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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nome Nov 19. 2023

새로운 시대를 향하여 PART-1

유럽의 중세에서 로코크까지

우리는 꽤 많은 자유를 누리고 산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수많은 규제와 질서에서 살고 있다. 이 규제와 질서는 사회가 지향하는 올바름을 상징하기에 넘지 말아야하는 선이다. 때문에 자신의 생각이나 행동은 모두 정해진 범위에서만 가능하다. 물론 이러한 구조가 갑자기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오랜 역사의 과정에서 수많은 경험을 통해 만들어진 사회의 균형과 조화다. 인간은 억압을 수용하며 또한 그것에 저항하며 현재를 만들었다. 하지만 이는 우리 자신과 우리가 만든 모든 질서가 그만큼 불완전한 것임을 시사한다. 그렇기에 그것은 또한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어떤 시대라도 인간은 안전과 변화, 적응의 과정을 통해 사회에 다양한 흔적들을 남긴다. 예를 들어 법률, 예술, 과학적 발견과 같은 문화적, 사회적 발전 등이다. 이러한 흔적은 곧 인간의 불완전함과 그에 대한 진지한 반성에서 비롯된다. 우리가 추구하는 삶의 지속성은 결국 이러한 불완전을 보다 완벽하게 만들기 위한 노력에서만 보장된다. 완벽하지 않은 인간은 끊임없이 자신이 상상할 수 있는 범위에서 이상적인 존재를 동경해왔고, 이러한 열망으로 인간은 전지전능한 신을 만나게 되었다. 그것은 편안함을 제공했다. 신의 의도와 목적을 이해하기만 하면 자신의 행동이 올바른지 여부를 판단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유럽의 중세에서는 이러한 인간의 욕구가 종교적 형태로 두드러졌다. 실제로 유럽의 중세에서 종교는 모든 층위에 걸쳐 깊은 영향을 미쳤다. 성직자들은 교육을 담당하였고, 신학은 당시 사회의 지적 탐구와 학문적 발전의 기초를 이루었다. 따라서 이 시기 만들어졌던 많은 예술과 문학은 종교적인 특성이 반영되어 있다. 대표적으로 이 당시 탄생한 고딕 양식의 성당들은 종교적 신념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프랑스의 노틀담 대성당이나 영국의 캔터베리 대성당과 같은 건축물들이다. 이 건축물들은 당시의 종교적, 문화적 중심지였다. 거대한 높이와 복잡한 스테인드글라스, 정교한 조각상은 모두 사람들로 하여금 종교적 가치를 깨우치게 하는 도구였다. 이러한 경향은 문학이나 미술 분야에서도 뚜렷했다. 단테 알리기에리의 '신곡'은 기독교의 구원론과 죄와 벌에 관한 교리를 표현한 이시기를 대표하는 작품이다. 미술도 마찬가지였다. 기독교 성화, 즉 성서의 장면이나 성인들의 생애는 그림들의 중요한 소재였다. 이러한 성화들은 교회나 수도원의 벽에 그려져 대중에게 종교적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했다. 


뿐만 아니라 사회제도와 정치제도 역시 종교의 영향아래 있었다. 이는 종교가 단순히 영적인 영역에만 머무르지 않고, 세속적인 권력과도 밀접하게 연관되는 것을 보여준다. 신의 대리인으로 여겨지는 교황과 성직자들은 자신들의 권위를 앞세워 봉건제도라는 명확한 신분제도에 강력한 지지기반이 되었다. 왕들은 종종 자신의 권력의 뿌리를 신의 뜻에 의해 부여된 '신성한 권위'라고 주장했다. 이런 관념은 '신의 은총에 의한 왕권'으로 발전했으며, 왕들이 절대적인 권력을 행사하는 데 정당성을 부여했다. 또한 귀족들도 자신들의 권력이 신의 은총에 의한 것이라고 여기며, 농민들에 대한 지배를 정당화했다. 이처럼 중세의 계층적 질서와 사회 구조는 종교적 기반위에서 안정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 당시 교회는 사회의 중심적인 기관이었으며, 교황과 주교들도 종교적 권위뿐만 아니라 정치적 권력까지 행사할 수 있었다. 


자연스럽게 이 시기 사람들은 교회의 의식, 기도, 종교적 실천이라는 신학적 가르침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형성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개인들에게 종교는 자연스러운 생활양식이었다. 이는 부인하기 어려운 문화였다.


그러나 강력한 교회의 권위는 곧잘 부패로 이어졌다. 특히 중세 후기는 이러한 현상이 심했다. 많은 성직자들과 교회 지도자들은 성직 매매, 권력 남용 등과 같은 부정행위를 일삼았기 때문에 이러한 종교적 지배에 대한 반발이 강화되었다. 이단 운동은 이러한 반발의 가장 뚜렷한 형태 중 하나였다. 12세기 남부 프랑스에서 발생한 카타리 운동은 물질세계를 악으로 보고 영적 순수성을 추구했다. 이들은 교회의 부패와 세속적 권력에 반대하며, 단순하고 경건한 삶을 살 것을 주장했다. 비슷한 시기에 시작된 발데시안 운동 역시 빈곤의 미덕을 강조하고 교회의 부와 권력을 비판했다. 때문에 발데시안들은 성경의 대중화를 주장하며 평신도에게도 성경 해석의 권한을 부여하려 했다. 그러나 교회는 이러한 운동들을 위협으로 간주하고, 정통 교리에서 벗어난 것으로 규정했다. 그래서 이들을 ‘이단’이라고 불렀다. ‘이단’으로 낙인찍음으로써 엄격한 처벌과 박해의 근거를 마련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저항은 쉽게 끝나지 않았다. 당시의 철학자와 사상가들도 교회의 교리와 권위에 대해 질문을 던진 것이었다. 이들은 종교적 권위보다는 이성과 경험을 중시하는 경향을 보였으며, 종교적 진리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시도했다. 14세기 영국의 신학자였던 존 위클리프는 교회의 세속적 권력과 재산을 비판했고, 15세기 체코의 종교 개혁가인 얀 후스는 위클리프의 사상에 영향을 받아 교회의 개혁을 주장했다.


이러한 비판적 현상은 중세 말기로 접어들면서, 교회와 성직자들에 대한 일반 대중의 태도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사람들은 교회가 사회적, 정치적 권력을 남용하고 있다고 인식했으며, 이는 교회에 대한 신뢰를 저하시켰다. 이처럼 중세 유럽에서는 교회의 권위와 신분 제도에 대한 도전이 점차 커져갔다. 이러한 도전은 당시 사회의 변화를 촉구하는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며, 교회와 사회 구조에 대한 근본적인 변화를 이끌어내는 계기가 되었다.


중세 이후 등장한 르네상스 시대는 중세의 근본적 변화와 교회에 대한 반발적 흐름의 자연스러운 연속선상에 있다. 이 시기는 한마디로 신 중심의 세계관에서 인간 중심의 세계관으로 추구했던 시기라 할 수 있다. 즉 '인문주의'가 부상하면서, 중세와는 극명한 대조를 이루었다. 르네상스는 문자 그대로 '재탄생'을 의미한다. 이는 고대 그리스·로마 문화의 부활과 함께 새로운 예술, 과학, 문학의 추구로 이어졌다.


어떤 의미로는 중세 말기의 종교적, 사회적 도전이 르네상스의 토대를 마련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중세의 교회와 성직자들에 대한 비판적 시각은 사람들이 인간의 이성과 경험을 더 중시하게 하는 배경이었다. 이는 인문주의의 핵심 사상으로 이어졌고, 인간의 가치와 가능성을 추구하는 르네상스의 중심 주제가 되었다. 르네상스 인문주의자들은 고전 문헌을 연구하며, 고대 지식의 재해석을 통해 현대 사회를 이해하려 했다. 이러한 지식 탐구는 중세의 신학 중심적 학문에서 벗어나, 다양한 학문 분야의 발전을 촉진했다.


때문에 르네상스 예술가들은 중세의 종교 중심적 예술과 달리 인간의 신체와 감정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려 했다. 미켈란젤로와 레오나르도 다 빈치 같은 예술가들의 작품은 인간의 아름다움과 복잡한 감정을 표현하는 데 중점을 두었던 이유였을 것이다. 따라서 이는 인간의 경험과 감정을 중시하는 르네상스의 정신을 반영한다.


과학 분야에서도 르네상스는 중세의 교회 중심적 세계관을 넘어섰다. 코페르니쿠스, 갈릴레오 등의 과학자들은 관측과 실험을 통해 우주와 자연 현상을 설명하려 했다. 이들의 과학적 발견은 중세의 지구 중심적 우주관을 뒤집었으며, 인간의 이성과 경험을 통해 세계를 이해할 수 있다는 새로운 관념을 제시했다.


정치적으로도 르네상스는 중세의 신성한 권위에 기반한 왕권과는 다른 방향을 제시했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은 왕의 권력이 신의 뜻이 아니라 인간의 이성과 정치적 능력에 의해 정당화될 수 있음을 주장했다. 이는 중세의 신성한 왕권론과는 다른, 보다 현실적이고 이성적인 정치 이론을 제시한 것이다.


물론 이러한 현상은 종교적 세계관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르네상스가 중세 말기의 사회적, 종교적 변화를 토대로 발전했음은 부인하기가 어렵다. 분명 중세의 종교 중심적 세계관과 신분 질서에 대한 도전은 르네상스가 인간 중심의 새로운 세계관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르네상스는 인간의 가능성과 가치를 중시하며, 고대 지식의 부활과 함께 예술, 과학, 정치 분야에서 새로운 시각을 제시했다. 그렇기에 이는 중세 유럽 사회의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오는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이러한 뚜렷한 변화에도 인간은 만족하지 않았다. 인간에게 이성은 전부가 아니었고 본질적인 마음 즉 감성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르네상스 이후 등장한 바로크와 로코코 시대의 예술은 르네상스의 이성과 균형 중심적 접근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감성과 향락을 강조하게 되었다. 이 시기의 예술과 문화는 인간의 깊은 감정과 열정에 주목하며 그에 따른 사치와 향락을 더욱 자주 표현하였다. 바로크(Baroque)라는 용어의 어원은 포르투갈어 "barroco"에서 비롯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원래는 "규칙적이지 않은 진주"나 "고대 군사 장식"을 나타내는 용어였지만, 이시기 예술의 화려하고 복잡한 스타일을 나타내기에 적절한 단어였을 것이다. 


실제 바로크 예술은 감정의 강렬한 표현과 드라마틱한 스타일로 유명하다. 이 시기의 예술가들은 역동적이고 감성적인 접근을 추구했다. 예를 들어, 카라바조의 작품에서 볼 수 있는 강렬한 빛과 그림자 대비는 감정의 극단적인 표현을 위해 사용되었던 중요한 방법이었다. 특히 “주교 마태와 천사들”은 현실적인 조명과 음영을 사용한 대표적인 작품이다. 주교 마태와 천사들의 동작과 얼굴 표정만으로도 강한 감정을 느낄 수 있었던 새로운 시도였다.


하지만 사람들은 더 새로운 예술을 추구했다. 로코크 시대가 이어진 것이었다. 로코크(Rococo)라는 용어의 어원은 포르투갈어와 프랑스어에서 비롯되었다. 가벼운 감성과 향락, 우아함을 강조하며 부드러운 곡선과 화려한 장식이 특징이다. 이처럼 로코크는 바로크의 웅장함과 역동성을 계승했지만, 그보다는 더 가볍고 우아한 스타일을 강조했다. 특히 귀족 사회의 사치와 향락을 반영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예술가들은 섬세한 장식, 부드러운 곡선, 밝고 화려한 색상을 사용하여 고급스러운 생활 방식을 자주 묘사했다. 이시기 프랑수아 부셰의 대표작인 “그네”에서 로코크의 전형적인 특성이 발견된다. 여성이 나무 그네를 타면서 사랑의 장면이 표현된 이 작품은 로코크 시대의 사회적 관습과 파리 귀족들의 생활을 반영하면서도, 당시 사회의 풍요로움을 반영하고 있다.


이처럼 중세의 강력한 종교적 세계관에서 인간중심의 이성적 접근을 시도한 인류는 르네상스를 열었고, 이로 인해 개인의 감정에 집중하는 현상이 강화되면서 사치와 향락을 강조하는 바로크와 로코크 시대로 이어졌다. 이러한 변화를 통해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것은 개인과 사회의 긴장이 얼마나 중요한 문제인지를 아는 것이다. 새로운 시대는 과거시대의 반불뿐 아니라 그 시대의 다양한 가치 위에서 나타난다. 그렇기에 이는 단순히 미적인 즐거움을 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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