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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를 다루는 법

손이 베었다

by 앤나우

그날따라 무슨 바람이 불었던 걸까. 그냥 시원하게 오이냉국을 한 그릇 들이키고 싶다는 생각에(무지무지 더워서 땀으로 온몸을 코팅한 듯하고 외출했다 집으로 돌아오면 땀범벅에 화장이 흘러내려서 눈 아랫부분이 벌게져있었다. 뭐 대단한 화장은 아니고 기초로션에 선크림을 바른 게 전부였지만. 처참한 기분 + 더위에 녹초가 되기 일보직전) 착착착 쵹쵹쵹 요렇게 오이를 썰어서 냉장고에 차갑게 보관해 두면 더운 날 꿀맛이겠지? 엄청나게 차갑고 신맛을 상상하기만 해도 벌써 침이 고였다. 하나 간과한 것 하나가 있으니 …


"착착 착착 으악!!!"

내가 칼질이 서툴다는 사실이었다.


아마 "챡챡"거리는 것도 상상의 소리일 뿐 실제로는 또... 각, 투칵 이런 소리가 아니었을까 싶다. 오래간만에 먹고 싶은 요리를 하고 싶었던 건데, 왼쪽 엄지 손가락으로 오이를 잡았던 손이 미끄덩, 칼날이 엄지 앞부분을 스쳤다. 오이 위로 피가 후드득 떨어졌다. 순간 드는 생각은

-아니, 뭔 칼질도 이렇게 못해!

*내가 해놓고!

-먹겠다고 설칠 때부터 알아봤다. 누가 쫓아오냐고, 뭘 그렇게 서둘러.

*서두를만했다. 방학을 맞은 아이들 밥도 차려주고 픽업도 해야 하면서 동시에 쌓여있는 빨래도 개면서 내가 먹을 요리는 따로 냉장을 미리 해놓아야 했으니까.



알 수 없는 비난과 원망이 나로 향했다. 열받았다. 연장 탓을 할 순 없었다. 연장(칼)을 다룬 내 손이 문제였던 거지, 평소에도 칼질을 잘 못해서 신중하게 꽤나 집중해서 써는 편이기에 손을 다친 경우는 별로 없다. 오히려 요리를 잘하는 엄마가 자주 챡챡챡 써는 와중에 자주 손 베는 걸 보고 자라온 탓에 칼을 다루는 요리가 무섭기도 하고 느리더라도 천천히 집중해서 써는 게 목표였던 난데. 미끌미끌한 오이한테 욕을 할 수도 없었다. 무엇을 탓하리, 그냥 상황이 짜증 나니 자꾸만 비난의 화살이 나에게로 꽂혀버리는 걸 느꼈다.


내 비명에 두 아이들이 깜짝 놀라서 따라왔다. 수건을 건네주려 하고 휴지를 둘둘 말아오고 누가 어른이고 애인지;;; 우왕좌왕하면서 일단 급한 대로 지혈을 하고 꼭꼭 동여매고 남은 오이를 썰었다.


-엄마, 그냥 오이 먹지 마요. 피도 나는데, 피나는 오이를 왜 먹어요?

-피나는 오이는 버리면 되지만 오이는 죄가 없어. 엄마 손가락이 문제였어.




진짜 손에 상처 난 이야기다.




왼손 엄지손톱 오른쪽 바로 위로 길게 상처가 벌어진 게 보였다. 상처가 길진 않았는데 깊어 보였다. 나는 상처를 다루는 법을 잘 모른다. 아까도 말했다시피 손을 칼에 벤 적이 별로 없기도 하고 주로 나는 상처들은 멍이 들거나, 무릎이 다치거나 장이 꼬이거나 그런 것들이라, 이런 자잘하지만 신경 쓰이는 상처들이 참 불편했다. 대충 집에 구급함에 보이는 연고를 듬뿍 발라놓고 어떻게 해서든 이걸 감싸려고 요리조리 밴드를 붙였는데 이지덤같은 흡착 테이프로 고정하고 싶어도 손톱과 바로 닿은 부분이라 참 애매했다. 결국 상처 나지 않은 다른 부분까지 뭉뚱그려 둘둘 감싸고 떨어지지 않게 단단하게 동여맸다. 덕분에(?) 생각보다 큰 엄지를 가지게 됐다. 물이 안 들어가게 하는 게 최선이겠지? 일단은 여기를 비닐장갑을 껴고 고무밴드를 손목에 채우고, 이런 계획을 하면서 스스로 기발하다고 생각했다. 이틀까지는 견딜만했다. 비닐장갑도 불편해서 랩으로 엄지를 싸고 테이프로 둘둘 감으면서 머리를 감았다. 그러다가 문득,



원래 상처를 이렇게 다루는 게 맞나?



어렸을 때도 밴드에 오래 붙여있었던 상처 자리만 하얗게 되거나 밀폐된 부위엔 꼬릿꼬릿한 냄새가 났는데, 이 사실이 떠오르자, 방법을 바꾸고 싶었고 이틀이 지나서야 상처가 난 밴드를 칭칭 감았던 순서대로 다시 낑낑거리며 벗겨보았다. 허옇게 뜬 엄지손가락, 빛도 공기도 통하지 않아서 새하얗게 질린 얼굴 같은 엄지에선 알 수 없는 이상한 냄새도 나는 듯했다.

아흑, 이게 뭐야. 병원 갈 정도로는 아니었어도 오랜만에 요리하다 피 본 게 무서워서 감싸기만 했는데 아문 건지 뭔지, 주변엔 피자국이 그대로 남아있기도 했다. 쓰라리지만 다시 소독을 해주고 그날 밤에 잘 때는 공기가 통하도록 밴드를 붙이지 않았다. 그냥 조심조심 살살, 이불에 손이 닿지 않게 좀 더 신경 써서 바람을 통하게 해 줬다.


다음날, 만져봐도 별 다른 통증이 없는 것 같아서 다 나았나 하고 다시 맨 손으로 머리를 감는데 계속 찌릿찌릿 물이 닿을 때마다 아팠다. 살짝 벌어진 사이로 물이 들어간 건지, 샴푸가 들어간 건지, 아파서 눈물이 찔끔 났다. 후다닥, 결국 샤워하다 말고 물이 뚝뚝 흐르는 채로 다시 엄지를 칭칭칭 동여맸다.



별 거 아닌 상처가, 사람을 다 거슬리게 하네, 거참...



하다가, 갑자기, 마음에 남은 상처들은 내가 어떻게 다루었나, 그것도 별반 다르지 않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번쩍 들었다. 무슨 말이냐면 너무 꽁꽁 동여매서 상처라고 감춰두고 물도, 빛도, 공기도 닿지 않게 하는 게 최선은 아니라는 거.




손에 상처로 잠깐 스치든 베었던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다.

진짜 상처를 다루고 싶은, 상처에 대한 생각을 기록하고 싶었다.




들여다보기 싫어도 피하는 게 아니라 어떤 상처인지 마주 보고 갈라진 틈이나 깊이에서 더 필요한 게 뭔지 생각해봤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걸 발견했을 때, 오히려 적당한 빛과 공기에 노출돼서 거기에서 자연스러운 회복이 있을 수도 있다. 나도 모르는 사이 회복이 된다면 기쁘겠지만, 시큰시큰 욱신욱신 '진짜'상처에 대한건 얼마나 아프고 불쑥불쑥 예상치 못한 순간에 다시 스멀스멀 신호를 줄까. 꽁꽁 참고 견뎌내지 않아도 시간이 흐르면서 새살이 돋고 상처는 더디지만 서서히 아물 준비를 한다. 이 사실은 그냥 좋은 신호도, 위로하기 위한 거짓도 아닌 '진실'이다. 모양과 흔적을 남기고, 어떤 자리 나 자국이 되기도 하지만 아문다. 천천히 느리지만 아물 수밖에 없다. 시간은 흐르니까.



그럼, 다 나았다고 생각하고 너무 빨리 "나 괜찮아!" 외치는 건 정말 괜찮을 걸까?



그것도 역시 아닌 것 같았다. 괜찮아진 것처럼 보여도 상처가 깨끗하고 온전히 나을 때까진 좀 더 기다림이 필요하다. 살짝 눌러봐도 손에 별다른 반응이 없고 찌르르함이 사라진 거 같았을 때 내가 제일 먼저 하고 싶었던 건 그냥 맨손으로 머리를 감고 씻는 거였는데 그걸 빨리 하고 싶어서 서두른 탓에 다시 샤워 중간에 물을 뚝뚝 흘리면서까지 손가락을 동여매야 했다. 아주 작은 상처라도, 그걸 간과하고 가볍게 지나치듯 해서도 안된다. 시간이 필요하다.


아니, 아까는 아문다며? 시간이 흐른다며?


안타깝게도 아물기까지의 시간은 내가 정하는 건 아닌 것 같다. 그만큼 괜찮아질 준비가 되기까진 시간의 몫이어서 나도 모르게 '상처'에 대해 잊을 정도로 다른 걸 몰입해서 웃는다던가, 다시 뭔가를 기웃거리는 관심이 생긴다면 그땐 주저하지 않길,



손가락에 밴드 하나를 떼는데도 참 후련했다. 사선으로 죽 그어진 칼자국 하나가 훈장같이 느껴졌다. 무심히, 무심코 지나갔던 모든 곳에 신호가 있고 삶이 담겨있는 듯했다.








이건 그냥 쿠키 같은 뒷 이야기 : 뜨거운 요리를 꺼내거나, 식탁 의자 윗부분이 빠져서 발가락이 멍들고, 한 주 안에만 세네 번을 다쳤다. 오븐 장갑을 끼고도 손을 데었는데 이쯤 되니 큰 아이가 한 마디 한다.

-근데 엄마, 너무 많이 다치는 거 아니에요? 좀 서두르고 뭔가 다 어설픈 거 같은데 집안일이.


눈에 번쩍 불이 켜진다!


저기서, 막내 아이가 다가와서 엎드려서 내 엄지발가락을 불어주고 112에 신고해 준다고(?) 야단법석이다.

거긴 아닐 텐데;; 119도 모르는구나, 기분이 좋았다가 갑자기 심각해지는 상황 -_-



당연히, '호~'불어 주고 상황분석보다는 공감과 위로를 해주는 대처가 상처엔 효과적이다. 그게 뭐 상황을 낫게 해 주는 건 아무것도 없지만 그냥 기분이 좋더라는 이야기.





#손이베었다

#상처에대해

#우리는상처를어떻게다루는가

#상처받은사람을마주했을 땐

#몹시쓸모있는글쓰기









KakaoTalk_20250806_222330540_02.jpg 이제는 자주 다치는 내 손과 발가락에 대해 분석해 주는 나의 큰 아이 TTTT 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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