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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태인 Jun 28. 2023

권수현 작은 상영회 상영작들 비평 모음

뮤지컬 배우이자 유튜버로도 활동하는 권수현 배우의 작은 상영회에서 비평을 쓰고, 관객과의 대화를 진행했다. 아래 상영작 세 편의 비평문을 첨부한다. (비평문은 상영 순서에 따라 기재하였다.)



1. <거꾸로 강을 거슬러 오르는 저 힘찬 연어가 되진 않을 거야>, 정가연

2. <영화로운 16.5㎡짜리 방>, 팽재훈 · 김성윤

3. <내 망상의 지은이>, 홍아린





"불안은 내 영혼을 잠식할 수 없어!" / <거꾸로 강을 거슬러 오르는 저 힘찬 연어가 되진 않을 거야>, 정가연


<거꾸로 강을 거슬러 오르는 저 힘찬 연어가 되진 않을 거야>(이하 <거꾸로···>)에서 권수현은 하루하루를 살아내기 바쁜 대학생 나리로 분한다. 평범한 일과라도 나리에게는 벅찬 것투성이다. 제때 일어나 제때 출석하기, OOTD, 팀플, 발표를 마무리하는 인사말까지 모든 게 쉽지 않다. 매사에 자연스럽고 침착한 동기 지연(이세하 扮)을 닮고 싶지만 나리의 일상에 영향을 미치는 대상은 따로 있다. 엄격한 관리자 E(홍서연 扮)다. E는 나리가 하는 모든 말과 행동에 사사건건 간섭하고 때로는 심하다 싶을 만큼 매섭게 비난을 퍼붓는다. "너 나 없으면 인생 망한다고!" 이 한 마디로 축약되는 나리와 E의 기형적인 역학관계에 대해 단서가 주어지는 것은 영화 중반부터다. 나리의 일상뿐 아니라 같이 사는 친구나 가족조차 알기 힘들 내면의 영역까지 침범하는 E는 하나의 독립된 개인이 아니라, 나리의 내면을 점령한 불안을 실체화한 일종의 환영이다. 나리는 지연과 대화하던 중 우연히 건져 올린 한 마디로 이 불편한 동거를 청산할 단서를 찾게 된다. "흘려보내"는 것이다.


<거꾸로···>는 내면의 불안에 매몰되어서는 안 되고 불안을 버리기 위해 노력할 필요도 없으며 불안은 그저 '흘려보내'는 수밖에 없다는 진리를 사운드를 통해 전달한다. 나리와 E가 나란히 선 가운데 E의 대사가 뮤트 처리되고 하천의 물소리만 졸졸 흐르는 클라이맥스는, 그 자체로 자신의 모든 말과 행동을 검열하면서 일상을 조이는 대신 흘려보낼 줄도, 풀어둘 줄도 알아야 한다는 메시지다.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는 연어'는 말과 행동을 되씹는 행위에 대한 은유다. 그런 한편 생명체로서의 연어는 강을 거슬러 제가 태어난 곳에서 번식하는 본능을 가지고 있다. 결국 '거꾸로 강을 거슬러 오르는 저 힘찬 여ㄴ어가 되지 않겠'다는 다짐은 불안에 잡아먹히지 않되 인간인 이상 발생할 수밖에 없는 자연스러운 감정으로서의 불안까지 부정하지는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인 것이다.


오프닝 시퀀스 말미에 다급하게 집을 나서는 나리의 백팩에 달린 키링이 클로즈업된다. 실제의 연어초밥과 흡사하게 만들어져 있지만 엄연한 모형으로, 타이틀과 더불어 장 보드리야르의 시뮬라크르(simulacre) 이론을 연상시키는 소품이다. 사전적으로 시늉, 흉내, 모조품 등을 의미하는 이 단어는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지만 실제보다 더 실제처럼 인식되어 원본으로서의 현실을 대체하는 이미지를 가리킨다. 원본 없는 이미지니가 오히려 현실을 지배하게 되는 역설은 곧 서양철학이 플라톤 때부터 사유해왔던 이데아와 동굴 속 그림자의 관계, <거꾸로···> 속 나리와 E의 관계, 현실과 영화의 관계에 상응한다. <거꾸로···>는 주제가 함축한 철학적 무게를 가볍고 친근하게, 놀라우리만큼 정직하게 일상의 진리로 탈바꿈시켜 전해준다. 자주 놀라고 심하게 눈치를 보지만 만화 캐릭터처럼 생동감 넘치는 나리와, 안정된 눈빛과 음성으로 적재적소에 부담을 덜어주는 지연, 가혹하리만큼 비아냥대며 나리의 일상에 제왕처럼 군림하려 드는 E 각각의 표정 연기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이건 똥이 아닙니다, 사랑입니다" / <영화로운 16.5㎡짜리 방>, 팽재훈 · 김성윤


봉준호, <싸이코>, <화양연화>, <콜 미 바이 유얼 네임>, 시나리오 작법의 교과서라 할 수 있는 『Story : 시나리오 어떻게 쓸 것인가』, 영화 카메라와 찰리 채플린... 비장한 선율과 함께 드러난 16.5㎡짜리 방은 그야말로 영화롭다. 영화에 대한 기호와 헌사로 가득찬 방 한가운데서 영화를 보며 나누는 지은(권수현 扮)과 강두(김재호 扮)의 대화 또한 그렇다. "나라면 저렇게 안 찍는다고요." "넌 어떤 영화를 찍고 싶으신데?" 강두의 질문은 두 사람을 영화 속의 영화로 소환하는 주문이 된다.


이어서 펼쳐지는 네 개, 아니 네 편의 장르적 씬들은 일관되게 둘 사이에 있었던 과거의 한 사건을 들추고 있다. 예절학교 여름캠프 한밤중에 있었던 실내 배변 사건. 강두는 잊었고 지은은 잊을 수 없는 그 사건.


<영화로운 16.5㎡짜리 방>(이하 <영화로운 방>) 속 영화 씬들은 장르적 클리셰에 충실하게 연출되었다. 범죄수사물의 취조 현장은 풀 스크린 화면비의 전환과 함께 고전영화 속 한 장면으로 옮겨가고, 이는 다시 <라라랜드>를 패러디한 뮤지컬 퍼포먼스로 이어진다. 흥미로운 점은 장르가 바뀌어감에 따라 사건의 진실을 둘러싼 두 사람 사이의 갈등 또한 변곡점을 가진다는 것이다. 취조실의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는 혐의를 완강하게 부인하던 강두가 고전극에서는 품위 있는 분위기에 기대어 지은의 관용을 구하고, 듀엣으로 넘버를 부를 때의 지은은 강두를 추궁하는 대신 자신이 느꼈던 수치심과 배신감을 감성적인 선율을 통해 전달한다. 강두는 그에 귀 기울이는 듯하다가 몸을 돌려 지은이 연출한 첫 영화의 디스크를 집어 든다. "넌 말했지, 죽여주는 영화를 찍자며!" 영화로 화제가 바뀌면서 두 사람의 하모니는 극적으로 화합을 이루지만 뮤지컬 영화 특유의 이 낭만적인 현실 도피는 오래지 않아 무너진다. 마지막 영화에서 지은은 강두를 속여 고문실로 이끈 팜므파탈이자 코리안 익스트림 시네마의 한 갈래인 복수극의 살벌한 여주인공이다. 사건의 원흉이었던 강두의 항문에 칼이 꽂히고 피가 분출된 뒤에야 두 사람은 영화로운 방으로 복귀한다. 아니, 이 일련의 영화들을 끝내게 만든 건 복수가 아니라 웃음이다. 지은에게서 시작된 발작적인 웃음은 피투성이 시체가 되어 엎어져 있던 강두에게로 옮겨가고, 페이드아웃 이후의 두 사람은 다시 소파에서 영화를 보는 현실의 지은과 강두로 돌아온다.


<영화로운 방>을 보다 보면 높은 확률로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게 될 것이다. 왜 하필 똥이람? 글쎄, 아마도 똥의 다른 이름이 배설물이기 때문이지 않을까. 안에 있던 것이 가득 차 밖으로 밀려나간다는 점에서 배설은 생명체에게 반드시 필요한 일이고 가장 원초적인 행위다. 사회화된 인간은 배설을 남에게 보여서는 안 되는 일로 치부한다. 가장 취약한 부위의 노출과 악취를 동반한다는 점 때문이리라. 그리고 <영화로운 방>은 영화를 찍는 일이 곧 배설행위임을 암시하고 있다. 뮤지컬 씬에서 강두는 지은의 첫 영화, 첫 배설을 상기시키며 그 행위가 수치스런 일이나 악몽이 아니라 행복이었음을 강조한다. 앞서 말했듯 이는 뮤지컬 영화의 장르적 특성인 봉합에 다름 아니며 범인 주제에 자신의 진짜 배설을 정당화하여 진실 자체의 항문을 꿰매려 든 강두는 바로 다음 씬에서 응징을 당하지만, 고문실에서 오간 두 사람의 대화는 영화를 찍고 싶다는, 누군가에게는 배설이나 다름없는 기초적인 욕구가 "욕심 없이" '잘 사는 것'일 수 있는지에 대한 고민을 하게 만든다. 이 '진짜 같은 가짜'는 찍고 싶다, 찍어야겠다, 찍지 않으면 내가 죽겠다는 강렬한 욕구에서 출발하는 결코 단순하지만은 않은 행위이므로. 형식을 바꿔가며 여과되지 않은 진실을 취조해나가는 과정은 영화에 대한 사랑으로 승화되는 듯했다가 핏빛 복수로 귀결되지만, 결국 그 끝은 나는 내 영화를 계속 나답게 찍을 것이며 이게 누군가의 눈에는 배설물로 보이더라도 아랑곳 않고 웃어넘기겠다는 의식적인 다짐이 된다. 이 배설은 실수가 아닌 의도된 분출이자 유치하더라도 좋아할 수 있고 한참을 웃게 만들어줄 수도 있는 긍정적인 쾌락행위다. 어쨌거나 곧 죽어도 영화를 만들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있다. 자기만의 몸짓으로 창작활동을 계속해나가고 "훌륭한 영화감독이 될 거예요?"라는 질문에 스크린을 똑바로 쳐다보며 "네!"라고 씩씩한 대답을 할 수 있는 사람들.


그러니까 이 영화는 똥에 대한 영화가 아니라, 사랑영화다. 사랑을 고백하는 영화, 누군가에겐 세상 그 자체일 16.5㎡짜리 방 중심에서 영화를 사랑한다고 외치는. 여러분, 이 사랑을 응원해주세요.







"시들지 않는 해바라기는 없듯이" / <내 망상의 지은이>, 홍아린


<내 망상의 지은이>는 나(권수현 扮)의 나레이션으로 시작된다. "며칠 전 3년 사귄 여자친구와 헤어졌습니다." 첫 대사부터 스스로가 레즈비언임을 아무렇지 않게 고한 뒤, 영화는 다른 여자랑 바람이 난 전 여자친구 희진(권이수 扮)을 원망하며 그 모든 과정에 대한 "의심과 망상을 멈출 수 없는" '나'의 머릿속으로 달려 나간다. 망상의 주인공은 바로 지은(박신희 扮)이다.


'나'의 망상 속 지은은 '헤녀'다. 헤테로 여자의 줄임말인 헤녀는 동성애 커뮤니티에서 레즈비언들이 이성애자 여성을 지칭하는 말이다. 이성애자 여성이라고 모두가 다 헤녀로 불리는 건 아니다. 이성애 이외의 성적 지향에 대한 감수성이 너무하다 싶을 만큼 전무하거나 사귈 마음은 없으면서 무책임하게 플러팅에 가까운 언행을 일삼는 소위 죄 많은 이들이 헤녀로 명명된다. '나'의 관점에서 재구성된 지은은 어리고 호기심 많은 헤녀의 전형이다. '나'가 제대로 선을 긋지 못한 전 애인의 탓을 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나'의 망상과 희진의 변명 속 지은은 최대한 방어전을 펼쳐보려는 사람을 끊임없이 건드리고 유혹하는 세이렌 같은 존재다. '나'의 이야기를 믿는다면 지은이야말로 이 연애가 파국을 맞은 원인 그 자체인 셈이지만, 과연 그게 진실일까?


액자식 구성을 취하는 <내 망상의 지은이>에서 '나'는 희진에게 끊임없이 걸려오는 전화로만 비춰질 뿐 내용 자체에서는 배제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는 거듭된 벨소리와 희진의 지친 반응에서 '나'가 집착이 심한 애인일지도 모른다는 단서를 전해 받는다. 어쩌면 이 모든 이야기는 헤어진 연인의 환승연애를 의심하는 '나'의 망상일지도 모른다. 결말부에서 '나'는 "날 이렇게 힘들게 한 인간들 모두 불행했으면 좋겠"다고 읊조리며 잠드는데, 그렇게 생각하면 지은의 마지막 대사들은 희진의 불행을 바라는 '나'가 꿀 수 있는 가장 통쾌한 꿈 같기도 하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한 번 되묻게 된다. 지은의 농락에 희진이 놀아난 것처럼 보이지만, 그들 사이에 오간 모든 게 정말 가짜였을까?


지은이들은 왜 희진이들에게 접근하는가? 레즈비언, 특히 부치에 대한 헤녀의 호기심은 그들이 남성에 비해 물리적인 안전함을 보장하면서도 정서적으로는 유사한 설렘을 제공하는 대상이라는 데서 기인한다. 자기 방 침대에서 홀로 이성애 로맨스 드라마를 관전하는 지은을 보라. 안전한 상황과 극적인 상황을 동시에 경험하는 상태의 지은에게는 희진이라는 낯선 상상이 필요하지도, 매력적이지도 않다. 순전히 자기본위적인 지은의 성적 지향 탐구는 한 커플의 관계에 큰 위협이 될 수 있지만, 엔딩에 삽입된 노래의 한 소절("All of sudden, you're the hero of my story.")이 일깨우듯 이 씁쓸한 연애담의 진짜 주인공은 지은이 아니라 '나'와 희진이다. "글쎄요, 죽었을걸요?" '나'의 눈이 관객을 향하는 순간 이 모든 망상과 현실, 스크린과 객석 사이에 존재하는 벽이 무너져내린다. 관객은 '나'와 함께 일편단심의 사랑 또한 있을 거라는 망상에서 빠져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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