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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역 Dec 20. 2023

3중일기-"몇 살이세요?"

만으로요? 몇 년 생이세요? 아...

30대 중반 미혼, 누군가 내게 나이를 물어오는 게 솔직히 싫다.


 '만 나이 제도'로 나는 나이가 어려진 게 아니라, 상대방의 나이를 알고 싶어 하는 한국 사람들의 나이 집착만 더욱 확인하게 되었다. 나라에서 이제부터 만 나이를 쓰라고 지정해 줬는데도 몇 살이세요? 하나의 질문으로 끝나지 않고 "만으로요?", "몇 년생이에요?"라는 질문의 개수만 더 늘어났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나이와 서열화는 끝나지 않을 것 같다.


왜 나는 나이를 말하기 싫을까? 사실 내가 나이를 말하기 싫은 건 '만 나이' 시행 이후부터였던 것은 아니다. 사회생활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면서부터 나이를 말하기 싫었다. 집에서도 첫째인 나는 20대 때부터 무리에서 막내축에 속하거나 '어려본 적'이 없었다. 


 나는 '지각자의 삶'을 숙명처럼 타고났던 걸까.

21살에 들어간 대학교에서는 20살 동기들이 나를 언니라고 불렀고 25살에 들어갔던 학회 동아리에서는 여자 동기 중에 내가 나이가 제일 많았으며 대학교를 졸업하고 방송 막내작가를 했을 때는 26살이었는데 그때도 막내작가 치고 나이가 많다는 소리를 들었다. 


28살 때부터는 편집 디자이너로 전향해 일을 시작했는데 그때 들어온 신입 디자이너들 나이가 23-24살이었다. 대리도 나보다 2살 어렸다. 

디자인 회사에서는 나보다 나이가 어린 사람이 선임으로 있는 경우가 많았고 그들이 나를 어려워한다는 것에서 내 나이가 핸디캡처럼 느껴졌다. (물론 지금 돌이켜보니 나이도 나이지만 성격이 어려웠을 것 같다는 뒤늦은 반성을 한다.) 생각해 보니 25,26살이면 정말 어렸는데도 내가 제일 언니 대접을 받다 보니 내가 어리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상황이 그랬다 보니 나이를 말할 때, 마땅히 이 나이에 해야 할 것을 하지 못하고 항상 지각을 한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사회초년생인 나에게 '나이 많음=늦었음'의 의미였다. 남들보다 뭔가를 늦게 한다는 의미의 지각은 뭔가 많이 잘못된 것 같은 기분이 들 때가 많았다. 나의 피해의식이라고 한다면 그 또한 맞을지도 모른다.

 


미정: "세 살 때, 일곱 살 때, 열아홉 살 때 어린 시절의 당신 곁에 가 앉아서 가만히 같이 있어주고 싶다"
구씨: "있어주네, 지금. 내 나이 아흔이면 지금이 어린 시절이야."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의 미정과 구씨의 대사가 크게 와닿았던 건 우리 할머니가 나에게 하신 말씀 덕분이다. 할머니는 나에게 한창때이니 잘 먹고 다녀야 한다고 자주 말씀하시곤 한다. 그럴 때 나는 

"할머니 저 아직 한창이에요? (특히 인터넷에서) 저보고 사람들이 다 늙었다고 하는데...ㅎ"

"한창이지 그럼"하고 말씀하시는 우리 할머니의 연세는 나와 띠동갑. 그것도 무려 다섯 바퀴 차이가 난다. 

만으로 아흔넷의 연세이다. 


 25살 때, 26살 때, 29살 때도 지금 생각해 보면 어리다. 무리 가운데서 어리지 않아서 내가 어리다고 생각을 못했지만 나도 어렸다. 어린 줄 모르고 그 시절에도 왜 내가 제일 나이가 많을까 억울해하며 그 시절을 지나쳐왔다. 나중에 나이 들어서 돌아보면 34살도 그럴 것 같다. 앞으로 나는 중력과의 싸움에서 백전백패를 하게 될 것이고 점점 몸이 마음 같지 않다는 괴로움을 느끼게 될 테니 마음이라도 준비를 해야겠다. 잘 나이 들 수 있도록.


스마트한 의사결정과 진득함으로 하나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며 30대 중반이라는 나이에 걸맞는 차와 집, 혹은 남편과 자녀가 있는 친구들과 달리 모가 난 나는 20대부터 여러 가지 길을 들르며 구불구불한 길을 걸어왔다. 내 길을 가면서도 그들의 길을 동경했었지만, 이제는 이것이 나의 길인가 보다 생각한다.

한동안은 온라인에 퍼진 30대 중반 이후의 여성을 향한 혐오 발언들에 상처받기도 하며 나 자신을 깎아내리는 데 집중했다. 부질없는 짓이었다.


그러나, 나이와 나의 존재는 불가분의 것이고 내가 긍정하지 않으면 끝나지 않을 나와의 싸움이다. 

불혹은 흔들리지 않는다고 했으니 그전까지 마구 흔들릴 나의 마음을, 나의 과오와 깨달음들을 기록해보려 한다. 그래서 3중 일기라는 글을 연재해 보겠다고 다짐했다. 사람들이 많이 봐주고 공감해 주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첫 번째 이유는 따로 있다. 자꾸 나이가 나를 쫓아오고 압박하는 기분을 더 이상 느끼고 싶지 않아진 것이다. 내 나이대에 내가 지금 하는 생각을 나누고 싶다. 언젠가 잘못된 생각이었음을 알게 되는 경우들도 감수해야 하겠지만. 


저물어가면서도 예술 작품 같은 하늘을 보여주는 노을을 보며 나도 자연스럽게, 아름답게 저물어 가기를... 나이 듦을 받아들일 수 있기를 바라고 있다.


by. grim_giye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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