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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nome Nov 09. 2023

낭만이 사라진 시대 PART- 2

예술도 결국엔 돈이다

나는 2017년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살바토르 문디(Salvator Mundi)’라는 작품이 한화로 약 5,700억 원에 낙찰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깜작 놀랐다. 이는 너무 비현실적이었다. 단지 그림 한 장일 뿐이었다. 그 돈이면 공공시설, 의료, 교육, 기후환경, 에너지, 기술 분야의 연구 및 개발, 빈곤퇴치에 투자해도 될 만한 막대한 규모다. 그렇기에 웬만한 기업의 수준을 넘어 정부차원에서 다루어질 수 있는 엄청난 자본이다. 어떻게 그림 한 장을 구매하는데 이런 막대한 돈을 사용할 수 있는 것일까? 물론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르네상스 시대를 대표하는 천재 예술가로 알려져 있고, 그의 작품은 세계적으로 매우 희귀하고 중요하다는 것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또한 그의 작품이 매우 완성도 높은 르네상스 시대의 예술적 정수를 보여주는 작품이라는 것에도 동의한다. 심지어 다빈치의 그림으로 인정받기까지 “살바토르 문디”는 오랜 기간 동안 사라진 것으로 알려져 있었고, 상당한 복원작업 끝에서야 비로소 다빈치의 작품으로 재평가 받았다는 스토리의 가치도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러한 모든 가치를 반영한다고 하더라도 5,700억 원의 가격이 쉽게 납득되지는 않았다. 


사람들은 예술의 진정한 가치를 돈으로 측정하기 어렵다고 말한다. 하지만 돈으로 환산되지 않은 예술품을 찾기란 쉽지 않다. 또한 가격이 매겨져 있어야 그 예술품이 갖는 가치의 크기를 짐작하기도 쉽다. 예술이 추구하는 것들, 사람들의 감성을 울리고, 사회에 메시지를 전달하며, 문화적 유산을 이루는 것들도 모두 어느 순간에는 모두 돈으로 환산된다. 물론 그러한 흐름 속에서도 많은 예술가들은 창작의 자유를 위해 경제적 이득보다는 자신의 예술적 신념을 고수한다. 하지만 작품의 가치는 결국 돈의 크기로 결정될 수밖에 없다. 값 비싼 것은 소중하게 여기도록 만드는 힘이 있다. 


예술품에는 예술가 자신의 의도나 철학뿐만 아니라 예술가를 둘러싼 외부환경들, 예를 들어 사회적, 경제적, 문화적 경험들도 동시에 반영된다. 이는 예술가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작품이 해석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모든 사람들은 자신만의 관점, 사전지식, 경험, 문화적 배경을 기반으로 작품을 경험한다. 이러한 개인적 요소들이 예술품을 대할 때 각자 다른 해석을 낳는다. 그렇기에 작품의 해석은 단일한 의미나 메시지로 제한하기 어렵다. 그런 관점에서 다빈치가 살아있었더라면 자신의 그림에 대한 현재의 평가에 동의했을지 의문이 들었다. 또한 그가 자신의 작품에 부여된 가치와 그에 따른 엄청난 가격을 어떻게 생각했을지도 궁금했다.


물론 이런 의문은 다빈치의 의도나 예술적 신념을 폄훼하기 위함이 아니다. 또한 그림을 구매한 사람에 대한 비난도 아니다. 그것은 다빈치 작품의 예술적 가치가 이 가격에 제대로 반영되었는지, 아니면 투자 목적과 같은 다른 요인들에 의한 것인지에 대한 의구심에서 비롯된 것이다. 또한 그림이 가격이 이정도로 비싸지게 되면 대중은 어떤 방법으로 이 그림에 접근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한 의문도 내포되어 있다. 결국 돈이 많은 소수가 모든 작품을 소유하고 자신만 그것을 감상할 때, 작품은 미래시점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게 될 것인지 하는 의구심이다. 심지어 나는 이 규모의 거래가 그림의 본질적 가치보다는 돈세탁과 같은 다른 목적을 수반하는 것은 아닌지도 의심하곤 했다. 


이 의구심의 연장에서 나는 하나 깨닫게 된 것이 있었다. 현대 사회에서 예술의 상업화는 피할 수 없는 현실이라는 사실이었다. 실제 예술품이 거래되는 갤러리, 경매, 미술시장 등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예술을 경제적인 상품으로 바라보고 거래를 촉진하는 것이었다. 물론 작품이 갖는 의미와 가치를 말하지만 그것은 반드시 돈으로 환산했다. 어떤 면으로는 이러한 상업적 환경은 대중에게 친절을 제공했고 이는 곧 작품과 대중의 관계를 더 친숙하게 만들며 시장의 확대를 가져왔다. 이를 기반으로 거대한 하나의 산업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그런 면에서 다빈치의 “살바토르 문디”는 단지 하나의 작품이 우연하게 비싼 가격으로 거래된 것이 아니라 예술품 거래산업전체의 규모를 대변하는 상징적 의미로 평가할 수 있다. 


물론 예술 작품의 상업화와 그로 인한 고가 거래는 오래된 역사였다. 이전부터 다빈치 뿐 아니라 다른 유명예술가의 작품들도 매우 높은 가격에 거래되고 있었다. 예를 들어 2015년 소더비 경매에서 빈센트 반 고흐의 ‘알리스캉의 가로수길’은 775억 원에 낙찰되었다. 그것은 분명 미적 측면을 넘는 것임은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상황에서 내가 주목하고 있는 것은, 여전히 작품의 가격이 작가가 추구하는 이상을 반영한 것인지 아니면 단지 거래하기 쉽게 돈으로 환산된 것에 불과한 것인지에 있다. 예술과 돈의 관계를 고민하다 보면, 결국 시대의 흐름에 따라 변화하는 우리의 가치관에 주목하게 된다. 


다빈치의 작품이 고가의 가격을 갖는 과정에서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예술품의 가치는 단지 작가의 명성, 작품의 미적가치나 역사성 그리고 희소성뿐만 아니라 전문가의 보증이 결정적으로 필요하다는 사실이었다. “살바토르 문디”라는 작품은 다빈치의 작품으로 인정받기 전에는 현재 낙찰가에는 미치지 못하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전문가들에 의해 다빈치의 작품으로 재평가 받는 순간 가격이 달라졌다. 그렇다면, 전문가의 보증만 있다면 예술품의 가치는 단순한 창조적 매개체로서의 역할 뿐 아니라 경제적 자산, 사회적 지위의 상징, 그리고 투자 대상으로 까지 얼마든지 확장이 가능하다. 이러한 사실로 보건대 이제 예술은 본격적으로 보증과 신용이 필요해졌다. 작품은 부를 축적하는 중요한 자산이 되어갔기에 더욱 그러했다. 이러한 흐름은 예술가가 지향하는 작품의 순수한 가치를 희석하기 마련이다. 물론 말로는 물리적 가치를 넘어서 작품의 역사적 중요성, 예술적 기여, 그리고 작품의 문화적 상징성을 반영한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현실은 작품에 부여된 가치가 과연 믿을 수 있는 것인가가 중요했다.


이는 예술품이 예술적, 역사적, 문화적 가치를 넘어 경제적 맥락 안에서 시장의 수요에 의해 투자로서 결정되는 현실을 보여준다. 예술품의 가격은 일반적인 상품의 가격형성과는 다르게 구매력 있는 단 한명의 수요자만으로도 작품의 가격이 얼마든지 높게 책정될 수 있다. 더욱이 구매력 있는 두 사람이 경쟁이라도 한다면 작품의 가격은 천정부지로 솟구칠 수 있다. 반대로 수요가 없는 경우에는 폭락을 면치 못한다. 예를 들어 조선시대 마지막 궁중화가로 알려진 이당 김은호의 작품은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수천만 원을 호가했다. 그러나 그의 사후 친일논란에 휩싸이며 그의 작품은 대작이라도 몇 백만 원 수준으로 낮아졌다. 작품의 본질적 가치가 아니라 사회적, 정치적 요소가 반영된 결과다. 시장에서 수요가 사라지면서 가격이 급락한 것이다. 


이처럼 예술품의 가격은 희소성, 개인의 취향이나 선호, 정치적, 사회적 상황 등 다양한 요소가 반영된다. 이는 이러한 예술품의 가격형성은 그 자체로 독특성을 반영하지만 동시에 예술품의 가치에 대한 의심을 불러온다. 변동성이 심하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자산으로서의 지위가 불완전함을 뜻한다. 


그러나 이러한 우려는 기우로 끝이 나는 모양이다. 2019년 회계법인 딜로이트(Deloitte)에 따르면 예술품 담보대출 시장이 매해 15~20% 성장했다고 한다. 전문가가 예술품의 가치에 일정정도 보증을 제공했고 은행은 작품의 경제적 가치에 대한 보증을 제공한 것이다. 실제 씨티은행, 뱅크오브아메리카, JP모건, 골드만삭스, 모건스탠리와 같은 은행은 예술품 담보대출 서비스의 제공한다. 물론 그 대상은 고액자산가에 한정된 것이었으나 예술품은 특유의 가격의 변동성이 상당히 완화되어 자산으로서의 안정적 지위를 갖게 된 것은 사실이었다. 은행의 이러한 보증은 예술품에 대한 신용의 부여를 의미했다. 그 누구도 부인하기 어려운 자산으로서의 가치가 인정된 것이다.


첫 시작은 경매시장에서 비롯되었다. 예술품 경매는 다양한 아트 옥션에서 오름차순 가격을 기준으로 시작한다. 판매자의 예상가격을 시작으로 낮은 가격에서 높은 가격으로 증가하는 방식이다. 더 이상 입찰자가 없을 경우 최고 입찰가로 낙찰된다. 문제는 판매자의 예상가격 보다 낮아 경매가 실패로 돌아갈 때 발생한다. 이는 곧 거래의 실패를 의미할 뿐만 아니라 예술품의 가치가 추락함을 뜻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경매를 대행했던 대행사는 하나의 방식을 강구했다. 그것은 경매가 시작되기 전 예술품 판매자와 경매 실패 시 작품을 구입하는 계약을 맺는 것이었다. 이는 위험을 해소하는 탁월한 방법이었다. 우선 경매 대행사와 판매자는 예상 최저가를 합의한 후 경매 실패 시 그 가격의 75%내외로 구매할 것을 약정한다. 이때 경매사가 구입한 작품은 이 후 경매사의 소유가 되고 다시 다른 경매를 통해 판매를 시도한다. 물론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최종적으로 판매되지 않는다면 시장에서 분리되거나 폐기된다. 이때 작품의 최종 소유자는 경매 대행사가 된다.


실제 세계적인 미술품 경매회사 크리스티나 소더비는 모두 이러한 방법을 통해 위험을 줄이고 있다. 이렇게 대행사가 작품을 구매해주는 관행은 결국 작품에 대한 보증으로서의 효력을 발생시키게 되었다. 경매사의 보증으로 금융기관의 대출에도 긍정적으로 작용했다. 금융기관들은 낙찰되지 않은 작품에서 발생할 위험을 해소할 수 있었기에 대출할 수 있는 충분한 근거를 확보했다. 이로 인해 불안전하게 존재했던 자산으로서의 지위는 확고해졌다. 


이와 관련해 2018년 우리나라 문화체육관광부도 미술진흥중장기계획에서 미술품 기반 금융제도 활성화 리포트를 작성한 적이 있다. 리포트는 미술품은 투자수익률이 높으나 가치산정, 현금화 등의 문제로 투자 담보대상이 어려워 제도적 지원이 필요하다는 문제점을 지적한다. 한발 더 나아가 은행에서 미술품 담보대출을 받을 수 있도록 미술은행을 설립하여 작품을 직접 보증하는 방안을 고려해야한다고 주장했다. 이때 미술은행은 미술품에 적정가격을 부여하여 대출금액의 범위를 확정할 수 있다. 따라서 대출자가 대출금을 미납할 경우 미술은행에서 이를 대위변제함으로 은행의 위험이 완전히 해소되는 방안이다. 미술품 담보시장에서 정부가 신용보증을 하는 형식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정부의 이런 계획은 실현되지 않았지만 자산시장의 급속한 변화를 느낄 수는 있었다. 


뿐만 아니라 최근에는 더 흥미로운 변화가 나타났다. 예술품시장뿐 아니라 가상화폐시장의 NFT도 담보대출시장에 진입한 것이다. 코인텔레그래프 보도에 따르면 제네시스 글로벌 캐피털(Genesis Global Capital)이 메타4캐피털(Meta4 Capital)에 600만 달러(약 71억원) 규모의 NFT담보 대출을 제공했다. NFT(Non-Fungible Token, 대체불가토큰)는 고유한 디지털 식별자를 사용하여 블록체인에 기록되는, 하나뿐인 전자적 자산이다. 따라서 희소성이 보장되고 소유와 판매가 가능하다는 점에서 예술품의 범위에 포함된 것이었다. 문제는 이 디지털 아이템이 가상의 공간에 있다는 것이었다. 어떤 면으로는 실체성이 없었다. 그럼에도 대출이 시행되었다는 것은 신용이 부여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NFT가 자산으로 인정받게 된 배경에는 시대의 변화에 맞게 예술품을 바라보는 대중들의 인식이 변했기 때문이었다. 이는 현대미술의 시작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1917년 현대미술가 마르셀 뒤샹의 작품 ‘서명이 적힌 남성용 소변기’가 미국 뉴욕 독립예술가협회의 첫 전시회에 제출되었다. 작품의 제목은 ‘샘(Fountain)’이었다. 그러나 작품성의 인정에서 논란이 발생했다. 기존 미술작품과는 달리 아무런 예술적 가치가 없는 일상용품을 예술 작품으로 승화시켰기 때문이었다. 결국 소변기는 전시되지 못했지만, 전시회가 끝난 이후 평론가들은 이를 ‘오브제’라고 부르며 작품의 가치를 인정하게 되었다. 현대적 관점에서 예술품은 더 이상 고전적 방식으로 연습된 기능의 실연이 아니었다. 작가의 철학과 가치 그것에 한정된 의미 부여만으로도 작품은 새로운 가치와 해석의 대상이 될 수 있었다. 누군가가 그 무엇이라도 가치가 있다고 주장하고 그 주장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동의한다면 그 무가치한 대상은 가치가 있는 작품이 될 수 있음을 의미했다. 그것이 소변기가 현대미술을 선도하는 작품으로서의 지위를 갖게 된 이유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가상 자산인 NFT도 예술품 시장에 접근할 수 있는 충분한 근거가 될 수 있음을 이해할 수 있다. 그야말로 자산 개념의 혁명적 변혁기라 할 수 있다. 


시장 경제 속에서 '돈이 되는' 예술은 더 많은 관심과 자원을 끌어당긴다. 의미부여가 중심인 현대미술에서 대중의 취향을 맞추고, 상품화 가능한 예술 작품을 만들어내는 것은 더 이상 복잡하고 어렵지 않은 작업이 될 수 있었다. 예술가들은 때로는 자신의 창작 의도와는 다르게 대중의 기대를 충족시키기 위한 작품을 만들어내야 하는 상황에 놓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예술이 시장경제 안에서 상품이 될 수밖에 없는 현실은, 예술가들과 예술작품 자체가 주는 감동과 메시지에서 멀어지고 만다. 하지만 이러한 현상에 대해 누가 감히 잘못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갤러리의 전시부터 경매장에 이르기까지 예술의 상업화는 거대한 산업의 한 축이 되었고 이는 더 이상 새로운 현상이 아니다. 돈과 예술 사이의 긴밀한 연결고리는 예술을 더욱 경쟁적이고, 돈의 논리에 순응하는 방향으로 몰아가고 있다. 하지만 처음 나의 우려대로 예술이 경제적 도구로만 전락하고, 우리가 그것에만 주목한다면, 우리는 무엇을 통해 우리의 정신을 계발하고, 감성을 풍부하게 하며, 도덕적이고 지적인 성찰을 할 수 있을까? 또 우리는 어디에서 삶의 영감을 얻고 희망을 기대할 수 있을까? 아마 우리는 우리의 모든 문제가 돈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으로 인식하고 돈을 얻고자 노력하는 삶을 살아야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제 아무리 돈이 되는 시대의 예술이라 해도, 우리가 추구해야 할 가치는 예술의 본질에서 출발한다. 비틀고 조롱하고 그것이 우리가 지향하는 삶이 아닐 수 있다는 도발적인 서사 그에 대한 우리의 성찰은 결코 포기할 수 있는 성질이 아니다. 그래서 그것은 어떤 면으로 절박한 낭만적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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