 식당>(2007)과 <리틀 포레스트 : 사계절>(2015)처럼 널리 알려진 몇 편의 영화 외에도 많은 일본 영화와 드라마가 '밥을 짓는다'와 '밥을 먹는다'는 행위에 집중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마이코네 행복한 밥상>은 요리를 장르로 한다고 보기에는 부족하다. 재료와 레시피를 일일이 소개하지 않을 뿐더러 키요가 요리하는 대부분의 장면이 빠른 편집으로 지나가기 때문이다.
아쉬운 선택이지만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다. 이 시리즈에서 꽤 비중 있는 조연으로 출연한 하시모토 아이 주연의 <리틀 포레스트 : 사계절>을 떠올려보면 알 수 있다. 메뉴를 정하고 레시피를 읊는 나레이션이 삽입되었더라면 키요라는 인물의 자의식에 지금보다 훨씬 더 무게가 실렸을 것이다. <리틀 포레스트 : 사계절>이 관객에게 전해지길 바랐던 요리하는 인물의 자의식, 번뇌, 회의감을 비롯한 자잘한 건더기들을 <마이코네 행복한 밥상>은 최선을 다해서 배제하길 원한다. 말했듯이 키요는 화면 안팎의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주기 위해 만들어진 캐릭터고 키요가 아무 불만 없이 환한 얼굴로 언제든지 기쁘게 밥을 내올 수 있어야만 '마이코네'가 성립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키요는 웃고 장 보고 요리하고 야식을 내오도록 설계된 말갛고 어여쁜 로봇 같다. 자의식도 사유의 혼란도, 감정적인 동기도 위기도 없는 존재.
또 다른 주인공인 스미레-모모하나도 자의식을 삭제당하기로는 매한가지다. 스미레는 의사 아버지를 따라 의사를 목표로 했던 유복한 집안의 외동딸로, 교토 수학여행에서 게이코 모모코와 기념 사진을 찍게 된 것을 계기로 돌연 진로를 변경하고 사쿠로 오게 되었다. 타고난 재주에 범상치 않은 노력을 더해 일반적인 경우보다 훨씬 빠르게 수습 생활을 마치고 마이코로 데뷔한다. 그 자신은 고향 친구이자 고교 야구 리그에 출전하는 켄타를 마음에 품고 있다. 차분하고 반듯한 성품으로, 키요와는 막역한 친구 사이이다.
키요가 상냥한 가사 로봇이라면 스미레는 육성 시뮬레이션 고전 게임인 '프린세스메이커 III - 꿈꾸는 요정'에서 유저가 양육하도록 되어 있는 '딸'을 떠올리게 만든다. "나는 인간이 되어서 인간들의 프린세스가 될 거야!"라는 대사를 읊으며 등장해서, 유저가 설정한 스케줄을 따라 할당된 시간만큼 착실하게 스탯을 쌓고 ('불량' 상태로 돌변하지 않는 한은) 주어진 일정을 거역하지 않는 어여쁜 게임 캐릭터.
스미레가 기온에서 제일 뛰어난 게이코인 모모코를 마주친 것을 계기로 마이코-게이코라는 목표를 품게 되었다는 설정은 놀랍지 않다. 하지만 스미레가 마이코-게이코라는 직업이나 그 생활상에 대해서 기예 이상의 고찰을 했다는 단서는 주어지지 않는다. 스미레에게는 '마이코=기예'인 것 같다. 오로지 기예만을 바라보고 일상의 대부분을 기예에 할애한 스미레는 무용 선생과 모모코가 놀라워할 정도의 성취를 달성해낸다. 스미레는 참 열심이고, 키요와는 다른 의미에서 보는 이의 마음을 뭉클하게 만든다. 상냥하고 모범적인데다가 예쁘게 생긴 아이가 자기 꿈에 걸맞은 소질을 갖추었다고 하니, 사쿠 일동을 비롯한 모두가 스미레의 목표를 응원하게 된다. 시청자 역시 연출자가 의도한 바를 물 흐르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된다. 스미레가 마이코가 됐으면 좋겠다고, 스미레는 반드시 마이코가 되어야 한다고 말이다.
여기서 잠깐, 마이코가 정확히 무엇이며 어떤 활동을 하는지 짚고 넘어가겠다.
마이코는 게이코(게이샤)가 되기 전 단계에 게이코를 보조하여 연회에 참석하는 견습생으로, 평균 나이 15~18세의 여성들로 구성된다. 게이코와 마이코는 일본의 옛 수도인 교토의 예풍에 걸맞는 말씨, 행동거지, 무용 실력을 갖추어야 한다. 한 가지 더, 연회의 주최자와 그의 손님들을 접대하는 화술과 인맥 관리 능력이 게이코 생활의 성패를 가르므로 게이코 견습생들은 마이코일 때부터 그를 단련하는 데 매진한다. 인기 많은 게이코가 되어 후원자를 두면 독립적인 주거생활을 할 수 있지만 마이코 시절까지는 오키야라 불리는 합숙소에서 단체 생활을 해야 한다. 이때 발생하는 모든 비용, 연회에 참석할 때 입는 기모노, 머리 장식 등은 오키야의 것이므로 각 오키야의 경영자인 '어머니'가 해당 마이코의 이름 앞으로 비용을 달아둔다. 전직 게이코인 이 '어머니'는 마이코들의 숙식과 게이코가 되기까지의 모든 과정을 책임진다. 마이코는 아직 어엿한 게이코가 되기 이전의 견습생이라는 논리 하에 연회에 참석하더라도 임금은 받지 않는다. 연회는 보통 저녁에 시작되어 새벽까지 지속되기도 한다.
게이코는 숙련된 전통예술인으로, 매춘을 업으로 삼는 유녀와는 엄연히 다른 개념의 직업이다. 하지만 게이코에게 허락된 활동 무대는 연회가 전부다. 가부키 배우들과는 달리 일반 대중을 상대로 무대 공연을 올릴 수 없다. 몇 년 동안 땀과 눈물로 단련한 게이코의 춤을 볼 수 있는 건 연회를 열고 게이코를 부를 수 있을 만큼 막대한 부를 소유한 이들뿐이다. 마이코-게이코는 철저히 유한계급이 독점하는 꽃인 셈이다. 한편으로 이들이 참석하는 연회의 또 다른 이름은 술자리다. 마이코는 미성년자임에도 불구하고 술자리를 흥겹게 하기 위한 접대 기술을 익힌다는 명목 하에 술시중을 종용받는다. 그렇다면 스미레는, 고향 친구 켄타를 마음에 품고 있지만 마이코가 되겠다는 결심 하에 선배들도 혀를 내두를 만큼 혹독하게 춤을 연습하는 스미레는 오직 연회의 손님들, 재력을 갖춘 미래의 잠재적 후원자들에게만 자신이 갈고 닦은 춤을 선보일 수 있는 셈이다. 스미레가 기온 최고의 게이코가 된다고 해도 그 점은 달라지지 않는다. <마이코네 행복한 밥상>에서 스미레는 기예를 보존하고 지속시키는 데 막중한 사명감을 가진 똑소리나는 아이처럼 그려지지만, 스미레의 실질적인 미래에는 기예만큼이나 술시중과 비위 맞추기가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시리즈의 마지막 에피소드에서 스미레는 짝지 언니 모모코에게서 글자를 따 와 모모하나(재주 많은 꽃)라는 예명을 받고 모두에게 그 이름으로 불리게 된다. 자연인 스미레와 마이코 모모하나가 분리된 게 아니라 스미레의 일상이 마이코인 모모하나로서의 삶에 보다 완벽히 종속되었다고 보는 게 맞다. 그것은 보여지는 삶, 예능인의 삶, 그 자체로 일본의 전통적 미의 현신으로 동경받는 삶인 동시에 감춰지는 삶, 무임금 야간 노동을 하는 삶, 미성년자지만 술자리에서 성인을 응대하는 삶, 훨씬 나이가 많은 남성들을 '오라버니'라고 부르며 그들의 눈과 마음에 드는 길을 도모하는 삶이기도 하다. 재주 많은 꽃은 밤의 연회, 고객들의 돈 위에서만 피어날 수 있지만 스미레는 물론 극중의 누구도 그 사실을 입에 담지 않는다. 단언컨대 스미레가 인식하는 마이코는 오직 기예만으로 제시되는 마이코가 맞다. 기예=마이코가 이 입력된 값대로만 행동하는 예쁘장한 캐릭터가 유일하게 인식할 수 있는 마이코다. <마이코네 행복한 밥상>은 마이코 양성 제도에 내재된 양면성 중 오직 빛만을 스미레의 대사로, 모든 빛을 그러모아 만들어진 양 싱그러운 청소년의 입을 빌어 반복해서 강조한다. "저는 마이코가 되어서, 기온 최고의 게이코가 되고 싶어요!"
의사이자 차기 병원장인 스미레의 아버지는 나이로 보나 사회적 지위로 보나 마이코-게이코의 실체를 알 만한 인물이다. 그는 돌연 마이코가 되겠다고 선언한 뒤 고등학교에 진학하지 않고 집을 나간 딸을 설득하러 아오모리에서 교토까지 발걸음한다. 당연하다. 그의 입장에서는 날벼락일 터이니. <마이코네 행복한 밥상>이 마이코 양성 제도에 대한 세간의 비판 의식을 반영하는 건 바로 이 스미레의 부친, 그리고 사쿠의 여주인 중 두 번째 서열을 차지하고 있는 아즈사의 친딸 료코의 입을 통해서다.
"애당초 10대 여자애한테 술시중을 시키는 것부터가 문제죠. (마이코는 술시중을 들지 않는다는 아즈사 어머니의 반박에) 술시중을 들지 않더라도 취한 손님이 손을 잡거나 (둔부를 두드리며) 여기를 만지거나 하잖아요!" (<마이코네 행복한 밥상> 4화 중)
"아즈사란 여자는 상냥해보여도 너희를 노예로밖에 생각 안 해. 요즘 시대에 숙소랍시고 이런 닭장에 몰아넣고. 화장실 청소에, 빨래에 밤낮으로 혹사하고. 잔심부름에 불려 다니고, 핸드폰도 못 쓰게 하잖아. 마이코 말투를 전부 익히기 전에 도망치는 게 좋을 거야." (<마이코네 행복한 밥상> 1화 중)
스미레 부친의 거센 반발은 놀라우리만큼 쉽게 사그라든다. 그는 스미레의 단호함 앞에서 당황하고, 마이코들의 무용 수업을 참관한 뒤 침묵하고, 사쿠의 바에서 술에 취한 상태로 키요가 만든 가지조림 한 조각을 베어 문 뒤 (<라따뚜이>(2007)는 그 한 입에 그렇게도 무너져 내릴 만한 당위성을 부여하기 위해 15초의 플래시백을 삽입했는데.) 눈물을 흘리며 백기를 든다. 스미레의 부친이 빌런이 되어버리면 시청자를 치유해주어야 할 스미레와 키요의 일상이 흔들리기 때문에 한 선택이겠지만, 솔직히 분통이 터진다. 저 정도의 권위, 명예, 딸에 대한 애착과 염려를 가지고 기온의 화류계에 대한 비판 의식까지 있는 인물이 저 정도에 맥을 못 추고 헤롱거리며 물러나다니. 막강해보였던 이 허깨비로부터의 위협은 키요의 만능 가지조림으로 쉽게 물리쳐진다.
그에 비하면 내부에 속한 외부인, 아즈사의 친딸이지만 마이코 지망생이 아니라 일반 고교생으로 사쿠에서 함께 사는 료코의 일침은 훨씬 지속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아즈사, 적당히 해. 휴대폰도 편의점도 금지라니, 그러다 고소당해. ("누구한테?") ...WHO한테." (<마이코네 행복한 밥상> 3화 중)
비록 친모를 이름으로 부를 정도로 당찬 기질에 내용이 가려지는 감이 있긴 하지만 말이다.
료코는 고레에다가 연출한 <마이코네 행복한 밥상>의 오리지널 캐릭터로 원작 만화에는 등장하지 않는다고 한다. 사실 료코는 이 극에서 가장 연기하기 어려운 배역에 속한다. 대사와 마음이 항상 일치하지만은 않기 때문이다. 료코의 경계인적인 위치와 툭툭 내뱉는 대사에서 묻어나는 쓸쓸함은, 마이코네들의 해맑음보다는 특유의 의뭉스러움을 하나의 페르소나로 확립한 릴리 프랭키의 '렌'과 더 잘 어우러진다. 그래서일까, 료코는 릴리 프랭키가 분한 사쿠의 바텐더 렌과 연령을 초월하여 속내를 털어놓는 사이로 나온다. 료코가 키요와 스미레 사이의 신뢰와 사랑, 그 둘이 각자의 위치 혹은 미래에 가진 강력한 애착 같은 절대적인 무엇을 불편해하는 동시에 부러워한다는 사실이 드러나는 것도 렌에게 속내를 내비칠 때뿐이다.
료코는 아즈사가 자신을 잉태하는 바람에 게이코를 그만두어야 했다고 생각하며 그에 죄책감을 느끼고 있다. 그러나 극 초반의 료코가 가진 의식이나 발언의 수위를 생각했을 때는 차라리 자신이 먹고 입고 쓰는 모든 비용이 동년배의 어린 여성들을 착취함으로써 생겨났다는 데 대한 죄책감을 드러내는 편이 더 타당해 보인다. 물론 <마이코네 행복한 밥상>에서 료코가 맡은 역할은 여성인권운동가가 아니라 아즈사의 딸이다. 시리즈 후반의 료코는 생부에게 버림받은 상처를 완전히 떨쳐내지 못했으며 모친인 아즈사에게는 반항적이지만, 내심으로는 아즈사에게 미안해하고 있는, 가족주의 정서에 걸맞은 딸의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이로 인해 앞서 등장한 료코의 모든 일침은 사회적인 무게를 갖기보다는 사춘기의 치기로 휘발되는 감이 있다. 료코한테서는 전반부의 냉소보다는 (료코가 애초에 가질 수 없었던 정상가족→정상시민 신화와 연결된) 결핍과 외로움의 정서가 더 짙게 남게 되는데, 아즈사와 타나베의 러브라인은 이런 료코를 감싸안는 대신 오히려 더 먼 경계로 떠밀고 있다. 어머니의 수월한 재혼 생활을 위해서 해외로 떠나겠다는 료코를 만류하기는커녕 어느 나라가 유학지로 좋을지를 적극 추천하고 있는 타나베의 신난 행태는 그저 탄식을 불러일으킬 뿐이다. 고레에다는 료코를 통해 도대체 무엇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일까?
스미레의 아버지와 료코를 통해 지적당한 마이코 양성 제도의 문제점은 두 사람의 게이코 출신 '어머니'인 치요와 아즈사에 의해 능구렁이 넘어가듯 화면 속 전개에서 빠져나간다. 아무리 변명해봤자 결국에는 물장사 업계가 아니냐는 스미레 부친의 힐난에는 "우리는 마이코들을 가부키 배우들처럼 전통 예능인으로 키우려고 노력합니다", "마이코들은 술 시중을 들지 않아요" "그래서 기온에 처음 출입하는 손님과 마이코들은 접촉할 수 없어요. 안전이 보장된 사람만이 가능합니다"와 같은 원론적인 말들로 대응하고, {언론과 인권운동가들의 질타를 받을 때마다 기온의 하나마치 측에서 대응하는 내용과 똑같은데, 작년 6월 트위터를 통한 전직 마이코의 폭로전을 생각하면(https://www.news1.kr/articles/?4724364)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를 일이다. 이에 대한 반박 기사(https://www.ddanzi.com/ddanziNews/763891623) 또한 존재한다.} 보다 노골적인 료코의 비판은 "WHO는 지금 바빠서 마이코들을 걱정할 시간이 없단다", "아동 인권은 WHO가 아니라... 어디더라?" "유니세프에서 담당하지."와 같은 만담으로 받아 넘기는 식이다.
치요와 아즈사는 제도의 일부이자 제도의 수혜자다. 마이코들에게는 하늘 같은 업계 선배이고 기온의 하나마치에서는 뼈가 굵은 경영자로 대우받겠지만, 한편으로는 포주로 치환되지 않을 수 없는 위치에 서 있다. 10대 여성들을 훈육, 훈련시켜 마이코-게이코가 되게 한 뒤, 그 과정에서 발생한 비용을 연회를 돌게 함으로써 탕감해주니까. 게이코였던 젊은 시절에는 필연적으로 업계의 피해자였겠지만 나이가 든 지금은 게이코 공급처를 운영 중인 해당 제도의 관리 감독관들이다. 마이코 양성 제도를 비판하기 위해서는 이 두 사람을 비판하는 절차가 필수적인데, '어머니들'이 자아 비판의 멍석 위로 내던져지면 <마이코네 행복한 밥상>이 보여주고 싶은 평화로운 일상은 깨지고 장르는 사회 고발 다큐멘터리가 되어버린다. 그 때문일까, <마이코네 행복한 밥상>은 사쿠의 경영자/교육자인 치요와 아즈사, 무용 선생에게 제도의 윤리적 쟁점이나 변화하는 시대에 대한 고충을 짊어지우는 대신 열성 한류 팬 겸 첫사랑의 순정을 간직한 게이샤, 천진난만한 바보(天然ボケ)면서 연애 시장에서 여전히 수요가 있는 싱글맘, 자기만의 식사 취향이 확고한 디저트광의 이미지를 덧씌우는 방식을 택했다. 말하자면 '무해하고 카와이한' 여성들로 그리고 있다는 거다. 이건 또 이 나름대로 모욕적이긴 하다. 그 좁은 업계에서 몇십 년을 살아남아 경영자/교육자의 위치에 오른 여성들 아닌가. 이쯤 되면 연출자마저도 교토식 회피 화법을 적극적으로 구사한다고 볼 수밖에 없다. 아니면 기온의 화류계와 동화되어 그들이 보여지고 싶은 모습 그대로를 보여주고 있거나.
가모장을 중심으로 구축된 여성 공동체는 언뜻 이상적인 여성 연대로 인식되기 쉽다. 그러나 가부장적 자본주의의 근본 작동원리가 변하지 않는다면, 진정한 의미의 여성장(場)은 성립하기 어렵다.1 오키야와 같은 여성 공동체는 생활 기반인 숙식을 생산 수단으로 삼아 이윤을 추구하는 어머니들과 노동력을 제공하는 마이코들 측이 극명하게 나뉘므로, 자본의 원리에 의거하여 위계와 배제를 내포하고 있을 수밖에 없다. 소중한 노동력인 마이코들의 단잠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다락방에서 혼자 자고 혼자 일어나는 키요, 누구보다 빨리 일어나 밥을 지어야 하지만 누구보다 늦게까지 부엌에서 노동하는 키요를 생각해보라! 달이 기울도록 연회에 앉아 웃고 있더라도 돈 한 푼 받을 수 없지만, 그 자리에 참석하기 위해 언젠가는 갚아야 할 돈을 주고 올린 머리에 불편한 목침을 받친 채 잠을 설치는 마이코들은 또 어떠한가. 이들의 노동력을 무임금으로 착취하고 생활비는 훗날 받아낼 비용으로 매겨 둔다는 점을 상기하면 치요와 아즈사에게 '어머니'라는 호칭이 강요되는 역설이 뼈 아프게 와 닿는다. 호칭으로 은폐되는 불편한 진실, 이것이 바로 <마이코네 행복한 밥상>의 배경이 되는 여성 공동체의 민낯이다.
해명되지 않은 지점들이 목구멍에 걸릴 때마다 <마이코네 행복한 밥상>은 부지런히 따뜻하고 예쁜 장면들을 퍼 먹인다. 키요의 환한 미소(아오모리에서라면 할머니와 함께 살면서, 학교 다니면서도 요리할 수 있을 텐데), 꿈꾸는 요정 스미레가 최선을 다하는 모습(스미레라는 인간이 꿈꿀 수 있는 다양한 소망과 활동은 버그인 양 일절 제시되지 않고 있다.), 키요와 스미레의 관계성(차라리 이 둘이 사랑하는 사이라 양가 보호자의 반대를 피해 아오모리를 떠났고 훗날을 도모하며 법적 약자로서는 최선의 선택인 마이코 되기를 택했다...는 속사정이면 이해가 되겠다.), 마이코들이 투닥투닥하면서도 사이좋게 지내는 일상(후에 츠루코마가 탈출하기는 하지만 "더 이상 못 버티겠어!!"라고 사자후를 내지르는 대신 진정 내가 원하는 나의 자리란 무엇일까를 고민하며 온건하게 빠져나가고, 어여쁘게 배웅받는다), 그들을 흐뭇하게 바라보는 치요와 아즈사의 미소(황금알을 낳을/낳는 중인 아기 거위들일 테니 이해는 간다만) 등등. 목 넘김이 좋도록 곱게 갈아냈기에, 대부분의 시청자들은 <마이코네 행복한 밥상>을 소화하면서 그 어떤 불편함도 느끼지 못할 것이다.
사쿠 소속의 선배이자 현직 게이코인 모모코와 요시노는 맑고 밝고 환한 일상만을 보여주는 10대 마이코들과는 조금 다른 양상을 보여준다. 스미레의 짝지 언니이기도 한 모모코는 기온 최고의 게이코로 명성을 떨치고 있으며, 일찍이 결혼하여 화류계를 떠난 요시노는 혼인관계를 청산하기로 결심한 뒤 마이코 생활을 보냈던 사쿠로 돌아와 능청스럽게 활동을 재개한다. 료코의 말로는 모모코를 포함한 동기들에 비해 실력이 뒤쳐져 몰래 우는 일이 잦았다고 하지만, 현재의 요시노에게선 조금도 주눅든 기색을 찾아볼 수 없다.
이 두 명의 게이코는 현 제도가 가진 시대착오성에 솔직하게 불만을 표현하고 있다. 다만 이들의 불만은 결혼/탈혼(脫婚)으로 인한 게이코 활동의 지속가능성 여부에 한정되어 있다. 모모코는 당신의 전부를 좋아한다며 청혼하는 젊은 건축가에게 "내 춤을 보지도 않았으면서 어떻게 내 전부를 안다고 할 수 있어?"라고 따져 묻는다. 그만큼 모모코에게 있어서 게이코라는 정체성, 전통춤을 계승한 예인으로서의 자부심은 강한 것이다. 기온의 하나마치에는 결혼한 게이코는 은퇴해야 한다는 암묵적인 법칙이 작용한다. 때문에 기예를 사랑하는 나는 아직 결혼을 할 수 없다, 언젠가는 결혼하더라도 게이코를 그만두지 않을 수 있도록 제도를 바꿔나가고 싶다, 그렇게 말하는 모모코의 기백은 과연 꺾이지 않는 깃대처럼 꼿꼿하고 아름답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스미레-모모하나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모모코 또한 게이코를 오직 전통예술인으로만 받아들이고 있고, 시청자에게도 그렇게 받아들여지도록 발화하고 있다는 점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모모코의 남자친구가 어째서 단 한 번도 춤을 보러 연회에 올 수 없었겠는가? 모모코를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아서? 아니, 선배 건축가인 타나베에게 말했듯 그는 대단한 부잣집에서 태어난 게 아닌 보통의 젊은이라 연회를 열어 모모코를 부를 만큼의 돈도, 연회의 손님으로 초대받을 인맥도 가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모모코는 자신의 전부나 마찬가지인 춤을 보지도 못했으면서 나를 다 아는 것처럼 말하지 말라며 그에게 화를 내지만, 남자친구라는 가까운 관계의 사람마저 쉬이 제 춤을 보지 못하도록 만드는 제도의 접근성에 대해서는 불만을 토로하지 않는다. 모모코의 독특한 취향, 장난기, 반골 기질 같은 눈에 띄는 특징은 캐릭터가 가진 매력을 강화시킬 뿐 제도의 문제점을 돌파하는 수단으로 사용되고 있지는 않다.
요시노는 연회에서 주인공이 아니라 감초 역할을 맡는 게이코다. 하지만 요시노는 그 사실에 낙담하기는커녕 특유의 입담을 뽐내 술자리를 장악할 수 있는 독보적인 존재다. 통념과는 달리 탈혼 뒤에도 게이코 활동에 복귀했다는 점, 교토 시나 미디어가 노출시키는 일반적인 게이코의 모습(신비주의, 고아하고 전통적인 아름다움)을 탈피해 있다는 점, 누구나 각자의 장점과 존재감을 가질 수 있다는 걸 보여준다는 점에서 요시노는 분명 반가운 캐릭터가 맞다. <어느 가족>에서 기이한 가족의 일원 중 하나였던 마츠오카 마유가 <바닷마을 다이어리>의 나가사와 마사미가 가졌던 이름을 이어받아 그와 비슷한 계열의 웃음을 선사한다. 허나 위에서 지적했듯 요시노는 결혼/탈혼과 게이코 활동의 상관관계에 있어서만 제도의 문제점을 시사할 뿐 그밖의 마이코/게이코 제도에 대해서는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요시노는 다시 혼인관계로 복귀할 수 있는 선택권이 주어졌을 때조차도 사쿠가 진정한 내 집이라면서 탈혼을 번복하지 않고 게이코 활동을 이어나갈 것을 피력한다.
요시노의 복귀 문제나 뜻밖의 남편 등장은 '무해하고 카와이한 어머니'들에 의해 만담처럼 술술 넘어가지, 마이코네들의 일상에 먹구름을 드리울 정도로 진지하게 다뤄지지는 않는다. 의도했건 의도하지 않았건 요시노는 하나마치의 인간적인 면모를 최전선에서 선전하고 있다. 탈혼 뒤에라도 경력을 이어갈 수 있다고? 물장사 출신이니 뭐니 사사건건 꼬투리 잡는 시댁과 '남의 편'이 되어버린 남편이 저자세로 나오는데도 돌아가지 않을 만큼 괜찮은 대우를 받으면서 일한다고? 업계 최고가 될 기량을 갖추지 못했더라도 입담과 재치만 있다면 상관없다고? 한 번 떠났던 사람을 저렇게 쉽게, 따뜻하게 받아줄 만큼 열려 있는 업계라고? 누가 봐도 매력적이고 온정적으로까지 보이는 조건이 아닌가. 마치 가족 같다. 요시노에게 사쿠는 일종의 친정인 셈이다. 탈혼이라는 게이코 경력상의 큰 오점을 가지고도 당당하게 사쿠로 귀환한 이, 수선스럽고 짓궂고 뻔뻔한 요시노야말로 오키야라는 공동체를 진정한 가족처럼 보이게 만드는 데 일조한다.
처음 <마이코네 행복한 밥상>을 보았을 때는 이 20대 여성 둘의 일상과 발언이 키요와 스미레만큼의 비중을 차지하고 있지 않다는 게 아쉬웠다. 모모코와 요시노는 친구는 아니지만 한집에서 함께 먹고 자는 생활을 보냈으며 깊고도 좁은 한 업계에 몸담고 있다는 점에서 전우 관계를 맺고 있다. 경력이 쌓인 만큼 업계를 두고 비판 비슷한 것도 할 수 있는 위치고. 맑고 밝고 예쁘게만 존재하라는 지령이라도 받은 양 한정된 이미지만 보여주는 마이코네들과 달리 모모코와 요시노라면 독립된 개인, 동시대 여성, 과거엔 마이코였고 지금은 게이코인 입장에서 느끼고 겪은 바를 각자의 개성과 특질을 살려 전달할 수 있지 않았을까 싶었던 거다. 허나 비평을 쓰는 과정에서 모모코와 요시노는 제도 일탈의 가능성을 보여주기는커녕, 극을 매력적으로 만드는 데 일조하면서 보다 복잡한 방식으로(왜냐하면 행복한 집요정 키요와 꿈꾸는 요정 스미레는 아무리 뜯어보아도 절대로 복잡한 캐릭터라고 말할 수 없으므로) 제도에 적극 복무하는 역할을 담당한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두 사람은 게이코를 그만둘 생각도 없고, 기온의 하나마치를 적극적으로 바꿔나가고 싶어하지도 않는다. 게이코 활동의 중단을 의미하는 결혼과 관련된 제도를 제외한다면. 모모코와 요시노는 연회에서 발생할 수 있는 각종 사건 사고나 후원자, 즉 돈을 대는 스폰서를 두어야 편안하고 독립적인 게이코 생활이 가능한 점에 대해서는 일절 발언하지 않고 있다. 게이코를 (마이코의 연장선상에서) 예능인으로만 보고 있는 모모코는 정말로 스미레의 '언니'인 게 맞고 업계 최고를 꿰찰 재능은 가지지 못했지만 씩씩하게 자기 존재의 가치를 증명해내는 요시노는 키요의 다른 버전인지도 모른다.
여성들에게 주연을 맡기고 여성 배우들을 우르르 데려다 찍는다고 해서 무조건 여성서사 영화가 되는 것은 아니다.
이에 앞서 여성서사가 정확히 무엇인지 다시 정의해보겠다. 넓은 범위에서 여성서사는 서사를 추동하는 주요인물을 여성으로 설정함으로써 여성을 인간성의 다면적인 부분 중 한 방식을 보여주는 주체로 내세운다. 좁은 범위에서의 여성서사는 여성들에게 여성다움이라는 이름으로 주입되어왔던 문화적 정체성들을 가시화시키고 서사를 통해 투쟁의 과정을 겪도록 독려한다.2 여성 관객, 여성 시청자, 여성 독자들은 여성서사를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구성하고 있는 요소들을 재발견하고 재구축함으로써 작게는 일상의, 크게는 제도의 변화를 도모할 수 있다.
2017년, 수많은 배우들에게 성 상납을 강요한 할리우드의 권위 있는 남성 제작자 하비 와인스타인을 고발하는 걸로 시작된 미투 운동은 서구권을 중심으로 들불처럼 번져나갔다. 이전에 비해 훨씬 더 다양한 질감과 목소리를 가진 여성서사 작품들이 제작되기 시작한 것도 미투 이후의 일이다. 그에 남성 창작자들도 동참했다. 작년 하반기 가장 큰 화제작이었던 <에브리띵 에브리타임 올 앳 원스>(2022)의 연출자들 또한 남성들이다. <에브리띵 에브리타임 올 앳 원스>는 이민자, 여성, 퀴어라는 중첩된 타자성을 지닌 모녀의 관계를 (같은 주제로 연출된 기존의 영화들이 시도했던 자연주의적이고 정적인 방식이 아닌) 시각적으로 현란하고 편집점이 매우 짧은 마블식 멀티버스 히어로물의 방법론으로 구현했다. 남성이라고 해서 여성서사를 창작할 감수성이 부족한 것은 아니며, 때로는 혁신으로 받아들여지는 여성서사 작품을 만들어낼 수도 있음을 보여준 것이다. 그 사실 자체가 그렇게 놀라운 일은 아니지만 말이다. 왜냐하면 여성도 남성도 똑같은 인간이기 때문에. 여성이 체험하는 삶과 여성일 때 제공되는 삶을 재현하는 데 주의를 기울인다면 남성 창작자라고 해서 여성서사 작품을 만들지 못할 이유는 없다.
그러한 맥락에서 본다면 <마이코네 행복한 밥상>은 여성서사 작품으로는 실패작, 오히려 반-여성서사 작품이라고 보는 게 더 마땅할 작업이다. 납작하고 어여쁜 종이인형들이 너울너울 춤추는 인형극.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나이가 들었나보다, 감이 떨어진 모양이다, 굉장히 무례하게 들리는 말이지만 차라리 그렇게 말하는 게 그의 동시대적 감수성과 작가로서의 비판의식을 지켜주는 길일지도 모른다.
앞서 주요 인물 분석을 거치며 몇 차례나 강조해왔던 바지만 <마이코네 행복한 밥상>은 교토의 마이코-게이코 산업에 종사하는 이들의 시점과 동화된 걸 넘어 그들이 보여지기를 바라는 바를 적극 홍보하는 것처럼 보인다. 연출자가 의도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더라도 그렇게 보이는 걸 어쩔 수 없다. 마이코 양성 제도가 미성년 여성들을 무임금으로 야간 근무하게 만든다는 점, 마이코들의 학력이 중졸에 그치고 외부 활동이 제한됨으로써 사회적 경험과 진로 탐색의 가능성이 차단되는 점, 돈과 권력을 가진 일부 손님을 대상으로만 공연할 수 있으며 그들과 친목을 도모하고 적극적으로 자기 홍보를 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점, 그렇게 개인 '후원' 관계를 맺도록 독려되는 점 등등을 일절 짚어내지 않은 채 화목한 일상만을 보여주는 게 홍보가 아니면 무엇인가?
키요와 스미레의 자아는 제거당했고, 둘 사이의 우정은 서사적 깊이와 진동을 동반하지 않은 채 예쁜 그림을 보여주는 데만 이용된다. 사실 이 두 사람의 관계는 일반적인 우정에 비해 너무도 절대적이고 헌신적인데다 합숙의 특성상 일상성과 긴밀하게 연결되는 바람에 (둘 다 미성년이고 성애적인 감정 묘사나 신체 접촉이 전무하다는 점을 참작한다고 하더라도) 이상적인 부부 사이의 신의에 가까워 보이기까지 한다. 그럼에도 키요와 스미레가 같은 성별을 가지고 있다는 점은 <마이코네 행복한 밥상>이 보여주는 관계와 가족의 다양성을 넓혀주지는 못한다. 철저하게 경제노동/가사노동이라는 역할 분담 하에 유지된다는 점에서 이 둘의 동반관계는 노동자인 남편과 전업주부 아내라는, 전통적인 자본주의 가부장제를 연상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하여 키요와 스미레가 획득할 수도 있었던 보스턴 결혼적인 무성애 기반의 동성 동반관계는, 이성애 결혼 장려라는 정상가족신화의 기반으로 미끄러져 독해되고 만다.
<마이코네 행복한 밥상>이 좋은 여성서사 작품이 될 수 없는 또다른 이유는 시리즈가 이, 최상위계급 일부만을 위해 존재하는 여성 공동체 안에서 발생할 수 있는 다양한 갈등과 충돌의 묘사를 회피하고 있다는 점이다. 공용 냉장고에서 자기 몫의 푸딩이 사라졌다 정도가 사쿠에서 발생하는 상호 갈등의 전부다. <마이코네 행복한 밥상>은 기온의 마이코-게이코들이 직업상 경쟁관계를 기반으로 한다는 사실을 아예 외면하고 싶은 모양이다. 궁중 암투물 같은 걸 보여줘야 했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여성들끼리 연대할 수 있다면 여성들끼리 충돌할 수도 있다는 거다. 여성들이 모인다고 해서 무조건 화목하기만 할까? 다수의 여성들로 이루어진 공동체라면 (무릇 공동체가 그러하듯) 다양성의 충돌, 가치관의 충돌, 이해관계의 충돌, 협잡, 시비, 물밑의 싸움, 공개적인 싸움, 비판, 비난, 배반, 화해, 절교, 협력 또한 이루어지게 마련이다. 연차에 따라 위계가 존재할 테고 각자의 일정은 조금씩 다른 마당에 생활 공간을 공유하니 서로 불만이 생기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막강한 '어머니'를 중심으로 한 합숙소에서 '언니' 동생 사이로 맺어지더라도 그럴 수 있다. 화목한 가족놀이를 하려고 만난 게 아니라 하나의 직업을 목표로 하는 단계에서 제도에 의해 묶여 만나게 된 거니까. '어머니'는 매몰찰 수도 있고 의외로 모성의 현신일 수도 있고 적당한 방관자일 수도 있고 다정한 착취자일 수도 있다. '언니'는 동생에게 크게 관심이 없을 수도 있고 내 담당이니 잘 가르쳐야겠다고 직업 정신이 투철할 수도 있고 은퇴를 고민하는 마당에 붙은 혹이라고 내심 못마땅해할 수도 있고 고향에 있는 친동생을 투영하여 극진하게 아껴줄 수도 있고 진이 빠지도록 부려먹을 수도 있다. 여성들끼리 만들어낼 수 있는 다양한 관계성, 위기와 점화와 진화를 거치며 드러날 무수한 얼굴들을 조명하지 않은 채 투닥투닥, 아하하, 꺄르르, 딱 나이 든 남성들이 여고생에 대해 가지고 있을 법한 판타지만을 보여주는데, 이걸 어떻게 잘 만든 여성서사로 볼 수 있겠는가.
가장 큰 문제점은 <마이코네 행복한 밥상>의 주 배경이자 소재인 기온 하나마치의 마이코-게이코 산업이 여성착취를 기반으로 한 유흥산업이라는 점이다. 게이코들이 지켜온 '전통'의 시대에 누가 기득권층을 차지했겠는가? 유한계급 남성들이다. 세월이 흘러 신분제가 폐지되었다고는 하나, 게이코를 부르는 전통을 유지하며 게이코를 부를 수 있는 재력을 과시하는 사람은 여전히 지역 유지인 남성들일 것이다. 현대로 접어들면서 법에 강력히 저촉되는 몇 가지 내용이 수정되었다고는 하나(중졸 이후부터 마이코에 지원할 수 있게 된 것도 그중 하나이며, 미성년인 마이코의 노동을 임금노동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도 그와 관계가 있다고 한다.) 마이코-게이코 산업은 오늘날의 인권 감수성에 위배되는 여러 지점들을 일본의 전통이라 주장하며 끌어안아 지키고 있다.
만약 이 시리즈가 마이코-게이코 제도가 가진 다각도의 면모⏤제도에 던져지는 비판과 제도가 내포한 모순, 그를 중심으로 형성된 가업 중심의 상권, 전통의 일부는 수정되더라도 전통 자체는 지켜져야 한다는 주장, 본인들이 전통을 지키고 있다고 믿으며 여전히 전통에 기대어 살아가는 사람들의 일상⏤를 조명했다면 어땠을까. 어쩌면 마이코-게이코 제도를 전통의 일부분으로 지켜나가야 한다는 감상이 우세했을지도 모르겠다. 허나 <마이코네 행복한 밥상>은 담론을 형성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작품이다. 보다 정확하게는 담론을 형성할 의도가 아예 없는 작업이라고 봐야 마땅할 것이다. <마이코네 행복한 밥상>에는 인간이라는 복잡한 존재와 그런 인간들끼리 모여 만들어가는 일상을 이해해보려는 시선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시리즈는 사실성을 배제한 판타지고, 모든 등장인물은 사쿠의 평화로운 일상을 보여주기 위해 존재하는 매력적인 캐릭터로만 다루어지므로. 연출자의 역량 부족이라고는 볼 수 없는 게, 다큐멘터리 영화에 종사했던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초기 경력이나 극영화 전작들을 생각해보면 그에게는 충분한, 증명된 능력이 있다. 고레에다는 그냥... 하지 않은 거다. 아니... 나는 그가 선택적 눈 감기를 했다고 말하느니 차라리 늙었다고 말해버리고 싶다.
마이코는 물론 법적 성인인 게이코들이 등장하는 장면에서조차 성애를 암시하는 대사나 관음적인 카메라워크는 없다. 허나 <마이코네 행복한 밥상>은 마이코 육성 제도와 오키야의 일상을 대단히 미화하고 있고 나는 이 온건한 윤색이 작게는 교토의 관광산업에, 크게는 기온의 마이코 지원율에 영향을 줄 거라고 확신한다. 초국적 OTT 서비스인 넷플릭스를 통해 이 시리즈를 접한 미성년자 중 마이코가 될 마음을 먹지 않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으리라고 어떻게 장담할 수 있을까? 한 작품이 여러 사람, 특히 사물 변별력과 의사결정능력이 성인에 미치지 못하는 미성년의 미래에 미칠 수 있는 파장을 생각한다면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대단히 무책임한 연출자다. 고레에다 자신이 작가로서 주력해 온 세계관인 대안가족 서사에 있어서도 <마이코네 행복한 밥상>은 실망스럽다. <마이코네 행복한 밥상>은 특수한 목적을 위해 형성되었으며 경제적 이해관계를 내포한 공동체에 내재되어 있을 긴장감을 모조리 지워버림으로써 행복한 여성 공동체 판타지를 완성시켜 보이는데, 이는 여성서사, 대안가족 서사의 복잡성이나 다원성은 물론 여성인권 일반에도 매우 유해한 재현이다.
<마이코네 행복한 밥상>을 다 본 게 1월 26일이었다. 그때부터 써야겠다고 결심한 비평을 쓰기 시작한 지 보름도 넘게 지난 시점에서, <마이코네 행복한 밥상>이 마이코 양성 제도를 미화한다는 비판에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내놓은 장문의 반박글(1월 24일자)이 존재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한 감독의 작품 세계를 종합적으로 평하는 감독론, 혹은 한 감독의 한 작품을 혹독하게 비판하는 비평을 쓰기 전에는 항상 그 감독의 전작을 다 챙겨보곤 한다. 일종의 예의를 지키기 위해서다. 그와 같은 이유로 보게 된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 대부분이 (<공기인형>(2009)을 제외하면) <바닷마을 다이어리>, <브로커>, <마이코네 행복한 밥상>에서 느낀 실망감을 상쇄할 만큼 충만했기에, 이 비평을 끝내는 데 더욱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나 싶다. 나의 짧은 변명에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긴 변명을 덧붙이는 걸로 글을 마무리짓고자 한다. 그것이 거장이라 믿었던 사람에게 예의를 지키는 방법이라면 말이다.
(출처 : http://www.kore-eda.com/message/20230124.html)
제가 종합연출과 공동각본을 맡은 <마이코네 행복한 밥상>은 2023년 1월 12일에 방영이 시작되었습니다.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러분. 드라마 제작을 위해 본격적으로 취재를 시작한 것이 2020년 여름이었기 때문에 벌써 2년 반이 지났습니다. 간단하긴 하지만 그 제작 과정에서 생각한 것들을 좀 정리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가와무라 겐키씨로부터 원작의 드라마화를 의뢰받기까지의 하나마치에 대한 저의 지식은 미미했습니다. 영화로 말하자면 미조구치 겐지의 <기온의 자매>(1936), <기온 음악>(?<오사카 엘레지>(1936)로 추정), 나루세 미키오의 <흐르다>(1956)정도. 서적도 몇 권 읽으면서 준비는 하고 있었습니다만, 처음 기온에 발을 들여놓았을 때의 나의 스탠스는 드라마 4화에 등장하는 스미레의 아버지와 큰 차이가 없는 부정적, 회의적인 것이었습니다. 다만 취재를 처음 알게 된 것은 이 '전통'을 가부키와 같은 문화로서 다음 세대에 계승해 나가기 위해 바뀌려는 사람들이 하나마치 안팎에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영화나 TV 업계도 비슷한 문제를 안고 있기 때문에 개혁이 쉽지 않다는 것을 이해하지만 저는 그들의 노력과 연대하여 작은 힘으로나마 응원하고 싶었습니다.
저희가 취재에 들어간 후 촬영까지 2년 동안, 교토는 코로나19 사태에 푹 덮여 있어서 마치 유령 도시랄까, 촬영소 안에 세워진 세트장 같았어요. 촬영하기는 편했지만 주로 관광객을 상대로 생업하시는 분들은 힘들었을 것 같아요. 하나마치도 마찬가지라, 우리가 취재한 곳은 기온 코베라고 하는 하나마치 중에서는 가장 게이코, 마이코들이 많은 지역이었지만 연습을 거듭해도 그것을 발표할 장소가 없어 포기하고 고향으로 돌아가버리는 교육자도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전통을 계승해 나가는 사람들에게는 위기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변화는 조금씩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지난해 태어나서 두 번째로 경험한 연회에서는 2020년 첫 번째 때와 달리 마이코들이 술자리에서 술을 마시게 하지 않는다, 음주는 금지한다는 규칙 변경이 철저하게 이루어지고 있었어요. 작년 12월에 운영진 중 책임자 분과 이야기했을 때 마이코의 연회 참석은 22시로 끝내고, 나머지는 게이코에게 바통 터치, 오키야와 마이코들 사이에 계약서를 제대로 쓰고 상담 창구도 설치한다는 설명을 들었습니다.
물론 교토에는 5개의 하나마치가 있고, 그 입지와 성립에 따라 풍속도 다르기 때문에 한 발짝 더 나아가 개혁이 진행되지 않는 부분도 있을 것으로 추측되지만, 영화계, 연예계보다는 속도가 빠르지 않을까 하는 생각마저 듭니다.
오랫동안 이어져 온 문화 속에서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인습으로 보아 새롭게 단장해 나갈 것인가? 잠깐 들여다보기만 했던 저 같은 인간이 그 기준을 가볍게 말하기는 상당히 어렵다고 느꼈습니다. 예를 들어 마이코들의 노동자성에 대해서는 저 역시 의문을 가지고 조사했고 설명도 들었습니다만, 솔직히 납득이 되지 않았습니다. 모종의 치외법권적으로 인정되어 온 특수한 해석에 대해서도요. 아마도 향후 외부의 눈에 의한 「개혁」의 메스는 들어갈 것이라고 봅니다. 다만, 메스를 손에 쥐게 된다면 적어도 교토에는 하나마치가 5개 있다는 것 정도는 이해한 후에 해야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시대에 맞게 변할 수밖에 없는 부분도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하지만 없어져 버리면 좋겠다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시대의 변화와 알력을 느끼면서도 지켜온 삶은 도쿄에서의 생활밖에 모르는 저와 같은 인간에게는 풍부하게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하나마치 자체의 모습에 대해서는 제가 말을 꺼낼까 말까 고민했는데 2022년 현재 이런 개혁에 내부적으로 임하고 있다는 것을 '성명'과 같은 형태로 발표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라고 운영진에게는 전달했습니다. 타이밍을 보고 변호사님과도 상의를 해서 그렇게 하고 싶다고 말씀하시더군요. 그런 목소리가 내부에서 제대로 올라와 하나마치에서 일하는 분들의 미래가 제대로 지켜지는 상황이 오기를 지지자의 한 사람으로서 바라고 있습니다.
자, 드라마에서의 하나마치 묘사에 대해서. 이 글의 서두에서 언급한 스미레의 아버지가 걱정하여 딸이 사는 오키야에 찾아오는 장면의 각본을, 취재로 신세를 지게 된 현지 분이 미리 읽어주셨어요. 현재는 마이코 지원자의 보호자는 반드시 만나 납득시킨 뒤 마이코를 받아들이게 되어 있다고 합니다. 스미레의 아버지 장면은 오해를 낳기 때문에 가능하면 잘라달라고 하셨니다. 영화 <게이샤의 추억>(2005)이 전 세계에 개봉한 후 기온에 관광차 방문한 외국인들 중 마이코는 가난한 부모에게 버려진 사람들이라고 생각하여 불쌍히 대하는 사람들이 많아져 곤란하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어떻게든 그 부정적인 이미지에서 벗어날 생각을 하고 있다는, 분노와 비슷한 간절한 결의를 전해 들은 것도 제 입장을 결정하는 데 상당히 크게 작용했습니다.
저는 스태프들과의 대화를 통해 스미레 아버지가 가진 선입견은 남겨두되, 오키야의 어머니를 통해 반박시키는 형태를 택했습니다.
그러나 알기 쉬운 형태로 마이코나 게이코를 괴롭히거나 상처를 주는 인물은 이야기에 등장시키지 않았습니다. 그건 미조구치 겐지가 이미 그리고 있었으니까요. 지금 거론한다면 다르게 하자, 라고 생각했습니다. 오히려 제가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모모코 씨의 애인이 구현하는 악의는 없지만, 그녀들의 직업을 나의 것과 비교해서 어딘가 가볍게 보거나 사실은 그만두고 싶어한다고 생각하는, 상냥해서 오히려 더 눈에 보이기 어려운 잠재적인 '편견'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외부의 시선을 감당하더라도 씩씩하게 살아가는 요시노의 '슬기로움'이었습니다.
저는 기온이 형성된 이래로 현대까지 이어지고 있는 모습이 하나의 기적이라고 생각했지만 그곳을 유토피아로서는 그리지 않을 생각이었습니다. 오히려 저 공간과 시간이 언제까지나 지속되지 않는 한정적인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고귀하다는 가치관으로 그렸습니다. 어디까지 표현됐지는 모르겠지만요.
바꿔 말하면 '그곳에 사람이 찾아와서 떠나간다, 희망이나 실의를 품고 감추면서. 그 반복을 누군가 바라보고 있다. 지켜보고 있다'고 하면 되려나요. 아즈사와 타나베가 가모가와를 따라 걸으면서 이야기한 것처럼. 그게 바로 오키야의 지붕 위에 놓인 다복(多福)을 상징하는 인형이 아닐까. 혹시 키요? 그렇구나. 그렇구나. 원작이 그리는 키요라는 불가사의한 존재의 본질은 거기에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키요는 모종의 수호신이네요. 이번 드라마화에 있어서는 원작자인 코야마 아이코 씨의 관대함에 어리광을 부려 오리지널 등장인물을 주인공 주위에 몇 명 배치했지만, 키요의 본질만큼은 해석을 틀리지 않게 하려고 생각했습니다. 코야마 씨에게 확인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제 단순한 추측일지도 모릅니다만.
16살의 요리사(마카나이)는 현재의 하나마치에는 존재하지 않는 픽션이기는 하지만 제가 취재를 통해 느낀 그 거리의 '역사적인' 측면을 키요라는 존재를 통해서 제대로 그리고 싶었습니다.
이것이 드라마 <마이코네 행복한 밥상> 제작에 있어서 프로그램 총괄 책임자로서의 기본적인 저의 스탠스입니다.
작년에 하나마치에 대한 고발이 있어 뜻밖에 마이코들이 주목받았습니다.
드라마 촬영은 재작년 여름부터 겨울까지였기 때문에, 그 일이 작품 내용에 직접적으로는 영향을 미치지 않았습니다. 원작에는 없는 비판적인 시선을 가진 인물을 등장시킨 것은 또 다른 이유에서입니다.
단, 이 드라마 시리즈를 배포할 때는 2022년의 고발에 대해서는 제대로 된 '성명'을 내야 하지 않을까?라는 질문을 하고, 작년 8월부터 몇 차례 넷플릭스 및 제작진과 논의를 거듭했습니다. 다만 교토의 오바마 거리와는 또 다른 의미로 손발이 맞지 않아 성명을 정리하기에는 이르지 못했습니다. 작품은 감독만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것은 어떻게 보면 어쩔 수 없다고 받아들이고 있습니다만, 드라마화 기획 초기부터 관여한 책임자의 한 사람으로서 나름대로의 스탠스를 역시 한 마디 여기에 적고 싶다고 생각한 바 있습니다.
이상입니다.
2023년 1월 24일 고레에다 히로카즈
각주 1) 이상현, "빈터와 그곳에서 반짝이는 것들", 한국예술종합학교 웹진 K-ARTS 35호, 한국예술종합학교 대외협력과, 2020년 가을호. http://art.karts.ac.kr/magazine/35/story_4.html
각주 2) 상게서
부록 1-1) 거장이 늙었음을 탄식하게 만든 : 미야자키 하야오의 <바람이 분다>(2013)
'늙었다'는 표현을 사용하는 게 무례할 뿐 아니라 문제적일 수도 있다는 점을 글의 초반에 언급한 바 있다. 나이가 들었다고 해서 지성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더욱 빛을 발할 때도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보았을 때 나의 표현은 비판받아 마땅하다. 연륜도 있고 국내외에서 인정받으며 자기 세계관을 공고히 증축해 온, 믿었던 거장에게 실망감을 느꼈을 때, 분명 제대로 보고 제대로 표현할 능력이 있는 이 사람이 작정하고 마음 편하게 만들고 싶은 걸 만들기 위해서 감으면 안될 눈을 감았구나, 라는 확신이 들 때 부러 충격 요법처럼 저 표현을 쓰게 되는 것 같다. 내가 처음으로 '늙었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 감독은 미야자키 하야오였고, 시기는 2013년이었다.
미야자키 하야오가 몇 번의 은퇴를 번복한 끝에 내놓은 <바람이 분다>(2013)는 대부분의 한국인 관객들에게 환영받지 못했다. 영화가 각색한 실존 인물 호리코시 지로가 제2차 세계 대전에 사용된 전투기를 설계한 일본인이기 때문이다. <바람이 분다> 자체는 미야자키 하야오 기존의 작품들과 아주 동떨어져 있지만은 않다. 비행체에 대한 애착, 전쟁과 군국주의에 대한 비판, 꿈과 이상을 간직한 개인 등이 제시되고 있다는 점만 본다면 말이다. 하지만 호리코시 지로가 자기 꿈을 쫓아 비행기를 만들 수 있었던 건 일본 군부의 적극적인 지원과 의뢰 덕분이었다. 지로는 그들에게 비행기를 조달했고 그것이 누군가를 죽일 수단으로 쓰일 것임을 모르지도 않았다. 마지막 장면에서 지로는 제 꿈의 산물이 카미카제가 되어 하나도 돌아오지 않고 사라져 버린 데 대한 상실감을 토로하지만 그 비행기가 무너뜨린 도시들, 죽게 만든 누군가들에 대해 생각해보는 장면은 나오지 않는다. 지로가 정말로 인류 문명의 한 구성원으로서 양심적으로 숙고했다면 제국주의 일본 치하에서 비행기를 만드는 일을 그만뒀어야 했다. 적어도 계속할지 말지에 대한 고민이라도 해봤어야 했다. <바람이 분다>는 전범국의 전투기 설계자를 주인공으로 하면서 반드시 돌파해내지 않으면 안 될 그 부분에 대한 언급을 꺼리고 있다. 대신 "난 그저 아름다운 비행기를 만들고 싶을 뿐이야."라는 회피 기동만 번복한다. 호리코시 지로가 인지하는, 미야자키 하야오가 그려내는 전쟁은 가끔 찾아오는 반갑지 않은 노크처럼 개인의 삶을 두드렸다가 떠날 뿐이다. 결국 남는 것은 환영과도 같은 장면들이다. 카프로니 백작이라는 외국인이 자네의 비행기는 그럼에도 아름답다고 위로하는 환상, 사랑하는 약혼자 나오코가 파란 하늘 아래 푸른 언덕 위에서 계속 살아갈 것을 맑은 음성으로 권하는 잔상. 일본적인 무엇이나 전쟁의 흔적은 그 어떤 것도 보이지 않는 초국가적인 풍경이다. 보다 정확하게는 평화로운 서유럽의 이미지. <붉은 돼지>(1992)나 <마녀배달부 키키>(1989), <하울의 움직이는 성>(2004)에서 익히 보아 왔던 미야자키의 미쟝센이지만 <바람이 분다>에서만큼은 명백하게 전후 일본의 자기 위로와 도피를 위한 은신처로 제공된다는 점에서 탄식을 금할 길이 없다.
<바람이 분다>는 개인의 이상은 귀히 여길 줄 알면서 그 이상의 실현이 세상에 미치는 영향, 쓰이는 방향에 대한 고찰은 피하고 있다. 그런 영화의 주인공이 꿈과 현실이 다르다고 낙담한다면 관객은 그다지 위로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물론 <바람이 분다>는 (미야자키가 일관되게 강조했던 대로) '일본 제국주의 신민'이 아니라 한 일본'사람' 이야기다. 하지만 이 일본'사람'이 '일본 제국주의' 현실에서 살았던 건 분명하다. 그 또한 소극적이든 적극적이든 전쟁에 동조한 무수한 제국'신민'들 중 하나였다. 제국주의 일본 치하에서 살았던 일본 사람은 개인이라는 이유로 자기성찰을 피해도 되는가? 군국주의의 칼끝이 가리키는 떠오르는 태양 일본을 모두가 믿었기에 그때는 어쩔 수 없었다는 식으로 지나가면 그만인가? 이 관점의 차이는 미야자키 하야오가 일본인이고 관객인 나는 한국인이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인가? 한 개인의 아름다운 꿈이 이용당했을 뿐이니 그 또한 전쟁의 피해자라고 받아들이기엔, 전범국가 일본이 남기고 간 기억이 너무나 참혹하다. 전후 일본 영화가 내비치는 피해자성은 그들이 전범국가의 원죄를 동시에 받아들이지 않는 한 성립되기 힘든 것이다. 독일의 전후 2세대 감독들이 학살자인 아버지들의 죄를 성토하는 영화들을 대대적으로 내놓은 것과 달리, 일본의 전후 세대 대부분은 "다시는 그런 비극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 "전쟁은 모든 인간에게 극심한 고통을 준다", "고통스러워도 살자! 우리는 일본이다!"라는 반전과 재건의 메시지에 주력해왔다. 제국 일본의 신민들에게 실존했던 집단적 가해자성을 직면하는 작업은 전공투 시절 만들어진 일부 대항영화를 제외하고는 많지 않았던 게 사실이다.
추측컨대 미야자키 하야오는 본래 관심을 가지고 있던 분야인 비행기에 평생을 종사한 호리코시 지로에게 관심이 생겨 그 일생을 구현해내고 싶었던 것 같다. 비행기 설계자가 애니메이션 영화 감독과 마찬가지로 완전무결한 디테일을 필요로 하는 창조자라는 점에서 동질감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지로를 체제 순응적이기보다는 정치에 무심한 개인, 조용히 자신의 작업을 계속해나가는 장인으로 그린 이유 또한 미야자키 개인의 성향이 반영된 결과가 아닐까. 그렇더라도 <바람이 분다>는 고유한 세계관과 장인 정신으로 많은 팬을 확보하고 있는 거장 감독에 대한 실망감을 안겨주는 작품이었다. 이 영화를 만들고 싶었던 미야자키 하야오가 한 사람의 개인이라는 것을 이해한다. 허나 그는 창작자이자 창구이기도 하다. 그에게는 창작자로서의 책임감이 있다. 미야자키는 호리코시 지로나 자기가 바라본 전범국가 일본 국민에게 은신처를 마련해주어서는 안 되었다. 우익에 편승한다는 논란을 무릅쓰더라도 영화로 만들고 싶을 만큼 호리코시 지로에게 강한 애착이 갔다면, 지로가 시대상 마주했을 상황과 그의 고민, 갈등, 선택, 선택에 따른 결과 등과 확실하게 맞섰어야 했다. 힘든 작업인 걸 안다. 그걸 일일이 파헤치다 보면 '정말 보고 싶었던 장면'을 보고 싶은 방식으로 다루는 건 포기해야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걸 줄다리기하여 최선의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게 영화 연출자의 일 아닌가. 내가 보기에 <바람이 분다>는 보고 싶은 장면만을 위해 반드시 돌파해야 할 지점을 외면하고 만들어진 일종의 판타지 영화이자, 원치 않게 시대의 희생양이 된 구세대 일본인에 대한 연민과 애틋함으로 점철된 자기위로물이다. 곳곳에 반전, 반제국주의 메시지를 우회적으로 심어놓기는 했으나 그 방식은 지극히 소심하여 결국 회피로 교착되고 만다. 미야자키 하야오가 우익이 아니며, <바람이 분다>가 우익 영화가 아니라는 건 안다. 하지만 미야자키가 의도하건 의도하지 않았건 간에 미야자키 본인과 주인공 호리코시 지로의 태도가 겹쳐 보이기에 영화는 더욱 실망스럽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미야자키가 늙었다는 말이 그는 감독으로서 이제 끝났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은 더 이상 보지 않겠다는 말은 아니다. 오히려 그의 작품을 무조건 거장의 것으로 받아들이기보다는 '믿고 보는 창작자'라는 개념은 환상이라는 사실을 숙지한 채 내가 보아온 미야자키가 그대로인지, 전작에서 느낀 실망감이 상쇄될지 아닐지를 예의주시하겠다는 표현에 더 가깝다. 미야자키 하야오가,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정말로 감이 떨어진 게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받고 싶다는 거다. 관객으로서나 비평가로서나 그들이 매번 다시 '보기'와 '만들기'를 포기하지 않고 돌아와주는 게 고맙다. 창작에 있어서 제일 중요한 것은 자신이 본 것을 '믿기'인데 이것이 (적어도 내게는) 그렇게 쉽지 않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창작자라면 특히나 더 자기가 보는 것을 믿기로, 믿는 대로 무언가 만들어보기로 결심하기까지 지난한 회의와 사유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손쉽게 믿어서는 안 된다. 만들고 싶은 것을 우선하여 눈을 감아서도 안 된다. 내게 보이는 것과, 나로 하여금 믿게 만드는 것들을 계속 의심하지 않으면 기존의 세계를 심화시키는 작품이 탄생할 수 없다. 때로 그 과정이 잘못되었음을, 하여 만들어진 작품이 잘못된 믿음을 내포하고 있음을 발견하고 짚어주는 것이 비평의 역할임을 믿는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2024년 여름 신작으로 돌아올 예정이라고 한다. 그가 오래오래 작품 활동을 지속해주길 바란다. 그는 내가 처음으로 접한 영화들을 만든 사람이다. 내게 있어서는 최초의 이야기꾼이므로,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에는 항상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기도 하다.
부록 1-2) 다리오 아르젠토는 확실하게 노망이 났다 : <다크 글래시스>(2022)
2022년 부산국제영화제 상영작이었던 <다크 글래시스>는 지알로라는 장르에 충실하게 만들어졌다는 점을 차치하고서라도 정말 끔찍했다. 비록 그 귀여운 영감이 상영 직전에 부산국제영화제에게 보내는 영상편지에서 "비바 코리아!"를 외쳐주긴 했지만. 소향씨어터를 나와 숙소까지 가는 동안 나는 문자 그대로 씩씩거리면서 동행에게 다리오 아르젠토가 미친 게 아니라면 저 정도로 유해한 영화를 찍을 수 없다고, 이메일이라도 보내야겠다고, 그는 감 떨어진 백인 남자 노인이고 더는 영화를 찍게 놔두어서는 안 된다고 떠드는 걸 멈출 수 없었다.
(강력한 스포일러 있음)
창녀 응징 서사와 (극의 전개에 있어서는 불필요하다 못해 뜬금 없을 지경이지만 시각적으로는 지나치게 자극적이다 못해 선정적이기까지 한) 고통 포르노는 그 장르의 유구한 전통이라 치자. 동물을 기능적으로 사용하는 그 무성의한 해결책은 야만적이다 못해 기만적으로까지 느껴졌고, 아시안 이민자와 이민 아동에 대한, 도저히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알 수 없는 차별에는 몸서리가 쳐졌다! 특히 나는 결말이 불만이다. 시력을 잃은 디아나를 안내견에게만 의지하게 하는 게 아니라 공권력(경찰)의 보호도 받아가면서 제2의 삶을 살게끔 해 주어야 하는 거 아닌가? 새로운 커뮤니티도 찾고 일자리도 구하고, 새 친구들도 생겨서 시력을 잃고 성 노동을 지속하지 않더라도 잘 살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줘야 하는 거 아닌가??? 부모를 잃은 이민자 아동은 고향의 먼 친척(성 노동자로 일한다는 정보만 주어진 젊은 독신 여성, 그러니까 시력이 있고 국적만 다른 제2의 디아나)에게 돌려보내는 게 아니라 현지에서 괜찮은 위탁부모나 양부모를 만나게 해 줘야 하는 거 아닌가? 생사고락을 함께하며 깊게 정이 든 디아나와 꾸준히 왕래하면서 현지 사회에 잘 적응해서 사는 게 아이를 위해서도 좋은 일이고, 죽은 아이의 부모도 바라던 바 아닌가? 아이를 기껏 떠나온 본국의, 썩 좋지도 않은 환경으로 치워버린 뒤 그를 쓸쓸히 배웅하는 디아나에게는 마지막 대사로 "이제 나한테는 너(안내견)밖에 안 남았구나."를 주다니. 직업상 따라오는 험한 시선이나 대우에도 아랑곳 않고 당당하게 자기 나름의 기준을 가지고 일하며 살아왔던 디아나였는데, 그런 디아나를 무력한 피해자로 전락시켜 놓은 뒤 사회적으로 고립시키면서 완성되는 영화의 결말에 동의할 수 없다. 참을 수가 없다!!!!! 유해하고 불쾌한데 그게 그렇게까지 교묘하게 조작된 혐오도 아니라는 게 나를 화나게 해!!!!!!! 작년에 본 그 어떤 영화보다 나를 더 흥분시켰다는 점에 대해서는, 인정한다, 비바 다리오 아르젠토!
부록 2) 오즈 야스지로 영화 속 하라 세츠코의 웃는 낯에 대한 변명
'행복한 집요정' 키요를 비판하면서 오즈 영화 속 하라 세츠코의 웃는 얼굴을 언급했었다. 본문에서 사용한 맥락과는 다르게, 나는 오즈 야스지로가 하라 세츠코의 얼굴을 활용하는 방식을 나쁘다고 보지 않는다. 독일 혼혈로 알려진 하라 세츠코는 흑백 필름 속에서도 유독 생생하게 표정이 전달될 만큼 큼지막한 이목구비를 가지고 있다. 늘씬한 키와 서구적인 외모는 오즈 영화 속의 하라 세츠코를 전통적인 일본 가정에 불어오는 변화의 바람, 현대 일본으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등장한 신여성의 페르소나로 부상시켰다. 이때의 하라는 소중한 딸이고 살뜰한 며느리인 동시에 언젠가는 반드시 떠나갈 존재다. 하라가 떠난 가정은 자연스럽게 해체의 수순을 밟게 된다는 점에서 그녀는 신세대에 속함에도 불구하고 숙명적으로 노스탤지어의 잔향을 남기게 된다. 항상 명랑하게 대답하고 온 얼굴 근육을 다 쓰며 환하게 웃어보이는 하라 세츠코의 표정은 때로 부자연스럽게 보이기까지 하는데, 한 템포 높인 음성이나 '부러' 끌어올린 입꼬리가 극중 상황과는 반드시 맞아떨어지지만은 않아서 그렇다(오즈 영화 특유의 반 박자 느린 리버스 쇼트 대사가 그 절묘한 엇갈림을 더욱 부각시킨다.). 특히 결혼과 관련된 말, 남성 상사의 놀림 등에 대응할 때 하라가 보여주는 웃는 얼굴이 더욱 그렇다. 그때의 하라는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들며 즉답을 피할 수 있는 대사를 뱉거나 그저 환하게 웃어줄 뿐, 진심을 진지하게 전달하는 대사를 내어주지 않는다.
하여 나는 오즈 영화 속 하라 세츠코의 웃는 얼굴을 전후 일본의 격동기 속에서 젊은 여성들이 요구받는 암묵적인 기대 역할의 수행으로 독해하게 되었다. 전후의 일본 여성들은 더 이상 가정의 뜰에만 머물지 않고 자유롭게 경제활동을 하게 되었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퇴근한 이후에도 쉬지 못하고 사무실에서 했던 것과 동일한 종류의 감정노동을 하게 된 것이다. 살뜰한 응대, 보는 이에게 부담을 짊어지우지 않는 환한 미소. 기모노 대신 치마 정장을 입었지만, 아니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더 그들은 가정에서나 일터에서나 상냥하고 명랑하고 생활력 강하되 여성스러운 존재여야 한다. 일을 시작한 뒤 여성들의 인권이 높아졌을지는 모르나 감정노동의 총량은 늘어난 거다. 조금 다른 종류로 바뀌기는 하였으나 여성성 또한 더 강하게 요구받게 되었다. 심한 비약으로 들릴 것을 각오하고 말하자면, 근대와 근대 이전의 일본에서는 유흥업계의 여성들에게 요구되었던 기대 역할(게이샤나 유녀가 아닌 여성들은 가정에 있었을 테고)을 전후 일본에서는 '바깥 일'을 할 노동력으로 재고된 '젊은 여성'들이 떠맡았다고 본다. 오즈가 의도한 연출인지 아닌지 찾아 본 적은 없지만, 하라 세츠코의 아름다운, 때로는 강박적이라 느낄 정도로 미소 짓기에 열심인 그 얼굴이 바로 그 전후 여성상의 재현이자 균열이라고 생각한다.
나이를 먹은 뒤의 하라 세츠코는 주로 미망인, 때로는 혼기가 찬 딸을 둔 미망인이거나 재가하기를 종용받는 며느리 등으로 오즈 영화에 등장하기 시작한다. 이때의 하라 또한 특유의 환한 미소를 보이며 거의 모든 대사를 웃음기를 머금은 채 처리하고 있기는 하다. 다만 표정으로 감정을 드러내는 데 있어서는 보다 편안하고 풍부한 느낌을 주고, 한두 씬에서는 자기 속내를 대사로 직접 드러내기도 한다. <고하야가와 가의 가을>(1961)에서 시가가 주선하는 맞선을 피해다니는 아키코의 웃는 얼굴은 젊은 여성이라는 굴레에 메여 원치 않는 권고조차 웃음으로 얼버무렸던 10년 전의 노리코(<초여름>(1951))의 그것과는 다르다. 사실 오즈 영화 속 중년의 하라 세츠코는 나이가 들었을 지언정 결혼시장에서 여전히 수요가 있는 매력적인 존재로 묘사된다. 이 일본 여성은 그와 같은 추파나 제안에도 모르는 척 시종일관 웃는 낯을 하고 있기는 하지만 자신이 원하지 않는 일이나 요청에는 (자리를 피하는 행동으로) 절대 응하지 않기도 한다. 이때 하라가 보이는 웃는 얼굴은 더 이상 반드시 갖추어야 할 무엇, 당장의 마음과는 불일치하더라도 상대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지 않기 위해 내비쳐야 할 긍정적인 신호로 기능하지 않는다. 중년의 일본 여성에게 웃는 얼굴이란, 젊은 시절 일본 여성으로 살면서 생긴 습관이자 사회적인 가면이며 때로는 방패인 게 아닐까. 일본 사회 내에서의 암묵적인 합의로 가능해진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글쎄, 아마도 아니겠지. 그렇더라도 개인의 내면에는 그럴 수 있는 힘이 생기는 것 같다. 웃어는 주더라도 응하지는 않는 것. 상대에게 편안하고 매력적인 여성으로 보여지든 말든 나는 내 마음 가는 대로 행동할 수 있는 것. '여성'으로 살면서 억지로라도 가져야 했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적절하게 사용할 수 있게 된 나 자신의 일부.
그래서 나는 오즈 영화 속 하라 세츠코의 웃는 얼굴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