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랑 같이 놀자!
조선미 선생님을 좋아하는데 [현실 육아 상담소]같은 책은 물론이고 방송에서 하는 육아 ·훈육에 대한 조언들이 와닿았기 때문이다. 아이의 트라우마, 원인을 찾는 것도 중요하지만 훈육과 육아란 걸 거창하게, 대단하게 바라보기보다는 그냥 엄마가 먹는 밥에 수저 하나만 더 놓고, 엄마의 패턴, 삶에 아이들이 따라오게 해주는, 습관을 만들어주는 삶 이런 말들에 용기가 솟았다.
-아, 내가 먼저 잘 살아야겠구나.
-아이들을 돌보기 이전에 내가 수저만 두 개 더 놓아도 되는 내 삶을 가꾸고 돌아봐야겠구나.
-아, 뭔가를 더 과장해서 표현하고 엄청난 노력을 하기보다는 '자연스럽고', '꾸준하게' 훈육의 태도를 가져야겠다.
선생님의 강연, 책 덕분에 현실에서 나를 좀 더 돌아보게 됐고 위로와 용기도 얻었다.
요즘 아이들은 특별한 문제가 있거나 그렇지도 않은데 먼저 다가가서 놀고, 친해지는 방법을 잘 모르는 것 같아요. 성격이 지나치게 내성적이거나 소심한 것과는 또 다른 이야기죠. 놀이에 대해서 어린 시절, 놀이터에서 놀면 같이 흙을 뿌리거나 던지거나 이러면 싫어하는 애는 피해서 또 다른 데 가서 놀고 그러면서 다르게 놀고 어울리고 하는 법을 배우는데 지금은 이미 엄마가 정해준 '친구들'과 어울리고 그 테두리 안에서만 놀다 보니까 어떻게 누굴 사귀는 방법을 잘 모르는 거죠.
또 엄마들이 아이들의 삶 전반에 지나치게 같이 놀아주고 함께 해주는 시간들이 독이 되기도 한다는 걸 강조했다. 물론 예전보다 한 가정당 자녀들이 한 명 이거나 혹은 두 명인 경우가 많으니까 그만큼 친밀감을 쌓고 엄마와 친구처럼 속을 터놓고 지내는 게 나쁘다는 게 아니다. 하지만 이런 '거절'과 '수용'의 개념, 자연스러운 터득은 엄마가 절대 쌓아줄 수 없는 '경험적인'부분이란 이야기다.
나 역시 큰 아이 때는 아이가 잘 어울리고 친해지려고 다가온 사람들과 자주 어울리고 함께 약속을 잡았다.
'공동육아'를 하면서 날마다 돌아가며 누구네 집에서 어울리고 계획을 잡고 이벤트를 열어주고 그땐 우리 아이 역시 둘째가 태어나기 전에 외동이었으니까 아이에게 쏟는 충분한 시간에 충실한 것만이 나의 자랑이고 기쁨이었던 시기다. 아이에게 돈을 쓰고 시간을 쏟아주면 뭔가를 해낸 것 같다고 생각하고 그 자리에 있어 주는 게 때론 스트레스일 때도 있었지만 그것만이 '최선'이라고 생각한 것 같다.
물론 아이 덕분에 나 역시, 좋은 사람들을 만나고 친구가 생기기도 했다. 상황을 이야기하는 거지, 어떤 사람들과의 '관계'나 소통을 후회한다는 건 아니다.
돌아보면 그렇지 않았던 것 같다. 우르르 같이 몰려있는 매일의 시간 속에서 알게 모르게 태도로 지적도 당하고 비교도 당하고 크고 작은 다툼 속에서 엄마에게 혼나서 사과를 강요받기도 했고 누군가 혼자 소외된 아이를 챙기라는 종용을 받기도 했다.(물론 지나친 나의 간섭, 민감한 태도가 독이었다)
오히려, 그냥 아무 날, 아무 일도 아닌 날 하원하고 나서 잘 모르는 낯선 친구랑 놀이터에서 노는 걸 더 좋아했던 아이. 이십 분, 삼십 분 되는 짧은 시간을 까르르 웃으면서 그 친구와 잡기 놀이도 하고 간식도 나눠 먹으면서 더 놀고 싶어서 엉엉 울었다. 그때 내 마음은 어땠냐면
-원래 편하게 놀았던 애가 아니니까, 따로 또 할머니를 통해 부모님 전화번호를 받고 복잡하다, 복잡해. 이렇게 오늘 하루 놀면 되지, 원래 놀던 사람들과 있는 게 더 안전하고 편안하겠지.
내 속마음과 태도 역시 이랬던 것 같다. 아이의 '놀이', '친구 관계'의 주체 역시 나 위주는 아니었을까.
나 역시 이미 만들어지고 내 편이 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하고만 어울리는데 안주했던 건 아닐까.
아이들의 기질마다 다르겠지만
야, 나랑 같이 놀자.
이 말을 꺼내기까진 어마어마한 용기가 필요하다. 우리 어른들도 다 컸지만 새로운 사람에게 조금 호감이 있다는 이유로
이렇게 적극적으로 말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데. 어쩌면 이건 기질적인 성향도 조금 포함된 일인지도 모르겠다. 첫째 아이는 먼저 이런 말을 하기도 전에 엄마가 이미 놀이터 안에서 친구도 만들어주고 주변 사람들, 환경과 약속까지 다 잡아준 탓인지 초등학교를 갈 때가 돼서도 걱정이 앞섰다. 다섯 살 때부터 글자도 쓰고 책도 많이 읽어서 똑소리 난 것 같지만 뭘 해도 불안한 첫째 마음, 사실 불안하고 걱정스러웠던 건 늘 내 마음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놀이터, 흙 뿌리고 놀기에서 떠오른 건 둘째 선율인데 조선미선생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선율이 생각이 많이 났다.
나랑 좀, 놀자.
같이 놀까?
놀아줘!
쫌 같이 껴주라!
선율이 덕분에 어딜 가나, 이 말을 제일 많이 들었다. 스스럼없이, 과감하게 어딜 가나 들이댔다. 이렇게 들이대면서 말하는 아이들이 별로 없다는 게 놀라울 지경이다. 사실 요즘 아이들은 지난날의 나처럼 어른들부터 낯선 아이들을 경계하고 있다.
심지어 키즈카페에 갔는데 사람들이 낮 시간이라 그런지, 네 명뿐이어서
"와 사람 없다. 혼자 실컷 놀겠네!"라고 했더니 사람이 없어서 실망한 아이 표정이 거의 울상에 가까웠다.
그 와중에도 아이들을 데리고 온 어떤 아빠가 자기에겐 공을 던져주지 않아서 구석에서 울면서 흑흑거리고 통곡하는 게 아닌가?!
아이고, 선율아, 그 아빠는 자기 아이들하고도 노느라 바쁘잖아. 너는 엄마랑 또 놀면 되지, 원래 자기 아이랑 놀고 공 던지기 하고 그러려고 여기 온 거야.
내 말에 선율이는 반박했다.
그전까지는 거절당해도 으쓱하고 다른 곳에 가서 또 다른 사람들을 찾아 "같이 놀래? 나 따라와 봐."를 어디서나 당당하게 말하는 아이였는데, 아마도 저 날 처음으로 거절의 아픔을 제대로 알았던 것 같다.
신기했다. 얘는 내가 먼저 누구를 찾아주고 만들어주고 약속을 잡아주지 않아도 왜 이렇게 친구를, 사람들을, 낯선 사람들을, 놀이터를 좋아하지? 뭐가 다른 거지?
**결론은 하나 : 엄마가 먼저 아무것도 인위적으로 해주지 않고 기다려줬다. 혼자 어딜 가거나 누구한테 다가가도 지켜보고 기다리고 있을 뿐, 말문이 터지고 행동하고 나아갈 때 따로 제약이나 어떤 조건이 없었다. 중학생, 고등학생 형들이 축구를 하거나 농구를 해도 자기가 하는 것도 아닌데도 그냥 마구 달려들어서 공을 차려고 하고 슛을 던지려고 하는 아이, 그런 아이 때문에 곤란해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닌데도 반응은 한 결 같았다.
"같이 해도 돼요. 어서 와, 너도 한 번 차!"
운동을 하는 형아들의 반응은 환대였다. 재경험을 통해 아이는 허용의 범위, 너른 품을 알았던 걸까. 자기 생일이 아닌데 형아 생일인데도 자기 친구들을 초대하고 자기가 먼저 원에 가서 물총놀이를 하거나, 약속을 잡아서 친구들끼리 만나자고 전달을 한다. 이제는 한 단계 더 진화해서
"엄마, 내가 이렇게 약속을 잡았으니까 이제 어른들이 시간, 장소를 잡아서 알려줘."
당당하게 말한다.
몇 번의 교육 끝에 '엄마가 엄마들끼리 약속을 잡아야 아이들도 만날 수 있는 시간과 기회가 생기는 거야'라는 교육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다.
그럼 어떡하냐고? 잡아줘야지 뭐. 피할 길이 없이 아이의 순서를 따르고 규칙을 따른 절차를 호응해 주는 게 내 일이다. 모여서도 만나서도 참말로 잘 논다.
무수한 거절 끝에도 다시 사람을 찾아서 친구를 좋아하는 아이, 다른 집 아빠가 자기랑 안 놀아주고 눈도 한 번 안 마주쳐줬다고 흑흑거리고 우는 아이(아이고;;), 누나들이 안 껴주면 형아한테 가고 자기랑 잘 놀아주고 자기를 예뻐해 주는 사람을 기가 막히게 잘 파악하는 아이, 또 막상 혼자서 놀아도 안 심심해 보이는 아이.
사실, 혼자 있어도 잘 논다는 점이 가장 큰 강점 같기도 하다.
사실 그래서인가 별 걱정이 안 된다. 글씨도 제대로 모르고 책도 이제야 읽기 시작했지만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데 불안과 공포보다는 늘 기대가 넘쳐 보여서 부러울 때도 많다.
훈육을 우리는 보통 '혼내는 거, 야단치는 거'라고 생각할 때가 많은데 훈육은 습관을 만들어주고 가르쳐주는 과정이다. 바람직한 행동 습관을 형성하고 부적절한 게 있다면 교정해 주면 된다. 어쩌면 화가 나서 매를 들고 혼내는 건 그 순간에만 아이를 잠시 주춤하게 할 수는 있어도 다음 날, 말짱 도루묵, 혹은 역효과가 날 수도 있다. 이걸 아는데도 화를 못 참는 순간들도 또 얼마나 많은지 모르겠다. 수백 번의 야단보다 수천 번의 교정해 주는 말이 더 힘들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나 역시, 훈육을 피해서 좀 더 빠르고 쉬운 길을 찾았는지도 모르겠다.
어떤 순간, 상황에서 나에게 귀한 사람이 다가왔다면 놓치지 않는 것도 참 중요하다. 그런 순간에 자연스럽게 잘 어울리고 스스로 만든 '친구'라면 그보다 더 뿌듯하고 든든한 자랑이 또 있을까. 내성적인 성격이나 내향인, 소심함으로만 말할 수 없는, 이미 친구 없어도 엄마가 다 채워주는 자리인 걸 뭐, 하는 상황은 너무 슬플 것 같다.
아이가 좋아하는 친구가 엄마의 취향, 생각과 전혀 다를 수도 있다. 그럼에도 아이는 스스로가 고른 친구에게 애정과 사랑을 느끼고 고난의 시간도 고민의 시간도 거치면서 '책임'과 우정에 대해서도 배울 수 있을 것이다. 결국 모든 걸 '스스로'거쳐야 성장해 나가는 게 아닐까. 언젠가 심 선생님께서 "꽃길만 걸으세요"라는 말이 싫다고 했는데 아마도 현실에 없는 말이기에, 아니, 세상은 꽃길만 걸을 수 없기에 곰곰이 생각해 보니 나도 그 말이 싫어졌다. 고난과 아픔, 수많은 거절, 힘든 과정이 있어야 사람은 소중한 가치를 배워가고 진짜 웃을 수도 있으니까.
꽃길만 걸었으면 하는, 특히, 자식이 꽃길로만 착착 더 잘 걸어줬으면 하는 마음은 어느 부모나 마찬가지일 거다. 하지만 부모이기 때문에 더 잘 안다. 자식은 원래 내 맘대로 내 뜻대로 하지도 않지만.
세상이 온통 꽃길이 아니듯이, 가시밭길과 눈물과 아픔을 통해, 성장하고
고통 속에 기쁨을 배워가는 게 더 가치 있는 삶이란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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