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공인 수화통역사 실기시험을 준비하는 당신께
지난 글에서 단어를 정확하게 숙지하는 게 중요하다고 했으면서 이번엔 단어 뜻에 얽매이지 말라니, 앞뒤가 안맞네 하는 생각이 드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기본적인 단어를 정확하게 숙지하는 것과 그 단어 뜻에 얽매이지 말라는 것은 서로 다른 층위의 문제입니다. 정확하게는 "한 가지 뜻에만 얽매이지 마라"가 되겠네요.
이 부분은 시험볼 때 음성통역, 필기통역에서 중요하게 평가되는 요소인 '단어의 호응, 맥락에 맞는 표현'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2부는 엄밀히 이야기하면 한국수어 실력 자체를 배양하기 위한 글은 아닙니다. 하지만 통역을 잘 하기 위해 알아두어야 할 점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수화통역사 시험에서도 다들 음성통역이 가장 어렵다고 하고, 필드에서도 수어통역을 하는 것보다 음성통역 하는 것이 어렵다고 많이들 말씀하십니다. 어느 정도 한국수어 실력이 갖춰져 있다고 가정했을 때 음성통역 실력은 한국어 실력에 좌우됩니다. 수화통역사 자격시험을 준비하면서 자칫 수어 공부에만 집중하고 한국어 실력은 등한시하게 될 수도 있는데요, 수화통역사는 수어만 잘 하는 게 아니라 한국어 실력도 좋아야 합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한국어-한국수어, 한국수어-한국어 통역사이니까요.
아래의 글은 한국수어->한국어 통역의 경우를 생각하며 설명했는데 아래의 설명을 반전하면 한국어->한국수어 통역에도 그대로 적용될 것입니다.
외국어 단어를 공부할 때 보통 어떻게 하시나요? 제가 공부할 때 썼던 영-한 단어장에는 단어 표제어 하나에 한국어 뜻 한 개, 뜻이 확연하게 다른 경우에는 추가적으로 두 개에서 세 개 정도까지 나와 있고는 했었는데요, 아마 다른 외국어도 비슷할 것입니다. 이렇게 공부하면 보통 객관식 시험에 출제되는 지문이나 외국어 원어로 된 글을 읽고 이해하는 데에는 무리가 없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내가 분명히 글을 읽고 이해한 지문이라고 하더라도, 이 지문을 본격적으로 한국어로 옮기려고 하면 조금 난감한 경우가 있지 않으셨나요? 난감할 뿐만 아니라 열심히 번역해 봤는데 글이 조금 이상해지는 경우도 흔히 있구요. 흔히 번역투, 번역체라고 하죠. 요즘 식으로 표현하자면 '구글 번역기 돌렸냐' 라고 하면 감이 확 잡히실 거예요. 요즘은 AI가 문장을 학습해서 많이 매끄러워졌다고는 하는데, 전문적인 소재나 생소한 글감일 경우에는 더욱 어색한 경향이 있습니다.
아마추어가 번역을 하거나, 구글 번역기를 돌렸을 때 왜 글이 어색해질까요? 물론 번역자가 출발어(영한 번역의 경우 영어)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경우도 많습니다만, 많은 경우 도착어(영한 번역에서의 한국어)를 부적절하게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번역기의 경우에도 (요즘은 맥락이 고려된다고 하지만) 일단은 대표적인 뜻을 중심으로 번역이 되고, 아마추어가 번역하는 경우에도 본인이 외우고 있는 1번 뜻이 무의식적으로 가장 먼저 튀어나오기 때문에 단어가 툭툭 튀어서 글이 어색해지는 것이지요.
이제 수어 이야기로 다시 돌아와서, 이 수어를 한 번 볼까요.
대부분 아시는 수어일 것입니다. '생각'이라는 수어인데요, 한국수어 사전의 한국어 대응표현에는 '생각, 견해, 사고, 신경, 의견, 의사, 의식, 여기다' 가 적혀 있습니다.
이 단어만 해도 사전에 등재되어 있는 한국어 대응표현이 8가지가 있고, 사전에 적혀 있지 않은 유의어가 무척 많겠죠. 일단 '생각하다'만 해도 사전에 적혀있지는 않으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어 단어를 외울 때, 암기장처럼 '이 수어는 생각, 이 수어는 생각...' 이런 식으로 대표적인 뜻 하나만 외워버리면 맥락상 견해, 사고, 신경, 의견... 등등이 나와야 할 때에 나도 모르게 '생각'이 툭 튀어나와 버리고 맙니다. 이렇게 되면 문장이 영 어색해지겠죠.
단어 공부를 할 때는 유연하게 하는 게 중요합니다. 어느 외국어나 그렇겠지만요. 위의 '생각'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단어들이 표제어의 뜻풀이 이외에, 사전에 등재되어 있지 않은 유의어를 가지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1번 뜻을 아는 건 당연한 것이고, 만일 한 단어가 2번 뜻과 3번 뜻이 있다면 그 뜻도 확실히 알아야겠지요. 그러고 나서는 1-1번 뜻, 1-2번 뜻처럼 유의어들을 숙지해놓았다가 맥락에 맞춰서 적절히 사용해야 합니다. 전 이러한 유의어들을 단어 주머니라고 부르는데요, 이 단어 주머니를 채우기 위해서는 분야와 관계없이 양질의 텍스트를 많이 읽고, 모르는 단어는 찾아보는 등 평소에 꾸준히 공부하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
조금 더 심화과정으로 간다면 유의어들끼리 공유하는 공통 의미와, 서로 다른 용례까지 알아두면 좋겠지요. 이 부분까지 완성된다면 단어간의 뉘앙스 차이를 표현할 수 있는, 실력있는 통역사가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