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듣고 싶은 따뜻한 말
말에도, 혹은 글에도 온도가 있다면 내 말의 온도는 과연 몇 도쯤 될까?
앤나우님의 말씀(혹은 문장)은 36.5도 같아요. ^^ 응원 감사합니다!!♥
어제 함께 글 쓰는 모임 방에서 스타티스작가님께 받은 답글에 웃음이 새어 나왔다. 인간적이라는 이야겠지.
다정하고 따뜻한 사람이 되고 싶은데 그걸 가장 많이 채워야 할, 채우고 싶은 가정 안에서 부모님께 그런 말을 들으며 성장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굴복하고 쭈구리로 있을 성격이 아니기에, 누군가에게 이쁨 받고 싶어서 *언어와 문장으로 채워져야 할 욕구가 큰 아이 었기에, 주변 어른들에게 먼저 다가가 관심도 표현하고 솔직하게 내 생각을 말하기에 주저함이 없었다. 나는 내가 듣고 싶은 '따뜻한 말'이 고팠기에 먼저 따뜻한 말, 내가 들었으면 하는 말을 건네는 사람이 됐다. 그래, 고작 말 뿐이었는데 그렇게 자라다 보니 감정이 많고 풍부한 사람, 다정한 사람이 된 것도 같다. '다정도 병인 양하여' 고려시대 이조년의 시조 '다정가'는 나를 콕 찔러 이야기하는 것 같았기에 늘 찌르르, 내 마음에 콕 박혔다.
다정도 병인 양하여 잠 못 들어 하노라
-이조년 다정가 《多情歌》중에서
겨우 한 살 터울이지만 우리 언니는 나에게 따뜻한 말로 제대로 아픈 마음을 씻겨줄 정도로 엄청난 온수를 콸콸, 아낌없이 뿌려주는 사람이다. 언니는 나처럼 수다쟁이 타입은 아니었는데 속상하거나 화나는 일이 있을 때마다도,
-에구, 속상했겠네. (절대 그 상황에서 상대방을 험담하지도 않는다) 어쩜, 그런 일이. 얼마나 슬퍼.
-나는 그래도 네가 있어서 참 좋아.
-네가 있어서, 네가 내 동생이라서 얼마나 자랑스럽고 기쁜지 몰라. 태어나줘서 고마워.
-엄마 · 아빠가 나만 혼자 덩그러니 세상에 나오게 한 게 아니라 너처럼 재밌고 귀여운 동생을 줘서 참 감사해.
-내 동생, 아침잠도 많은데 자는 걸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애가 자기보다 더 귀한 애기 키운다고 밤중 수유 하고 그대로 앉은 자세로 잠드는 거 보니까 너무 마음이 아프더라. 눈물도 나고. 얼마나 힘들어.
-힘들지? 넌 정말 대단해.
-네 마음이 아팠다면, 내가 정말 미안해.
어쩌면 무뚝뚝하고 언어보다는 생활의 힘으로 나를 키워주신 부모님이 계셨다면 따뜻한 말로 채워준, 내가 부모님에게 듣고 싶었던 모든 말은 우리 언니가 가장 많이 쏟아주고 해 줬던 것 같다. 언니는 어쩜 저렇게 말을 예쁘게 할까. 언니의 말은 듣기만 해도 위로가 되고 화가 나서 씩씩 거리고 분노를 주체할 수 없다가도 눈이 스르륵 녹듯, 내 마음을 부드럽게 풀어줬다. 상처받고 너덜너덜 나약해지고 눈물이 뚝뚝 흐를 때면 언니를 찾았다. 너무 먼 거리, 비행기로도 12시간 떨어진 영국에 사는 언니를 붙잡고, 낮과 밤이 정 반대로 흘러가는 언니에게 눈물이 터진 순간을, 화가 난 내 심경을 이야기하곤 했다.
그때마다 한 번도 투정 없이 내 이야기를 잠잠히 들어주고 도닥여주는 그 목소리가 참 좋았다. 요동치다가도 이내 나쁜 말을 내뱉었던 오초 전 내 모습이 후회스러울 정도로 언니의 말은 나를 진정시키는 역할을 했고 마치 서슬 퍼런 칼을 보관하는 칼집에 철컥하고 칼날이 갇히는 것처럼 더 이상 나쁜 생각이 들지 않았다.
언젠가 영글음 작가님이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이야기를 하며, 친정어머님과 잠시 나눈 이야기를 들려준 적이 있는데, 아 …! 내가 듣고 싶었던 따뜻한 말이 바로 저런 말이었구나, 고개를 끄덕끄덕 하다가 갑자기 눈물이 삐져 나왔다.
밤중에 할 일이 태산인 딸이 설거지도, 밀린 집안일도 잔뜩인데 엄마에게 하소연을 하니 어머님께서
-그냥, 자. 아무것도 하지 말고 그냥 자. 설거지도 집안일도 다 내일 하고 먼저 자.
딸이 정말 하고 싶은 거, 그걸 먼저 했으면 하는 친정 엄마의 마음이 고스란히 전달되는 것 같았다. 살림도 육아도 마땅한 엄마의 몫이고 책임이지만 딸이 그거보다 하고 싶은 글을 쓰고, 벅차고 힘들 땐 조금 쉬어가라는 이야기.
아, 나는 어쩌면 저런 말을 듣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바로 우리 엄마에게 실험(?)을 했는데 전화기를 타고 날아오는 잔소리는 나의 예상을 빗나가지 않았다.
부족하고 게으른 내 살림 실력에 대한 핀잔과 '네가 뭐가 힘들다고 그러냐?' 잔소리가 이어질 즘 끊어놓고 그냥 해본 소리였어, 엄마 반응 좀 보게, 머쓱한 상황.
평소에도 엄마에겐 유독 투덜거리고 불평을 달고 살아서 그런가, 아니면 뭔가 원하는 따뜻한 말 한마디를 못 들어서 어딘가 좀 삐뚤어진 사람이 된 걸까, 뭐가 먼저인지는 모르겠지만 가슴이 아파서 비수가 되는 대부분의 말을 엄마를 통해서 들었다는 것을 알았고 엄마의 삶은 나와는 뭐가 그리 달랐을까를 생각해 보기 시작했다.
아이를 낳고도 일을 한 번도 쉰 적 없이 지금도 더운 날도 추운 날도 직장에 나가고 해야 할 일과 자기 몫을 해내는 것에 자부심이 있는 울 엄마. 워킹 맘이었지만 요리도 살림도 다 잘해서 음식도 척척, 빨래를 개고 청소를 하고 갖춰져 있는 모든 것에 희생하면서도 그걸 힘든 내색 없이 묵묵히 다 감당하고 살았을 엄마 눈에는 내가 힘들다는 말이 잘 와닿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아, 그러면서 기미 주근깨 주름, 몸매관리까지 가꾸는 것에도 게을리하지 않는데 늘 놀이터에서 아이 잡으러 뛰면서 얼굴은 온통 깨순이가 되고 옷도 찢어진 청바지 차림의 내가 엄마는 좀 속상하셨던 것도 같다.
사람은 전부 자기 삶과 기준에서 생각한다. 나도 어쩌면 내 세계 안에 갇혀서 내가 받은 상처나 아픔을 먼저 생각하느라 한 번도 따뜻한 말을 듣지 못한 우리 엄마에게 반대로 똑같이 모진 말을 그대로 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찌르는 말이 되느냐, 품어주는 따뜻한 말이 되느냐 이건 순전히 내가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데 나는 이 부분이 참 좋다. 자라면서 나 역시, 나를 격려해 주는, 응원해 주는, 기운이 퐁퐁 솟는, 혹은 눈물이 더 콸콸 나게 해주는 많은 격려와 응원의 따뜻한 말들을 들으면서 자랐다.
며칠 전에 엄마와 다툰 이야기를 꺼냈을 때도 심선생님과 혜진쌤 앞에서 엉엉 울었을 때 혜진쌤이 나에게 건넨 한 마디는 별 말이 아니었는데도 내 마음을 울렸다.
나경쌤은 정말 정말 좋은 사람이에요. 그러니까 다, 모두 다 나경쌤이 맞아요. 뭐든 나경쌤이 하고 싶은 대로 하세요.
아주 예전에 《가족이 병》이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었는데...
"가족이라서 …"로 생략되고 무시되고 간과하는, 요구하는 것들이 엄청 많다는 내용이었어요.
그래도 가족이니까 회복되고 회복할 테지만, 세상 무엇보다 '박나경'이 제일 중요합니다. 충분히 육아도 살림도 공부도 잘하고 있고, 저는 세상을 사람을 즐겁고 행복하게 바라보는 선생님이 참 좋아요. 배울 점이라고 느끼게 해주는 사람, 고마운 사람.
그냥 나를 인정해 주는 말, 지금 내 행동을, 내 말과 생각마저 지지해 준다는 말을 들으니 다시 한번 잘 살고 싶어졌다. 지금 당장의 관계 회복도, 어떤 답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나에겐 그 말이 있는 그대로의 힘이라는 걸 다시 한번 느꼈다. 나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가 주는 힘은 다시 오늘을, 내일을 또 살고 싶어지게 하는 '용기'그 자체가 아니었을까.
며칠 전 우연히 TV로 『빨강머리 앤』을 보는데 하필이면 매튜 아저씨가 은행의 파산 소식으로 그대로 심장마비로 충격을 받아서 돌아가시는 장면이었다. 가슴 아프고 슬픈 장면, 앤은 정신없이 우는 마릴라 아주머니를 대신해 이것저것 장례에 필요한 절차를 준비하고 슬퍼할 겨를도 없이 눈물 한 방울 흘릴 새도 없이 묵묵히 담담하게 일을 처리한다. 매사에 감정이 빠지고 무뚝뚝하고 냉소적이기까지 했던 마릴라 아주머니는 '오라버니, 오라버니'를 부르며 눈물이 마를 새 없지만 감상적이고 상상력이 풍부한 앤은 눈물조차 나지 않는 상황에 스스로도 당황한다. 그때 함께 있어주겠다는 다이애나의 청을 거절하고 앤은 조용히 창가에 앉는다.
그제야 떠오르는 매튜 아저씨의 빈 의자, 앤을 위해 웃어줬던 미소, 자랑스러운 내 딸이라는 더 이상 들을 수 없는 목소리가 생생하게 떠오른다. 매튜의 파이프, 농장에서 일하고 겉옷을 벗어뒀던 장소, 앤은 그렇게 자기만의 공간에서 흐느끼면서 매튜아저씨를 추모한다. 잠들었던 마릴라는 앤의 통곡 소리에 얼른 뛰어 올라와서 앤을 껴안고 토닥여준다. 울지 마, 착하지, 앤.
-아주머니, 다이애나가 함께 있겠다고 했지만 전 거절했어요. 이것은 제 슬픔이지, 다이애나의 슬픔이 아니거든요. 이것은, 이 슬픔은 저와 아주머니의 것이에요.
앤 셜리, 이런 상황에서 나도 내가 이런 말을 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이런 날이 오지 않으면 나도 못 꺼냈을 말이다.
나는 네가 이 초록 지붕으로 온 이후부터
오직 너만이 내 유일한 기쁨이자 웃음이었단다.
때론 가장 다정한 말이, 따뜻한 말이 가장 아픈 순간에 터지는 아이러니도 있다. 그게 너무 슬프면서도 마음껏, 부둥켜 껴안고 울 수 있는 두 사람이 부러웠다. 단단하고 속 깊은 연대가 멋있어 보였다.
어렸을 때 동네 골목에서 매일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나, '꼭꼭 숨어라' 놀이를 하면서 지냈는데 그때 달아나는 중에도 맨날 넘어지고 어느 날인가는 아주 어렸을 때인데 무릎에서 피가 엄청 많이 난 적이 있다.
그때도 자주 넘어져서 오면 엄마는
-수수팥떡도 때마다 해먹이고 생일상에 올렸는데 왜 자꾸 넘어지지?
넘어진 내 행동을 탓했는데 그날은 생각보다 아프고 피가 많이 나서 절뚝절뚝 놀이 중간에 집으로 가는 길마저 힘겨웠다. 엄마는 상처를 꼼꼼하게 닦아주시면서 아주 커다란 딸기를 내밀었는데 그때 해주셨던 말이 아직도 내 마음에 남아있다.
-이건, 너한테만 주는 거야. 알지? 언니한테 맛있는 딸기 먹었다고 하지 마. 비밀이야. 쉿! 맛있는 거 딸기 먹고 얼른 다 낫자. 이제 그만 울어.
나에게도 다정한 말을 해주는 엄마도 분명 있었다. 그때 먹었던 딸기가 참 달았던 것 같다.
나에게 따뜻한 말은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나에게만 건네는, 특별하고 상큼한 작은 위로, 달달한 딸기와 같다. 우리 아이들에게 나도 이렇게 따뜻하고 다정한 말로 채워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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