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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nome Nov 13. 2023

낭만적으로 생각하기

어린왕자 :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나는 과거 사소하고 시시한 일들을 좋아했었다. 아침에 일어나 창문으로 비치는 햇빛, 늦은 저녁 골목을 산책길에 반짝이는 조명, 후드득 쏟아지는 소나기 소리, 어느 날은 작은 술집에서 웃고 떠드는 사람들의 모습만으로도 재미를 느꼈다. 봄날 버스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을 보는 것도 좋아했다. 사람들은 대체로 무표정했지만 각기 다른 초조함, 설렘, 짜증 등 다양한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수다를 떠는 것을 좋아했고, 때론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멍 때리며 시간을 허비하는 일도 좋아했다. 


사람들은 철없는 놀이라고 치부했지만 내가 보기에 그들은 너무 심하게 성취나 뚜렷한 목표 달성 그리고 사회적 인정에 매달리는 것처럼 보였다. 그들에게 아침 햇살이 창문으로 스며들 때의 따스함, 저녁 골목길의 은은한 불빛, 갑작스러운 소나기 소리, 소박한 술집의 활기찬 웃음소리는 큰 의미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사람들의 입장에서 이런 일들은 전혀 생산적이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꽤나 오랫동안 이런 생각에 신경 쓰지 않았다. 나는 원래 호기심 많고, 새로운 자극을 추구하기를 좋아했다. 사소한 것들은 결코 단조롭거나 지겨운 것이 아니었고 끊임없이 변화와 새로움을 제공했다. 아침 햇빛도, 저녁의 거리조명도, 가게 안의 사람들이나 버스정류장의 풍경은 한 번도 같은 적이 없었다. 더욱이 내 일상은 결국 사소한 일들의 연속이 아니던가. 


'순간을 포착하라'는 19세기 영국의 낭만주의 시인 존 키츠의 말도 이러한 인식을 반영한다. 순간의 포착이라는 개념은 순간의 아름다움에 가치를 부여함으로써 인생의 질을 높일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아침 햇살이나 저녁 조명 같은 사소한 일상도 얼마든지 감성을 자극하는 예술작품이 될 수 있고, 그 안에서 삶의 진정한 아름다움을 찾을 수 있다.


하지만 나 역시 철이 들면서 사소한 것들이나 시시한 것들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사소한 일들이 만족을 제공했지만 현실적 목표나 성취에는 방해요소였다. 당시 나는 감성적 경험과 현실적 삶 사이에서 균형이 필요했다. 그래서 감정에 휘둘리기보다 합리적 이성을 따르기로 했다. 사실 감성을 추구할수록 그 시간에 할 수 있는 다른 기회를 포기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사회적인 성공과 경제적으로 풍요에서는 멀어지고 말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그럴수록 내 삶은 건조해지고 작은 불씨라도 만나게 되면 폭발할 것만 같았다. 내 삶에서 즐거움은 더 이상 일상에서 쉽게 얻을 수 없었다. 시간과 돈을 투자해야만 했다.


내가 그토록 추구했던 사회적 성공과 경제적 풍요는 과연 어떤 의미였을까? 어쩌면 그것은 나의 행복이나 즐거움보다는 타인의 기대에 응답하는 데 더 초점을 맞춘 것일지도 모른다. 이는 아마도 우리의 삶이 어떻게 평가되는지에 대한 일반적인 반영일 것이다. 우리는 주로 외모를 통해 서로를 판단하지만, 그 사람의 진정한 내면을 파악하기는 어렵다. 이러한 사회적 상호작용 속에서, 내 삶이 어느 순간부터 현실에 적응하려는 방향으로 흘러갔다면, 그것은 타인이 보는 내 모습에 대한 나의 인식과 만족을 추구하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내면과는 달리, 종종 외모에 더 많은 가치를 두는 사회에서 내 삶의 방향성을 결정짓는 요인이 되었을 것이다. 우리는 정신과 육체의 균형을 추구한다고 말하지만, 종종 사회적 기대감과 개인적 욕구 사이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현실의 불균형을 인정해야 한다.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살아왔던 사람들일 수록 또 다시 사소하고 시시한 일들에서 작은 행복을 느끼고 싶어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지 않을까. 그런 면에서 생텍쥐페리의 소설《어린왕자》가 그토록 오랫동안 명성을 잃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어린왕자는 B-612번 행성에서 장미와 함께 살고 있었다. 장미는 분명 사소하고 시시한 대상이지만 그의 유일한 친구였다. 그러나 장미는 자신의 감정을 솔직히 표현하지 않았고, 종종 어린왕자를 혼란스럽게 했다. 어린왕자에게 사랑을 갈구하면서도 허영심이 많았다. 장미의 요구가 많아지고 모순적인 태도를 보이면서 어린왕자는 결국 자신의 행성을 떠나는 여행을 결심한다. 


그 여행에서 어린왕자는 성장한다. 그는 사랑과 관계, 그리고 책임에 대해 중요한 교훈을 배운다. 특히 여우를 만나면서 진정한 우정과 사랑이 '길들여짐'을 통해 생겨난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것은 장미가 자신의 행성에서 유일하게 만들어낸 관계임을 이해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장미는 비록 허영심이 많았지만 작고 보호받아야 할 소중한 존재였다. 그렇기에 어린왕자는 장미를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게 되었고 온 우주보다 중요한 존재로 받아들였다. 이 서사는 어린왕자와 장미의 관계를 통해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와 ‘가장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사랑의 본질이 외면의 아름다움이나 완벽함에 있지 않고, 서로에 대한 깊은 이해와 관계를 통해 길들여지는 과정에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소설은 어린왕자가 사막에서 뱀에게 물린 후 사라지는 장면으로 끝이 난다. 어린왕자가 자신의 별로 돌아가기 위해 자신의 한 부분인 물리적인 육체를 벗어나는 것이다. 이는 어떤 의미로는 어린왕자의 '죽음'은 연상할 수도 있지만, 이를 상징적인 전환점으로 볼 수 있다. 그런 관점에서 어린왕자는 죽는 것이 아니라 장미가 있는 행성으로의 귀환 즉 여행의 완성을 의미하게 된다. 


물론 우리의 삶은 어린왕자의 여행과는 달리 낭만으로 충만하지는 않다. 사람들은 일상의 순간들을 아름답게 여기는 것은 개인의 삶에 균형과 행복을 가져다 줄 수 있음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이것이 전부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자신의 감정을 적절히 관리하고, 목표와 균형을 맞추는 것을 더욱 중요하게 여긴다. 특히 생산성과 효율성을 강조하는 현대 사회에서는, 사소한 즐거움 보다는 개인의 발전과 사회적 기여를 추구하는 것을 선호한다. 때문에 자주 사소한 일에 몰두하는 것을 우려하며 자신의 삶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걱정한다. 사람들에게 이런 일들은 곧잘 시간낭비나 삶의 회피가 되어버린다. 


하지만 어린왕자의 이야기에서 보듯 우리의 삶도 어떤 면에서는 여행과 닮아있다. 이때 여행이란 단지 공간적인 이동이 아니라 자아를 발견하는 경로를 의미한다. 살아가는 동안 우리는 여러 문화를 접하고, 다양한 사람들과 교류하며, 수없이 많은 감정을 경험한다. 때문에 삶에는 사랑, 우정, 책임과 같은 자신의 내면과 외부 세계의 관계가 섞여있다. 이러한 경험들은 우리의 내면에 존재하는 깊은 감정과 연결되며, 살아있음을 느끼게 한다. 단지 우리는 타인의 겉모습으로 그들을 평가하는 것에 익숙하고, 종종 내면의 중요성을 잊었을 뿐이다. 비교적 이해관계에서 자유로웠던 시절, 우리는 분명 일상적인 삶에서도, 아침 햇볕의 따스함, 저녁 길거리의 조명, 소나기의 불쑥 찾아오는 소음과 같은 사소한 것들을 좋아했고 사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어느 순간 그것을 그리워한다. 이는 우리의 삶이 결국 내면의 회귀를 지향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이는 다양한 분야에서 나타난다. 근대 사진의 역사와 발전과정에서도 이와 유사한 형태가 나타난다. 


20세기 이전 사진은 고유한 예술로서 인정받지 못했다. 당시의 사진예술가들은 사진을 통해 그림 같은 품질과 예술적 감성을 추구로 그림에 대한 보정의 기능이 강조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근대 사진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알프레드 스티글리츠가 등장하면서 이러한 흐름이 뒤바뀌기 시작했다. 그는 스트레이트 포토그래피를 통해 현실의 직접적이고 정직한 표현을 강조하며, 그림과는 다르게 조작을 배제하고 순수한 형태의 아름다움을 추구했다. 이는 인위적이고 예술적인 접근에 대한 반발로 시작되었다. 


대표적으로 1907년 촬영한 삼등선실(The Steerage)이라는 작품이 있다. 이 작품은 스티글리츠가 유럽으로 가는 배안의 풍경을 촬영한 것이었다. 사진에는 당시 사회적 계급과 이민의 현실을 한 프레임 안에 포착하여 보여준다. 배의 아래에는 하위 계층인 이민자들이 위쪽에는 상위 계층의 여유로운 사람들이 있다. 그렇기에 단순한 기록을 넘어 실제를 전달할 수 있는 독창적 예술로 인정받았다. 그야말로 사진적인 작품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스티글리츠의 예술은 이큐벨런트 시리즈를 통해 자신의 내면을 탐구하기 시작했다. 그는 구름의 형태와 빛의 변화를 담은 이 시리즈로, 사진이 단순히 보는 것을 넘어 느끼는 것까지 포착할 수 있는 추상적인 매체가 될 수 있음을 입증하려 했다. 이큐벨런트는 관찰자에게 미묘한 뉘앙스와 감정의 울림을 전달하며, 보는 이의 내면에 공명하는 강력한 시각적 언어가 된다. 스티글리츠의 예술 여정은 그가 단순한 현실의 기록자에서 시작해 내면적 경험과 감정의 중재자로 변모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하지만 이러한 예술적 변화에 대해 그 누구도 모순이라거나 극단적 변화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인간의 외부세계와 내부세계를 통합해낸 예술적 성장이라고 평가한다. 이는 객관적 사실을 추구했던 그였지만 인간의 주관성과 개인적 해석에 도달한 것이었다.


삶은 우리에게 현실에 안착하라고 이야기하지 않는다. 현실은 단지 어린 시절부터 성인이 되어가는 과정, 직업을 갖고 가정을 이루어가는 여정, 그리고 인생의 후반기를 맞이하는 순간까지, 각각의 단계는 우리를 성장시키는 여러 길들 중 하나를 제시할 뿐이다. 때로는 삶의 여정이 어렵고 복잡하게 느껴질 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 여행을 통해 우리 자신의 한계와 가능성을 발견하고, 때로는 이를 넘어서는 법을 배운다. 그러나 우리에게 정말 중요한 것은 보여주지 않는다. 이는 진정한 가치가 겉으로 드러나는 성공이나 물질적 풍요가 아닐 수 있음을 암시한다.


그렇기에 나는 내가 삶은 살면서 잊고 있었던, 혹은 무시하거나 외면해왔던 그 사소하고 시시한 일들을 꺼낸 것이다. 그 소소한 일상이 바로 우리가 진정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느끼는 순간들이기 때문이다. 삶은 본질적으로는 우리가 창조하고 경험하는 의미의 집합체이기에, 얼마든지 각자가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방식에 따라 다르게 해석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성공의 무게만큼이나, 이러한 일상의 순간들에도 가치가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그래야만 우리는 진정한 자아를 찾고, 자신만의 내면적 평화를 이룰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보면 우리의 삶은 어쩌면 어느 순간 돌아갈 곳을 찾는 과정일 수도 있다. 어린왕자가 마지막에 자신의 별로 돌아간 것처럼, 알프레도 스티글리츠가 내면의 아름다움을 추구하게 된 것처럼, 우리 각자에게도 각자만의 세계로 돌아갈 집이 있어야 한다. 이 내면의 집은 우리의 가치관, 우리의 사랑하는 사람들, 그리고 그곳에 완전한 자신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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