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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금 Mar 29. 2021

시절 인연

관계의 유효기간과 좋은 이별

  삶에서 지속되는 유일한 것은 변화라고 한다. 곱씹을수록 참 맞는 말인 것 같다. 변화는 평소엔 멀게 느껴지지만 막상 눈앞에 닥치면 갑작스럽다. 예상하지 못했던 변화는 더욱 그렇다. 변화의 순간에서 나는 좋은지 나쁜지 보다는 안전한지 아닌지에 먼저 눈이 가는 편이다. 불확실성을 온전히 받아들이기 전까지 변화는 부담스러운 손님이다. 


  사람과의 관계가 그렇듯이 취미생활에도 유효기간이 있었다. 인생에서 손꼽히는 경험과 짜릿했던 한 때를 함께했던 취미였지만, 영원할 순 없었다. 


  나의 승부욕과 경쟁심을 자극하며 강렬한 의지를 불태웠던 바둑은 어느 순간 열등감을 유발했다. 실력이 붙으면서 잘 두는 사람들과 두는 일이 늘어났는데, 연이은 패배를 감당하기에 나는 여렸다. 바둑을 둘 때마다 ‘나는 안돼’가 반복적으로 주입되면서 주눅 들었다. 즐거움과 성장보다 스트레스가 더 큰 상태가 오랜 시간 이어졌다. 바둑을 생각하면 좋은 감정보다 나쁜 감정이 더 많았다. 바둑을 처음 배울 때의 기쁨이 사라진 지 오래였다. 하지만 3년 넘게 고군분투했던 취미를 내려놓는 건 쉽지 않았다. 유단자라는 목표, 그동안의 투자와 노력, 예전의 재밌었던 기억, 함께했던 선생님과 친구들이 눈에 밟혔다. 


    생활방식이나 가치관이 바뀌면서 취미가 불편해질 때도 있었다. 건강을 돌보고 아침형 생활을 시작하면서 주로 밤에 하는 살사댄스와 자연스럽게 멀어졌다. 예전에는 모르는 사람과도 춤으로 소통할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하고 즐거웠지만, 어느샌가 살사 바에서 만났다는 이유만으로 모르는 사람과 춤추는 상황이 부자연스럽게 느껴졌다. 예전에는 괜찮았던 것이 불편해지는 경험은 당황스러웠다. 삶의 큰 부분을 함께했던 취미였지만, 어느샌가 다른 사람의 옷을 입은 것처럼 어색했다.


  애정과 정성을 쏟았던 취미와 헤어지는 것은 오래 만났던 남자 친구와 헤어지는 것만큼이나 아팠다. 공허함과 죄책감, 원망이 뒤섞였다. 취미와 멀어지기 싫은 마음에 습관적으로 나에게서 문제를 찾거나 상황을 축소했다. 내가 인내심이 없는 게 아닐까, 지나가는 권태기가 아닐까 고민했다. 복잡하고 불안했다. 생각은 많아지고 마음은 지쳤다. 


   생각이 또 다른 생각을 불러일으키던 중, 불현듯 나에게 친절해지고 싶었다. 노력과 집착은 한 끗 차이였다. 내가 감당하기 어려운 일로 버티고 있다는 사실이 명확해졌다. 그만 놓아주고 싶었다. 내가 불편한데 취미가 편할 수는 없었다.


  취미와 만남과 이별을 반복하면서, 멋진 순간을 함께하는 것과 꾸준히 함께하는 것은 다른 성질의 것임을 깨달았다. 삶의 의미 있는 순간을 함께 보냈던 이유로 평생 관계를 지속해야 할 필요는 없었다. 모든 관계가 그렇듯, 취미활동과 가까워질 때도 있고 멀어질 때도 있었다. 만나기도 하고 헤어지기도 하는 것이었다. 건강한 관계는 변화했다. 시절 인연이었다. 멀어지는 것은 한쪽의 잘못이 아니었다. 관계의 자연스러운 모습이었다. 언제나처럼 같은 자리에서 내 인생의 동반자가 되어주기를 바라는 것은 내 욕심이었다. 관계를 잡아두려고 하면 몸에 힘이 들어갔다.


  영원하지 않기 때문에 더 아름다운 것들이 있다. 취미와의 관계도 변하기 때문에 함께하는 순간이 더 소중한 것 같다. 우리는 인생을 따라 각자의 길을 간다. 각자의 길에서 생기는 접점 덕분에 인생은 빨랐다 느렸다, 방향이 바꼈다가 하면서 더욱 풍성해진다. 스치는 인연은 그렇게 내 인생 속에 묻어있다.


  헤어지는 것이든, 잠시 멀어지는 것이든 관계를 잘 마무리하는 것은 취미생활에 중요하다. 인생이 그러하듯이. 마무리가 가벼우면 지난 추억에 예전 취미를 돌아보거나, 한 번씩 마주칠 기회가 생긴다. 슬픔과 아쉬움으로 오래된 취미를 보내준 자리에는 시간이 흘러 또다시 시작하고싶은 호기심과 열정이 피어난다. 좋은 끝은 새로운 시작과 맞닿아 있다. 떠난 자리에 새로운 인연이 채워지고, 새로운 삶이 시작한다.


  또 인연이 닿으면 생각이 나겠지. 가끔 생각이 나면 미소 지을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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