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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금 Apr 02. 2021

나선형으로 성장하기

내딛는 발걸음이 가볍기를

  대학교 때, 일 년 동안 한 주도 거르지 않고 로또를 산 적이 있었다. 로또 발표를 하는 요일이 다가오면 괜히 설렜다. 로또에 한창 빠져있을 때는 1등에 당첨되면 돈을 어떻게 쓸지 미리 계획을 세워놓았다. 인생은 한방이라고, 로또만 당첨되면 인생에 고민이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신문으로 당첨자들의 소식을 접하면 비극적인 삶을 사는 사람들이 많았다. 나로서는 그 이유를 알 길이 없었다. 나의 현실은 일 년 동안 5천 원 두 번 당첨된 게 전부였다.


  취미생활을 하다 보니 인생은 공평했다. 모든 것은 장단점이 있었다. 할 줄 아는 것이 많아지고 아는 게 많아지면 삶이 쉬워질까 생각했지만, 인생에는 늘 예상하지 못했던 문제가 발생했다. 몸을 공부한 후에 사람들을 보면 습관처럼 체형을 분석하고 성격을 추측했다. 편견을 내려놓고 사람들을 대하는 법을 배우기 전까지 사람들과 진실한 소통이 힘들었다. 한창 여행을 다닐 때는 일상이 하찮게 여겨졌는데, 평범한 일상의 풍경도 여행지처럼 감상하고 즐기는 법을 배우기 전까지 일상은 시시했다. 게다가 취미를 개발하기 위해서 일상의 소소한 기쁨들을 뒤로 미뤄두고 시간과 노력과 에너지를 투자할 때도 있었다. 무언가를 얻으려면 그것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 했다. 


  좋아서 시작한 취미였지만, 배움의 과정이 항상 즐겁지는 않았다. 초반의 즐거움이 끝나고, 실력이 벽에 부딪히는 느낌이 들 때마다 취미를 그만둘지 말지의 갈림길에서 고민했다. 남들만큼 결과가 나오지 않는 것도 속상하고,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몸이 따라주지 않는 것도 답답했다. 기대에 못 미치는 자신을 원망하면서 자존감이 떨어졌다. 취미에 애정과 욕심이 생길수록 미워하는 마음도 함께 생겼다. 


  실력은 수학 공식처럼 시간을 투자하는 만큼 곧바로 결과로 이어지지 않았다. 머리로 외우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기억 회로를 만드는 과정이었다. 인생에 한방은 없었다. 단기간의 집중훈련보다 경험을 적금처럼 차곡차곡 쌓아가면서 성장한다는 사실을 몇 개의 취미를 떠나보낸 후에 깨우쳤다. 눈앞의 결과에 집착할수록 의심과 실망으로 지쳤다. 시간이 필요했다. 


  좋은 점만 보였던 취미의 단점을 알게 되면 취미에 배신을 당한 느낌이 들었다. 처음에는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에서 일어나는 일을 받아들일 용기기 부족했다. 한때는 지금 배우는 취미가 나와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취미를 포기하면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하지만, 취미를 그만둔 후에도 미움과 앙금은 오래도록 남았다. 취미를 돌아보며 좋은 추억을 떠올릴 수 있으려면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발레든, 바둑이든 시작은 달랐지만, 초보 딱지를 떼고 어느 정도 실력이 오르면 어느 시점에 완벽주의와 부담감은 나를 시험했다. 그렇게 슬럼프가 찾아올 때마다 제풀에 지쳐서 포기했다. 재능이 없다고 변명할 때도, 직업도 아닌 취미를 힘들게 할 필요가 없다고 정당화할 때도, 새로운 재밌는 대상을 찾아 회피할 때도 있었다. 모든 일을 전문가 수준으로 잘할 필요는 없지만, 반복되는 중도하차는 상실감을 가져왔다. ‘내가 과연 잘하는 게 있긴 한 걸까?’, ‘왜 남들은 잘하는데 나는 안될까?’ 


  그러던 어느 날 예전에 쓴 일기를 읽었다. 주어만 살사에서 바둑으로 바꾸면 모든 맥락이 똑같았다. 똑같은 레퍼토리를 몇 번을 경험한 후에야 취미의 문제가 아닌 내가 해결하지 못한 숙제라는 사실이 보였다. 포기하고 물러서면 다음번에 다른 취미를 배울 때 또 같은 자리에서 방황했던 이유였다.


  취미의 장단점을 모두 알고 난 후에도 취미를 계속 이어나가는 것은 사랑이자 용기였다. 불편한 현실을 받아들이면서 계속 취미생활을 이어나갈 때 취미와의 진정한 관계가 시작했다. 결과를 내려놓고 좋으면 좋은 대로, 나쁘면 나쁜 대로 현재를 즐길 수 있었다. 처음부터 하나의 취미를 온전히 받아들이기는 어려웠지만, 다양한 취미를 접하면서 불편함을 감당해보려는 시도가 조금씩 쌓였다. 피하거나 미워하는 감정을 내려놓고 눈앞의 상황을 받아들이면 나도 그만큼 성장했다.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일이 많아지면서 그릇이 커졌다. 불확실한 상황에서 앞으로 꿋꿋이 나아간 경험은 일상에서도 나를 단단하게 만들었다. 취미를 겪어보기 전까지는 깨닫지 못했던 것들이었다.


  시간과 인내는 성장의 본질이다. 불편함을 감당하는 연습이야말로 내가 취미를 통해 가장 크게 배운 것 중 하나다. 상황이 완벽하지 않을 때, 싫어하고 외면하거나 애써서 극복하려는 마음을 내려놓으면 마음에 여유가 생긴다. 불안하고 조급한 마음을 내려놓고 묵묵히 한 걸음씩 걷다 보면 나는 나아가고 있다. 곧게 뻗은 길이 아니더라도, 경사로나 둘러가는 길도 꾸준히 가다 보면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선물 같은 일이 생길 때도 있다. 


  좋은 선물을 받더라도, 선물은 다룰 수 있기 전까진 내 것이 아니다. 나는 옆길로 새기도 하고, 길을 잃기도 하고, 길에서 좌절하기도 하면서 나선형으로 성장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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