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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제 Sep 11. 2023

문장 수집: 장폴 뒤부아 장편소설 <케네디와 나>

절판된 책이라 학교 도서관에서 빌려 읽었다.


p. 9

나는 나 혼자만의 세계에 틀어박혀, 말하자면 아내와 세 아이와는 전혀 상관없이, 혼자 살고 있는 셈이다. 우리는 한집에 살지만 더 이상 같이 살고 있는 게 아니었다. 우리는 이른바 한 가족이라는 일체감을 잃어버린 지 아주 오래 되었다. 세월이 갈수록 우리의 감정은 파편화되어 조각조각 흩어졌다. 그렇다고 우리 중 그 누구도 각자 다른 세계를 찾아 떠나갈 만큼 똑똑하거나 용기가 있는 것도 아닌 채 서로 멀어졌다. 오늘도 한 집에 모여 보통 가족의 관습과 행태를 그대로 흉내 내며 정해진 시간에 함께 식사를 한다. 그러나 나머지 시간에는 각자 무엇을 하든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게 유일한 자존심이라도 되는 사람들처럼 서로 모른 체하며 지낸다.


 p. 44

“그렇게 질병 따위에 체념하는 태도를 보이지 마라. 병원균과는 정면으로 맞서 싸워야 한다. 몸에 들어와 있는 세균이 활동을 제대로 못하게 만들어야 해. 삶을 몹쓸 균 따위 때문에 낭비해서는 안 돼.”



p. 47

아내와 아이들이 모두 나갔다. 창자도 방광도 다 비우고 나서, 모두 노역의 의무를 다하러 갔다.



p. 51

쿠리아킨은 앙상한 얼굴에 배추 속처럼 빛바랜 안색을 하고 있었다.



p. 51

“폴라리스 선생, 권총을 산 사실을 왜 저에게 알려주고 싶었습니까?”

“그건 저도 모릅니다. 아마 솔직하고 싶은 욕망 때문이 아닐까요?”



p. 60

폴라리스 선생, 결국 그 날 저는 상인에게 상당한 값을 치르고 그 시계를 샀습니다. 그런데 제가 산 것은 시계가 아니라 의심이었다는 느낌이 듭니다. 끝을 알 수 없는 의심이죠. 그 뒤로 해밀턴 시계는 제 곁을 떠난 적이 없습니다.저는 그 시계를 잃어버릴까 봐 겁이 나서 손목에는 절대로 차지 않습니다. 바지 주머니에 넣어두고 왼손으로 항상 시계를 꽉 움켜쥔 채 지내고 있죠.



p. 66

그는 진찰실 밖에서 애인의 몸을 탐하는 일을 철저하게 금기시하고 있었다. 집의 문턱을 넘어서는 순간 그는 흠 잡을 데 없는 남편이자 아버지이자 비누 냄새와 깨끗한 물 냄새만을 풍기는 남자이고 싶었다. 그는 그러한 태도를 유지하는 것이 정신적 위생을 지키는 기본 원칙이라 확신했다.



p. 84

나에게는 점점 더 자주 무의미한 일들을 단편적으로 곱씹는 버릇이 생겨났다. 더 이상 길게 연결되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분명 내 삶이라는 것이 일련의 촌극, 무미건조할뿐더러 충분히 무시해도 좋을 그런 촌극의 연속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내 삶은 시시때때로 조각난 파편처럼 존재했다. 나는 기분 전환을 위해 의사에게 내 귀 속을 뒤지게 하거나 기억의 지층을 두드리게 했다. 나에 대해 관심을 가져준 것에 대한 대가로 의사에게 진료비를 지불할 수밖에 없는 궁지에 내몰리면서 말이다.



p. 95

“다만 아빠 나이에 아무것도 하지 않고 하루 종일 집안에만 틀어박혀 사는 게 이상하게 생각되긴 해요. 그건 건강에도 좋지 않아요. 아빠는 분명 예전과 많이 달라졌어요. 말도 잘 하지 않고, 언제나 뭔가에 정신이 팔려 있고, 눈에는 늘 근심이 가득하죠. 아빠는 집안 분위기를 이상한 쪽으로 끌고 가고 있어요. 나는 아빠 때문에 엄마가 얼마나 힘들어할지 분명히 알아요.“



p. 118

그녀도 다 컸고, 엄마는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살았다. 그건 엄마의 인생이었고, 어쩌면 그런 엉뚱하지만 사소한 실수가 인생의 바다에서 익사를 피하는 자신만의 방법이었는지도 모른다.



p. 135

브렌타노는 우리에게 치과병원 개업에 관한 계획을 이야기했다. 아주 재미있었다. 그는 병원 자리 구입부터 시작해 설비 작업을 할 때 건축사며 건물 회사와 벌여야 할 피할 수 없는 분쟁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마술사가 카드를 자유자재로 다루듯 그는 자신의 미래를 마음대로 계획하고 정리하고 절단했다. 나는 그가 계속 거드름을 피우며 말하기를, 젊음과 돈의 위력을 빌려 계속 떠들어대기를 기다렸다.



p. 137~138

내가 어떤 일을 해야 하고, 어떻게 살아야 하고, 무엇을 신경 써야 하는지 나에게 설명하려는 이들은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이제 겨우 어린 티를 벗어던졌을 뿐인데도 그들은 잘난 학위 증서를 발판삼아 집단 게임 같은 직업세계에 순응의 태도와 존경의 자세로 일관하며 기꺼이 뛰어들 것이다. 이제 겨우 스무 살인 젊은 아이들이 지나치게 돈에 집착하는 근성에 저마다 늙은이 같은 야망을 품고 있을 뿐인 것이다.



p. 140~141

오히려 상대에 대해 확신을 품지 않는 어떤 사람에게는 내가 어느 날 글을 쓰지 않기로 결정한 것이 단지 모든 것에 대해 의심을 품기 시작했기 때문이라고 친절하게 설명해줄 수도 있을지 모르겠다. 어느날 문득 나 자신에 대해, 내 글쓰기에 대해, 책으로 얻는 수입에 대해 의심을 품기 시작했다고…… 그런 문제에 대해 깊이 생각하기 시작했다면 그건 이미 생이 지금까지와는 다른 방향으로 기울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책을 낸다는 것은 최소한의 믿음과 자만, 맹목성이 요구된다. 그런데 나는 그렇게 에너지 넘치는 감정이 더 이상 생기지 않았다. 한 문장에서 다음 문장으로 진정해나갈 수 있는 생기나 순진함 따위가 내게는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았다. 기껏해야 이제 글을 쓸 수 없는 내 마비 증세를 묘사하며 초라하기 짝이 없는 내 삶을 시시콜콜하게 분석하는 일에 전념할 수 있을 뿐이었다.

그런 까닭에 젊은 상속자와 비슷한 부류의 인간이 왜 글을 쓰지 않는지 이유를 물어올 경우 나는 철저하게 그냥 게으름 때문이라고 말해버리고 만다. ‘이봐요, 친애하는 한스 씨, 나는 글쓰기를 절대로 우아한 일이라고 믿는 사람이 아닙니다. 내가 생각하기에 문법학자와 도요타 자동차의 판매사원 같은 전혀 이질적인 사람들 사이에서 태어난 잡종과 전혀 다를 바 없는 인간이 바로 소설가라는 말씀입니다.’ 나는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p. 152

그의 위협적인 어조에다가 모욕적인 말을 들으니 나는 다시 활력이 느껴졌다. 누군가가 이제 막 얼굴에 차가운 물수건을 갖다 대고, 짜디짠 소금 냄새를 맡게 한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었다.


p. 155~156

아직 한창 대낮이었다. 아이들은 곧 밀어닥칠 그들의 미래를 보장해 줄 것을 기대하고 있었고, 경찰서에 갇혀 있는 남편의 운명은 그녀의 손아귀에 들어있었고, 환자들은 당황항 채 그녀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지금 이렇게 질펀한 빛이 쏟아져 들어오는 방 한가운데서 한껏 느슨해진 모습으로 모든 일상의 걱정을 방치해버렸고, 이처럼 예기치 않게 겪고 있는 기상천외한 상황에 나른해하며 평온하게 담배 향기를 빨아들이고 있었다.



p. 168~169

안나는 자신의 무력감이 원망스러웠다. 문제를 뒤로 미룬 채 가능하면 보지 않으려고 애쓰는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사무엘에게서 처음 그런 증상이 나타났을 때 결코 소홀하게 내버려두지 말았어야 했다. 그가 혼자 더 이상 아무도 받아들이지 않는 자신의 세계에 깊이 처박히도록 내버려두지 말았어야 했다. 그가 혼자 된 세계에 빠져 자만하도록 내버려두지 말았어야 했다. 하지만 사람은 20년 이상 누군가와 살다 보면 마침내 더 이상 그를 알지 못하게 된다. 아예 그를 알아보지도 못한다. 그러다가 이따금 아주 오래 전 어느 짧은 순간에 겪었던 어떤 특별한 상황이나 특정한 하루를 기억나게 하는 표정이며 그 사람의 몸짓에서 예전의 누군가를 다시 발견할 수도 있다.

안나 바르보사, 아니 안나 폴라리스(지금 이 순간에 바르보사이든 폴라리스이든 크게 차이는 없다)는 불현듯 자신의 인생행로가 내리막길의 불안정하게 흔들리는 지점에 다다라 있다는 불쾌한 확신에 사로잡혔다.


p. 195

안나는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 전혀 여성적이지 않은 태도로 마치 남자처럼 옷을 벗었다. 하루일과를 마치고 나서 더 이상 누군가의 마음을 현혹시킬 힘이 남아 있지 않은 외판사원 같았다. 그녀 발치 아래로 옷들이 체념한 작은 뭉치가 되어 뒹굴었다.



p. 222

가족이 함께 저녁을 먹는 식탁에 거창하게 차려진 비현실적 세트 메뉴보다 더 우스꽝스럽고 부자연스러운 것은 없다.



p. 225

그녀가 생각하기에 한스는 분명 딸아이가 만날 수 있는 최악의 상대인 것 같았다. 그녀는 다만 바랄 뿐이었다. 어느 날 두 사람이 실제로 함께 살게 되더라도 사라가 유산 상속자라는 배경에 끌린 것처럼 필요에 따라 그 젊은 치과의사를 완전히 배신할 수 있기를……



p. 226

“한스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

“솔직하게 말할까? 멋진 미래가 보장된 운 좋은 멍청이.”



p. 231

그는 실제로 아무런 즐거움도 느끼지 않았지만, 그녀가 그에 대해 기대했던 것을 마침내 해냈다는 점 때문에 몹시 행복했다.



p. 231

그때 그녀는 뭔가 의례적인 인사말을 했다. 예컨대 ‘사라 부모님이신가요? 사라가 우리에게 두 분 말씀을 많이 했답니다.’라고. 그러고 나서 그들에게 손을 내밀었다. 손가락이 무기력하게 달려있는 게으른 손을……



p. 232

간단한 어떤 말이라도 부자연스럽게 여겨지는 그런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결코 그 따위 어휘를 입 밖으로 꺼내 말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할 수도 있다. 그 사람들이 어떤 상황이나 일상에서 흔히 사용하는 어휘와 지나치게 동떨어진 단어를 발음하는 순간 그 언어는 곧바로 금이 간 청동처럼 거슬리는 소리를 내는 것이다. 사무엘은 그런 어긋난 현상에 민감했고, 아주 관심이 많았다.



p. 234

선상의 승객들 대부분은 챙이 넓은 해변용 모자를 보란 듯이 쓰고 있었다.



p. 234

안나와 사무엘 폴라리스는 다른 손님들과 가능한 한 거리를 둘 수 있는 만큼 떨어져 있었다. 그들은 선상에 질펀하게 풍기는 오염된 분위기, 즉 뭔가 뽐내는 듯하고 억지로 꾸민 듯한 슬픈 기운 때문에 견디기 힘들었다.



p. 235

영국 속담에 ‘물은, 물은 어디에나 있으나 마실 물은 한 방울도 없도다.’라는 말이 있죠.



p. 245

나는 리디아가 드러내 보이는 슬픔이 실제인지, 아니면 자신의 무력감을 채우고 위로받기 위해 주변 사람들 앞에서 끊임없이 슬픔을 연출해내며 고통스러운 훈련을 강요하고 있는 것인지 판단할 수 없었다.



p. 247~248

나는 이런 시간,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고요와 아라비카 커피 냄새에 뒤섞인 담배 냄새가, 가전제품에 눈처럼 환한 빛을 주는 눈부신 햇살이, 우리가 말하고 난 다음에 찾아오는 전혀 어색하지 않은 긴 침묵이 참으로 좋았다. 앞으로 다가올, 온전히 내 것이 되려고 하는 낮이 나는 정말 좋았다.



p. 250

그녀가 ‘이제 끝났어, 겨울의 끝이야.’라고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그 말이 나에게 무한한 행복을 가져다주었다. 나는 모든 것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고 싶었다. 이제 결코 현기증이 나지 않았다. 이도 전혀 아프지 않았다.


p. 254

“폴라리스 선생, 누군가를 향해 총을 쏜다는 게 어떤 것인지 아십니까? 우선 귀를 멍하게 할 정도의 폭발 소리를 들어야 할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총기를 발사한 후 생기는 반동을 겪어야 할 것이고요. 코를 찌르는 화약 냄새도 마셔야 할 테고, 마침내 아주 잠깐일 뿐이지만 다른 사람의 눈빛, 이를테면 마개를 뽑아낸 세면기처럼 눈에 담긴 온갖 영상들이 순식간에 빠져나가는 그 망연자실한 눈빛을 마주해야 할 겁니다. 총을 맞는다면 근육 경련을 일으키고, 신경이 수축되고, 끊임없이 피를 흘리게 될 것입니다. 정말로 선생은 그런 광경을 보길 원하십니까?“



p. 256

나는 쿠리아킨의 병원에서 나오자마자 전속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나는 도망치고 있는 도둑이 아니라 과거를 피해 달아나는, 새로운 삶을 향해 바쁘게 돌진하는 사람이었다.

나에게는 이제 젊은 시절에 느꼈던 똑같은 활력과 용기가 있었다.

나는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뒤를 돌아보지 않았고, 손안에 시계를 꽉 움켜쥐고 있었다. 나는 곧장 대통령의 이니셜 옆에 내 이름을 새길 것이다.

제이 에프 케이/ 폴라리스.

케네디와 나.


집에 도착할 때쯤 숨이 찼다. 서둘러 주방으로 간 나는 커다란 컵에 물을 따라 마시고, 샤워를 하러 갔다. 수증기로 가득한 욕실에서 나오면서 나는 실제로 다른 사람이 된 듯한, 결정적으로 내 삶의 한 페이지를 넘겨버린 듯한 느낌이 들었다.



p. 260 (옮긴이의 말)

장폴 뒤부아는 한국판 ‘보그’(2006년호 6월호)지와의 인터뷰에서 그가 소설을 쓰는 것은 ‘사람이라는 직업’이 갖는 어려움에 대해서 쓰고 싶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결국 뒤부아의 관심을 끄는 유일한 문제는 어떻게 살 것인가이다. ‘글쓰기는 삶의 방식을 다루는 일이다. 나는 내 삶의 모든 것에 대해서 쓴다. 나는 멀리서 주제를 찾지 않는다. 나는 무엇이 되느냐보다 어떻게 살아가느냐를 중시하는 사람이다. 소설가가 된 이유도 간단하다. 나는 여유 있게 살고 싶었다. 경제적으로 그렇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시간적으로 말이다. 막상 소설을 써보니 소설 역시 어떻게 살아가느냐의 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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