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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nome Nov 12. 2023

낭만은 현실의 외면이 아니다

이세계가 제공한 현실도피

수년 전부터 일본의 애니메이션 이세계(異世界, another world)시리즈가 유행이다. 특히 청년세대가 선호한다. 이 시리즈는 현대판 판타지로, 전통적인 '다른 세계로의 여행' 이라는 모티브를 사용한다. 이야기는 대개 주인공이 현실 세계에서 다른 세계로 전이되면서 시작된다. 주로 일상에서 벗어나 특별한 능력을 발견하거나 엄청난 사명을 부여받는다. 이 전이된 세계는 주로 마법이 존재하며, 중세를 연상시키는 판타지적 요소로 가득 차 있다. 드래건, 요정, 그리고 마왕과 같은 판타지 생물들이 이 새로운 세계의 일부로서 주인공과 상호작용한다. 주인공은 그들에게 제공된 새로운 환경에서 자신의 능력을 통해 위기를 극복하고,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면서 숨겨진 잠재력을 발휘한다. 이처럼 이세계시리즈는 일상의 한계를 넘어서는 모험에 대한 갈망을 충족시킨다. 


분명 이세계시리즈는 로맨스, 액션, 미스터리, 공포 등 다른 장르의 요소를 접목시킴으로써, 장르 간 경계를 허물고, 새로운 형태의 서사를 경험할 기회를 제공했다. 많은 이세계시리즈에서 주인공들은 현실에서 겪는 실업, 사회적 불안정, 학업 스트레스와 같은 문제들로부터 벗어나 마법의 세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는 청년들이 경험하는 현실적 압박에서 잠시 동안 벗어날 수 있는 도피처를 제공한다.


그러나 이러한 도피는 현실 문제에 대한 심층적인 탐구나 해결책을 제시하지 않는다. 대부분의 이세계시리즈는 주인공이 새로운 세계에서 겪는 모험에 집중하면서, 현실 세계의 경제적 불평등이나 사회적 불공정 같은 복잡한 문제를 간과한다. 예를 들어, 주인공이 갑자기 부여받은 능력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 되는 것은, 현실에서는 대부분의 문제가 개인의 노력만으로 해결되기 어렵다는 사실을 무시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때문에 종종 서사를 전개하는 과정에서 획일화가 강조되며 예측 가능성이라는 단점을 유발하곤 한다. 대체로 이세계시리즈의 주인공들은 무적의 능력을 부여받는다. 실제 이세계시리즈의 팬들은 주인공을 먼치킨으로 풍자한다. "먼치킨(Munchkin)"이라는 용어는 원래 "오즈의 마법사(The Wonderful Wizard of Oz)"에 등장하는 동명의 캐릭터들에서 유래한 단어다. 오즈의 마법사에서 먼치킨은 오즈의 땅에 사는 작은 사람들로, 도로시가 처음으로 만나는 주민들을 의미했다. 이들은 도로시를 따뜻하게 환영하고 오즈로 가는 길을 알려주는 친절한 존재들이었다. 하지만 이세계시리즈에서의 의미는 과도하게 강력하거나 게임의 균형을 깨트리는 캐릭터를 가리킨다. 주인공의 이 강력하고 절대적인 힘은 결국 서사의 긴장감을 감소시키고 예측 가능한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이처럼 이세계시리즈는 현실 문제를 반영하거나 무시하는 데 있어 과감하다. 


그로 인해 개인의 내면적 성장과 발전이라는 주제를 다루면서도, 곧잘 현실의 문제를 간과한 단순화된 접근을 시도한다. 복잡하지 않는 서사구조는 쉽게 직관적인 결론에 도달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답이 정해져있는 결말은 그 과정에서의 화려한 액션과 퍼포먼스나 금기를 깨는 쾌락을 중요하게 만든다. 


물론 이러한 요소의 반영은 대중적인 성공을 위한 하나의 장치일 수 있다. 대중은 때론 인간의 심리와 상호관계보다 강력한 힘을 가진 존재가 선명한 방법으로 자신의 욕망을 실현시킨다는 스토리에서 통쾌함을 얻는다. 확실히 섣부른 교훈보다는 더 높은 수익을 약속한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창작자는 자연스럽게 대중이 좋아하는 이야기를 만들 수밖에 없다. 창의적인 내러티브를 포기하고 익숙한 패턴을 반복하는 것, 즉 비슷한 배경, 캐릭터, 갈등을 가진 구조를 유지하면서 주인공이 원하는 바를 그대로 실현시켜주는 방향을 설정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이세계시리즈의 많은 작품들은 대중의 요구에 발맞추어 현대적 엔터테인먼트 전형적인 형식들은 완성해 왔다. 이는 신속하고 명확한 쾌락적 만족감을 제공하려는 목적을 반영한다. 비록 그것이 현실에서 불가능한 단기적인 만족일지라도 현대의 소비 행태와 맞물리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하지만 어디 현실이 그러한가. 현실세계의 문제들은 가볍지 않다. 실제로 청년들은 높은 학자금 대출, 직업 불안정, 주거 문제와 같은 현실적인 압박을 견디며 삶을 이어 나가고 있다. 그럼에도 아직까지 이러한 문제에 대해 명확하고 실질적인 해결책이 제시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세계시리즈의 주인공은 이러한 문제는 아무런 장애가 되지 못한다. 그렇기에 이세계시리즈는 현실인식의 도피처에서 멈춘다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이다.


물론 이세계시리즈 역시 현대인의 심리적, 사회적 요구에 새로운 시각을 제시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진 작품으로 서의 가능성을 부정하기 어렵다. 때론 현실을 반영하면서도 그 복잡함과 인간의 내면을 다룬 작품들도 존재한다. 예를 들어, "Re:제로부터 시작하는 이세계 생활"은 주인공이 죽음을 경험하고 시간을 되돌리는 능력을 통해 실수를 바로잡으며 성장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이 과정에서 주인공은 반복되는 실패를 통해 정신적, 감정적 성장을 이루며, 이는 현대 청년들이 겪는 시행착오와 성장의 고통을 상징한다. 주인공의 경험은 청년들이 직면하는 취업, 인간관계, 자아 정체성의 문제를 반영하는 동시에, 실패를 극복하고 개인의 잠재력을 발휘하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또한 “스파이스 앤 울프”라는 작품도 훌륭하다. 이세계 장르에 속하지만, 전형적인 판타지 요소보다는 경제와 상업의 측면을 탐구하는 것이 특징이다. 이 작품은 한 상인과 반인간 늑대 여신의 관계를 통해 인간의 욕망, 경제의 원리, 그리고 신과 인간 사이의 상호작용을 관찰한다. 세부적인 경제 거래, 가격 협상, 화폐 가치의 변동 등의 요소가 이야기에 중요한 역할을 하면서, 인물들 사이의 심리적인 교류와 성장을 자연스럽게 녹여낸다. 이는 물질적인 이득과 개인적인 관계가 어떻게 서로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한 섬세한 관찰을 제공하며, 관계의 복잡성과 인간 본성의 다양한 면모를 세심하게 포착한다.


이 외에도 “마도카 마기카”라는 작품도 평가할만하다. 마도카 마기카는 마법 소녀라는 전통적인 애니메이션 서사구조를 새롭고 어두운 방향으로 재해석한다. 이 작품은 선택의 중요성과 그 결과를 강조하며, 희생과 욕망의 대가를 탐구한다. 주인공들은 개인적인 소망을 이루기 위해 마법 소녀가 되는 것과 그로 인해 발생하는 비극적인 후과 사이의 딜레마에 직면한다. 작품은 강렬한 시각적 스타일과 예측 불가능한 서사의 전개를 통해 사회적 메시지와 심리적 깊이를 전달한다.


이처럼 얼마든지 단순한 흥미 위주의 서사에서 벗어나 사회적, 심리적 문제를 심도 있게 다루면서 본연의 가치를 실현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렇기에 이세계시리즈의 많은 장점에도 불구하고 뻔한 이야기전개, 현실도피, 성적 대상화, 상업성, 문화적 다양성의 결여, 문학적 가치적 측면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것은 이세계시리즈가 원래 그런 것만을 추구했는지 아니면 우리의 기호에 따라 그런 서사구조를 만들었는지를 살펴보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정말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만일 이를 우리가 너무 쉽게 생각한다면 그로 인해 문학과 같은 창의적 영역에서까지 상상력을 발휘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어디에서 삶의 다양한 가능성과 희망을 찾을 수 있을까? 실제 문학과 스토리텔링은 끊임없이 현실과 상상의 경계를 넘나들며 삶의 깊이에 대해 통찰력을 제공하는 역할을 해왔다. 


먼저 창작자가 추구하는 가치에 대해서 이야기 하지 않을 수 없다. 미야자키 하야오와 같은 작가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과 같은 작품을 만들었다. 이는 요즘 유행하는 이세계시리즈와 유사한 특성이 있는 애니메이션이지만 작가의 철학과 가치가 반영되었다. 어린 소녀 치히로가 영적인 세계로 여행을 떠나면서 자신의 두려움을 극복하고 성장하는 과정을 그린다. 그러나 이 작품은 개인의 성장과 자아 발견의 여정을 아름답게 표현하면서도 현대 사회의 소비문화와 환경문제를 비판적으로 다루는데 성공했다. 뿐만 아니라 조지 오웰의 "1984"나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와 같은 디스토피아 소설들은 극단적인 사회 시스템을 통해 현대 사회의 경향성을 비판하고, 개인의 자유와 사고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이러한 작품들은 우리에게 현실의 문제를 직시하고, 현재와 미래에 대해 심사숙고하게 만드는 동시에 창의적이고 비판적인 사고를 자극한다. 


물론 현실의 참혹함은 때론 극복하기 어렵고 해소할 수 있는 대안도 필요하다. 누구나 현실을 직시해서만을 살기가 어렵다. 그렇기에 단순한 애니메이션에 불과하더라도 그것이 비록 현실의 어려움을 조금이라도 완화해 준다는 점에서는 긍정성을 인정할 수는 있다. 더욱이 이세계시리즈는 우리의 소비 형태를 반영하고 있음도 분명하기에 이세계의 서사구조가 우리의 인식을 끌어가는 것이라고 단정하기도 어렵다. 우리는 자주 복잡한 서사보다 직관적이고 감각적인 해결책을 제시하는 이야기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모든 면을 고려하더라도 명백한 사실은 우리가 결국 현실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삶의 목적이 단지 자신을 억압하는 것에서의 해방만을 위한 것일까. 그렇다면 그것은 연속성과 지속성을 결코 보장할 수 없다. 만일 그것을 간과한다면 우리의 삶은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한 채 끝없이 쾌락만을 추구하게 되고 그 끝에서 파멸과 절망을 만나게 된다. 심지어 그러한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게 하는 작품도 존재한다.


예를 들어 요한 볼프가아 폰 괴테의 “파우스트”와 같은 작품이 그것이다. 어떤 면으로 이세계시리즈와 "파우스트"는 모두 인간이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려는 욕망을 보여준다. 또한 현대 사회의 복잡성과 스트레스에서 일시적으로 벗어나고자 하는 현대인의 감정을 반영하고 있다. 이는 우리가 현실의 어려움을 마주할 때 어떤 선택을 할 수 있고 그 선택의 결과에 대한 이해를 돕는다. 


"파우스트"는 지식과 권력을 추구하는 인간의 근본적인 욕망과 그것을 추구하는 과정에서의 내적 갈등과 정체성의 위기를 다룬다. 그래서 이야기는 인간 존재의 의미와 목적에 대한 질문을 던지며, 개인의 욕망과 사회적 책임 사이의 긴장을 연출한다. 파우스트의 이야기는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악마와 거래를 하면서 시작된다. 그러나 이 거래는 파우스트에게 삶의 깊이를 깨닫게 하는 비극으로 돌아온다. 인간이 극단적인 욕망을 추구할 때 발생할 수 있는 영적, 도덕적 파멸을 보여주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인식에는 중세 기독교 윤리와 계몽주의적 이성이 혼합된 복잡한 주제가 녹아있다. 하지만 이세계시리즈를 통해 우리가 기대하는 단순한 쾌락적 탈출구를 "파우스트"는 그 행위가 초래할 수 있는 위험한 결과에 대해 경고하며, 더 깊은 이해와 자각을 강조한다. 


이세계시리즈는 현실의 한계와 대조되는 이상적인 세계에서의 자유와 능력을 추구하는 현대인의 욕구를 반영한다. 그러한 점은 충분히 낭만적이다. 하지만 낭만의 본질은 단순한 현실 도피가 아니라 자신의 약함을 강화하는 데 있다. 그렇기에 그것은 현실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 대한 더 깊은 이해와 사려 깊은 반성을 촉진하는 것이다. 우리는 한번쯤 낭만적으로 파우스트의 경고를 새겨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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