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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역 Feb 22. 2024

3중일기-차분해지려고 20년 넘게 연습한 사람

목소리가 참 차분하세요. 침착하시네요. 계획대로 되고 있어.

'저 사람은 차분하다'라는 느낌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요소에는 어떤 게 있는 걸까? 


단정한 옷차림,

정돈된 말투, 

들뜨지 않고 낮은 목소리, 

평온한 표정


 이 정도가 그 요소가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쉽게 동요하지 않고 호들갑 떨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을 우리는 '차분함'이라고 부르기로 한 것 같다. 나의 경우에는 표정은 평온한지 모르겠지만 앞에 세가지에 해당하는 것 같다. 평소 나는 처음 만난 사람들이나 주변 사람들로부터 차분하다는 평을 많이 듣는다. 


고백하건대 나의 차분함은 의도된 차분함이다. 나의 차분함은 억제, 절제, 정제 이 세가지로 제조되었다.

내가 느끼는 기분과 하고 싶은 말을 억제하고 

타인에게 정제된 말을 하며 절제된 태도를 보여줄 것.

어느날 나의 차분함을 인수분해하듯 분해해보니 차분함이란 

'나는 당신과 많은 감정을 주고 받거나 나누지 않을 거예요. 말만 주고 받다가 집에 갈 거예요' 라는 생각이 전제라는 걸 알게 되었다.


그렇다. 나는 마음 다치지 않고 안전하고 싶었다. 이미 마음은 많이 다쳐 봤으니까. 

나의 차분함은 감정을 아끼겠다는 뜻이었다. 

'덜 주면 덜 줬지 더 주진 않을래요. 나는 더이상 상처 받고 싶지 않아요' 라는 뜻이다. 

가전 제품에 에너지효율 1등급이 있듯이 나도 감정 에너지 효율 1등급을 노리는 거다.

어렸을 때 나는 지금은 상상도 할 수 없는 행동을 남들 앞에서 할 수 있는 아이였다고 한다. 

내 이야기지만 기억이 나진 않는데, 어렸을 때 가족 행사에서 앞에 나가서 내가 춤을 췄다고 했다. 

내가? 제가요?


그러나 어린 시절에 내가 감정을 최고조로 드러냈을 때 좋은 피드백을 받지 못했던 경험들, 웃기지도 않는데 해프게 웃지 말라는 말을 들었던 경험, 웃는 모습이 추하다는 말을 들었던 경험 등을 겪으며 변해온 것 같다.

내가 느끼는 감정을 숨기며 표현에 움츠려들게 되면서 나는 차분함을 학습했다. 

차분함은 감정을 어느 정도 감추어야 갖출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다 보니 긍정적인 감정도 부정적인 감정도 모두 자꾸 밖으로 드러내지 못한 채 혼자 개인소장하는 습관이 생겼다.

@grim_giyeok


내가 제일 무서워하는 건 나의 '감정 과잉' 상태이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자연스러운 감정 표현일텐데 내게는 그게 허용치를 초과한다. 아직도 나는 남들 앞에서 너무 들뜬 모습을 보이는 게 어색하고 남들 앞에서 우는 모습을 보이는 게 끔찍하게 느껴진다. 그래서 과음을 하지 않는다. 술을 너무 많이 먹으면 내가 가둬둔 감정 과잉의 또 다른 자아가 나오니까. 


근데 튀지 않으려고 최대한 감정을 절제한 거였는데, 오히려 그게 더 튀는 것 같다.

꽤 최근까지도 나는 주목공포증에 시달렸다. 누가 날 일제히 보고 있는 게 느껴지면 증발해버릴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사람들이 나를 안 좋게 생각하는 게 겁이 났고 우습고 만만하게 여길까봐 두려웠다. 그래서 배척당하고 괴롭힘 당하게 될까봐 무서웠다. 


처음 만나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모임에 갔는데 거기서 초면인 분이 내 얘기를 듣더니 말했다.

"자기 검열이 너무 심하신 거 같아요."

그말을 듣고 기분이 안 좋아졌다. 사실이기 때문이었다.


마음껏 감정을 드러내는 사람은 구김살 없는 사람이라는 걸 어른이 되고서 알게 되었다.

내가 늘 질투해왔던 건 밝고 명랑한, 감정표현을 잘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어느날 참 밝다고 생각했던 친구가 내게 말했다.

"나도 너처럼 말하고 싶다 생각했어."

정말 뜻밖의 말이었다. 나의 말투를 부러워하는 사람도 있구나.

오히려 나야말로 감정을 풍부하게 실어서 말할 수 있는 네가 부러웠는데...


좋은 기억만 가진 사람은 없겠지만, 나는 내 인생에 일어났던 안 좋은 일들에 특히 집중하며 살았다. 

어떻게 하면 재발 방지를 할 수 있을까에 많은 에너지를 쏟았다.

그래서 늘 마음도 안전하게 최소화해서 사람들을 대했다. 누구를 만나게 되도 내가 겪은 기억들을 소환하면서 '이 사람은 그런 기억 없겠지?'라는 생각을 했다.


나는 변하겠다고 다짐했다. 이불 밖은 위험하다고 생각하는 나를 밖에다 꺼내놓기로 했다. 

그렇지 않으면 내 인생에 어떤 변화도 안 생길 것 같았다. 

그냥 살던대로 안전하게만 살다가 한 걸음도 앞으로 못 나갈 것 같았다.

그래서 이제 더이상 나는 안전지대에 안주하고 싶지 않아졌다. 남이 어떻게 받아들이든 말든. 

내 행동이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느껴지든지 간에 정제하는 건 그만하고 싶어졌다. 

평가 당하는 게 무서워서 재고 따지다가 결국 관두자는 생각 때문에 결국 0의 상태에 머무는 것이 싫다. 

나를 꺼내 놓으면 누군가는 나를 욕하고 흠잡겠지만 그건 피할 수 없다는 것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무엇보다도 이제는 그만 숨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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