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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nome Nov 21. 2023

손흥민이 잘생겨 보이는 이유에 대하여

아름다움이란 무엇일까? 대체로 아름다움을 규정할 때 시각적, 청각적, 후각적 요소를 포함해 감각적, 정서적, 지적 만족이라는 복합적인 미적 경험을 기준으로 제시한다. 누군가 아름다움을 느꼈다고 말한다면 이는 대상의 외형이나 구조, 색채, 조화, 균형과 같은 물리적 특성과 향기와 같은 후각적 요소를 포함하고 그의 문화적 배경, 개인적 경험, 감성, 심미적 취향까지 포괄하는 종합적 판단의 결과다. 이런 복잡한 과정이 존재한다는 것은 결국 사람마다 느끼는 아름다움이 다르게 나타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에게는 자연의 웅장한 풍경이, 다른 이에게는 미술 작품 속의 모호한 형상이, 또 다른 이에게는 향긋한 꽃의 향기에서 더 큰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그러한 관점으로 고가의 자동차, 미남이나 미녀, 자신이 좋아하는 그 무엇에서도 자신만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아름다움은 단순히 눈에 보이는 객관적 분석을 넘어, 개인의 주관적 감정으로 자신만의 기억을 만든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생각하는 아름다움에는 공통적인 부분이 존재한다. 이는 매우 흥미로운 상황이다. 주관적 인식은 자신만의 특별함을 반영하지만 모든 사람이 같은 인식을 갖는다면 그것은 더 이상 특별한 것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과학자들은 인간의 생물학적, 심리적 본성과 깊이 연결되어 있음을 주장한다. 인간의 뇌는 특정 패턴, 색상, 형태에서 보편적으로 기쁨이나 만족감과 연결 짓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인간은 인식밖에 존재하는 자연에서 특정 비율, 예를 들어 황금비와 같은 것들을 찾아냈다. 그래서 자주 예술, 건축, 디자인 등 다양한 영역에서 아름다움의 표현방식으로 사용하곤 했다. 사람들은 이처럼 조화롭고 균형 잡힌 물체나 환경을 아름답다고 느꼈고 좋아했다. 


그렇다면 우리가 직관적으로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은 결국 아름다움에 대한 객관화된 기준이 있다는 것이다. 이는 곧 뇌의 정보처리 방식과 관련되어 있음을 짐작하게 한다. 조화롭고 균형 잡힌 물체가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물체보다 정보를 처리하기 쉬웠을 것이고, 인간은 빠르게 안정감과 편안함을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아름다움은 대칭과 균형적 요소가 중요한 기준이 될 수 있다. 그렇다면 대부분의 문화에서 대칭적인 얼굴을 더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경향은 지극히 당연한 이야기가 된다. 


이와 관련하여 뇌과학자들은 단순하게 발생한 우연한 현상이 아니라 뇌의 인지 기능이 수행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화학적 변화, 즉 호르몬의 분비와 관련이 있다고 말한다. 누군가가 어떤 경험을 할 때 뇌에서 도파민이 분비된다면 안정감과 편안함을 느끼게 된다. 이는 외부의 상황이 긍정적으로 받아들인 뇌가 분명한 신호를 보내는 것이다. 따라서 도파민과 같은 신경화학물질이 우리에게 최종적으로 아름답다는 감각적 판단을 내릴 근거를 마련한다. 그렇다면 도파민이야말로 아름다움의 보편적 인식에 가장 결정적 역할을 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무엇을 좋아하게 될지 싫어하게 될지 관련하여 뇌의 인식작용 즉, 호르몬이 영향을 미친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왜 그러한 것을 좋아하거나 싫어하게 되는지에 대한 명확한 설명은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아름다움이 지니는 균형과 조화라는 보편적 속성에도 불구하고, 개인의 문화적 배경이나 경험은 뇌의 반응보다 선행적일 수밖에 없다. 특히 인과적 체계의 합리적 기준에서는 이순서가 매우 중요하다. 뇌의 반응이란 선행되는 자극에 대한 결과이기 때문에 동일한 형태의 자극이라는 전제에서는 반드시 같은 감정적 결과로 이어져야한다. 하지만 그 수용정도는 매우 복잡한 관계에 의해 결정되는 현상도 나타난다. 


예를 들어 어두운 밤과 같은 경험들이다. 어두운 밤은 확인되지 않는 상황에 놓인 자신을 인식하는 것이어서 공포나 불안을 불러온다. 이 경우 우리는 어둠을 뚫고 나오는 찬란한 별빛을 아름답게 느낀다. 하지만 반드시 그러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빛은 어둠을 방해하는 요소로 인식하는 경우도 있으며, 이 경우 별빛은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어둠의 아름다움을 방해하는 역할로 인식할 수도 있다. 이러한 감각은 우리가 가진 어떤 좋음과 싫음이 상황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우리가 인식하기 이전에 아름다움이 존재하는지는 여전히 판단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여전히 개인이 갖는 특수한 사회적, 문화적 요소들과 아름다움의 상관관계는 보다 복잡한 문제로 이어진다.


이러한 상황에서 내가 갖는 의문은 두 가지다. 하나는 아름다움은 객관적 실체, 즉 본질적이고 절대적인 아름다움이 존재하는지에 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만약 아름다움의 추구가 도파민에 의한 것이라면 그것을 인간의 본능에 의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다.


고대 플라톤은 아름다움에는 절대적인 본질이 있다고 주장했다. 플라톤이 제시한 아름다움은 그의 이데아론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는 이데아를 현실 세계의 모든 사물과 개념의 근원으로 보았다. 이데아는 변하지 않으며, 영원하고 순수한 본질을 지닌 영원의 공간이었다. 아름다움은 이러한 인식적 기반위에서 성립한 개념이다. 따라서 현실세계를 살아가는 인간의 아름다움에 대한 경험은 이 이데아의 불완전한 반영에 불과하다. 불완전한 현실에서 이데아를 흉내 내어 이해를 제공하는 수단일 뿐이다. 따라서 본질적인 아름다움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플라톤에게 아름다움은 어떤 경우라도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영원함을 의미했다. 그렇다면 인간은 현실세계에서 아름다움을 경험할 수 없고, 오직 추정만 가능하다. 때문에 우리의 경험에 의해 규정된 아름다움은 그 어떤 것이라도 본질적인 것이 아니게 된다. 한마디로 있기는 있는데 경험할 수 없다는 말이다.


그러나 플라톤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는 다른 의견을 갖고 있었다. 플라톤이 이데아의 세계, 즉 이상적이고 변하지 않는 형태를 강조한 것과 대조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는 현실 세계와 구체적인 사물들에 더 큰 중요성을 두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아름다움은 객체의 구체적인 형태와 기능에서 비롯된다. 그는 아름다움을 일정한 크기와 질서를 갖춘 것으로 보았으며, 특히 비례, 질서, 그리고 결정성을 아름다움의 중요한 요소로 간주했다. 이러한 요소들은 사물이나 예술 작품이 가지는 조화롭고 균형 잡힌 구조에서 드러난다.


때문에 아리스토텔레스는 사물이나 예술 작품이 그것의 본질적인 목적을 잘 수행하고 있을 때 그것은 더욱 아름답다고 여겼다. 이는 플라톤의 이데아와는 달리, 구체적이고 실용적인 측면에 더 큰 가치를 두는 시각이다. 따라서 이때 아름다움은 사물이나 작품이 명확하고 구체적인 형태를 갖추고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사물의 본질적 속성을 반영하여 형상을 갖는 것, 즉 사물의 형태가 그것을 따르는 것을 아름다움의 본질이라고 본 것이다. 이러한 인식은 단지 이데아에 있는 완벽함이 아니라 이데아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라는 점에서 플라톤보다 세속적인 속성을 반영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 주장은 플라톤의 경험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보안한 것이다. 따라서 현실에서 경험할 수 있는 아름다움이 존재하며, 그것은 아름다움의 본질을 반영할 때 가능하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만일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인식이 올바른 것이라면 어떤 시대나 장소에서도 일관성을 갖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추구한 아름다움은 종종 다른 형식이 자주 발견된다. 예를 들어 한국의 반가사유상이나 한옥과 같은 건축물은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아름다움에 대한 규정과는 전혀 다른 형식이었다.


먼저 한국 불교 예술의 상징적인 작품인 반가사유상은 불교의 깊은 철학적 의미를 담고 있다. 특히 자연스러움과 인간적인 아름다움을 강조한다. 반가사유상의 대표적인 특징 중 하나는 그 비대칭성에 있다. 전통적으로 반가사유상은 한 손은 가슴에 대고 다른 한 손은 무릎 위에 두는 포즈를 취한다. 이러한 자세는 자연스러운 움직임과 안정감을 표현하며, 형식에 구애받지 않는 자유로움을 나타낸다. 또한, 반가사유상의 미소는 인간적인 온화함과 평온함을 전달하며, 관조적인 아름다움을 표현한다. 


또한 전통적인 한국 건축물은 자연과의 조화를 중요시하는 특징을 보인다. 한옥이라 불리는 전통 가옥은 주변 환경과의 조화를 이루며, 건축물 자체가 자연의 일부처럼 보이게 하는 디자인 철학을 반영한다. 예를 들어, 한옥의 지붕은 부드럽게 휘어진 형태로 자연스러운 곡선미를 강조한다. 또한, 한옥의 내부 구조는 기능성과 실용성에 중점을 둔다. 방과 마루, 그리고 한옥의 중심이 되는 대청마루는 가족 구성원들의 생활 방식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이러한 한국예술이 추구한 아름다움은 플라톤의 이데아에 근거한 아름다움이나 아리스토텔레스가 강조한 사물의 질서나 비례적인 조형적 특성에서 요구되는 아름다움과는 다른 것이었다. 이는 서양과 동양이 독특한 문화적 가치와 철학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차이는 왜 발생할까? 이와 관련해서 칸트는《판단력 비판》라는 저서를 통해 설명하고 있다. 칸트는 아름다움에 대한 판단이 주관적이면서도 보편적인 성질이 있음을 강조한다. 이는 아름다움의 판단이 개인의 감정과 연관되어 있으며, 이는 개인적인 경험과 문화적 배경에 따라 달라질 수 있음을 나타낸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한국의 반가사유상이나 한옥과 같은 건축물이 서양 철학자들이 제시한 아름다움의 기준과 다를 수 있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해당 문화권 사람들에게는 주관적으로 즐거움을 주고 보편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아름다움이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아름다움은 문화적 맥락에 따라 얼마든지 다양한 형태로 나타날 수 있으며, 인간의 주관성과 보편성 사이의 긴장을 통해 인식될 뿐이다.


그렇다면 아름다움에 대한 판단이란 결국 특정한 개념이나 목적 없이 감각적 경험에 기반한다고 말할 수 있다. 칸트는 이러한 미적 쾌감을 '무이해의 쾌감'이라고 불렀다. 경험하는 개인의 특정한 이해관계나 욕구와는 독립적인 순수한 아름다움의 경험을 지칭한다. 이는 어떤 아름다움에 대한 인식이란 감상자가 느끼는 '쾌감'을 통해 이루어지며, 이 쾌감은 모든 인간에게 공통적으로 호소할 수 있는 '보편적 취향'의 기초 위에 세워짐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러한 인식에는 인간이 공통된 감정 구조를 가지고 있음을 반영한다. 

칸트는 모든 인간이 공유하는 '미적 감각'을 통해 아름다움을 인지하며, 이러한 공통된 능력이 아름다움에 대한 우리의 판단을 형성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마치 도파민에 의한 감각적 감정적 경험이 만들어낸 허상과도 유사하다. 


하지만 이때 보편적 아름다움은 개인의 주관적 경험을 넘어선다. 왜냐하면 유사한 경험은 때론 다른 사람들에게도 호소력을 가지며, 이를 통해 미적 가치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확장시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우리의 아름다움에 대한 판단이 감정적이며 감성적인 성향을 지니고 있음과 더불어 성호관계에 의해 완성되고 있음을 나타낸다. 따라서 아름다움에 대한 판단은 단순히 물리적 속성이나 형태에 국한되지 않고, 관찰자의 감성적 반응과 소통에 깊이 연결되어 있음을 시사한다. 


그렇다면 아름다움에 본질이 있다던가 아니면 우리가 추구하는 아름다움이 존재한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물론 여전히 아름다움에 대한 우리의 일반적 인식은 대개 외모나 자연 풍경, 예술 작품 등에서 오는 미적 즐거움과 관련이 있다. 또한 사람들은 아름다움을 물리적 형태와 연관시키는 경향도 존재한다. 그러나 이러한 인식은 때때로 피상적이고 제한적일 수 있음도 분명하다. 


나는 과거 손흥민이라는 축구선수가 축구는 잘하지만 전형적인 미남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물론 그는 균형 잡힌 체형, 매력적인 미소, 우아한 매너와 자신감이 돋보이는 사람이었지만, 그것만으로 미남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었다. 나에게는 분명하고 명확한 아름다움의 기준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대체로 마음이 끌리는 향기로운 꽃, 감동적인 음악, 강렬한 일몰의 색과 같은 전형적인 것들이다. 그러나 최근 나의 이러한 생각에 변화가 나타났다. 손흥민 선수가 상당한 미남으로 보인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가 매우 아름다운 사람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이런 변덕은 나에게는 종종 있는 일이었다. 나는 자주 아름답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다양한 이유에 의해 의미가 없어지거나 또는 아름답지 않은 것으로 인식되는 경우가 있었다. 그렇다면 나에게 있어 아름다움이란 과연 무엇일까? 나는 왜 손흥민 선수를 아름답다고 생각하게 되었을까? 이는 단순한 감각적 경험인가, 아니면 더 깊은 정서적, 지적 반응일까? 나는 왜 아름다움에 대한 일관성이 없을까? 


그러한 의미에서 볼 때 손흥민 선수에 대한 나의 인식적 변화는 어쩌면 그의 겉모습이 아니라 성공이라는 맥락과 연관이 있지는 않을까. 그는 부인하기 어려울 정도로 축구 분야에서의 놀라운 성취를 보여줬고, 그 성취는 곧 '성공적인' 이미지로 연결되었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나의 보편적인 미남의 이미지에 영향일 끼쳤을 것이고 자연스럽게 성공이라는 타이틀이 그 자리를 차지했을 것이다. 이러한 경험은 나에게 자주 있었다. 손흥민 선수뿐 아니라 나는 아름답지 않다고 생각했던 다른 대중 연예인들이 어떤 계기를 통해 미남 미녀로 보이곤 했다. 이들에 대한 개인적 매력은 변한게 없다. 단지 변한 것이라고는 공적 공간에서의 그들이 보여줬던 성취뿐이다. 그렇다면 그 성취를 바라보는 나의 인식에 긍정적인 이미지를 형성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따라서 외모에 대한 나의 인식적 변화는 전통적인 미의 관점을 넘어설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처럼 우리는 대상 자체가 아니라 대상이 만들어내는 요소들에 의해 생각이 바뀐다. 손흥민 선수의 경우처럼 친근한 미소, 겸손한 태도, 그리고 대중과의 상호작용은 미적 경험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이고, 또한 그의 성취는 이러한 요소를 강화했을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복합적인 작용을 계기로 그를 '잘생긴' 선수로 인식하게 되었음이 분명하다. 그러한 면에서 칸트가 주장한 아름다움에 대한 판단이 주관적이면서도 보편적인 감정의 공유를 통해 이루어진다고 설명은 충분히 설득력을 갖는다. 즉, 내가 누군가를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은 개인적인 경험에서 비롯되지만, 이 경험은 공동체 내에서 공유될 수 있는 보편적인 요소까지 반영하면서 발생한 감정이기 때문이다. 


이런 예시는 다양하게 나타난다. 시골길을 걷다보면 자주 느끼는 퇴비냄새는 또 어떤가? 그것은 전혀 아름답지 않은 냄새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농부에게 퇴비의 향기는 아름다울 수 있다. 퇴비에 대한 인식이 다르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일 것이다. 이처럼 아름다움에 대한 인식은 사회적, 문화적 요소에 의해 형성된다. 그렇다면 아름다움에 본질이 있거나 인간의 본성에 의한 것이 아니라 상대적이고 주관적임을 의미한다. 그렇기에 아름다움은 단일한 표준이 아닌, 다양한 형태와 표현을 가질 수 있다. 따라서 아름다움이란 보편적인 형식을 취하면서도 때때로 모순적으로 나타난다.


분명 아름다움의 본질에 대한 탐구는 또한 철학, 예술, 심리학 등 다양한 학문 분야에서 중요한 주제다. 실제 철학자들은 아름다움이 주관적인 감정의 반영인지, 아니면 보편적인 진리를 반영하는 것인지에 대해 논쟁해왔다. 예술가들도 자신의 작품을 통해 아름다움의 다양한 형태를 탐구하며, 심리학자들은 아름다움이 인간의 정서와 행동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연구한다. 이는 아름다움이 인간의 감각적 경험을 넘어서 깊은 정서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아름다움의 본질에 대한 질문은 결국 우리가 세계를 어떻게 인식하고, 그 속에서 어떻게 살아가는지에 대한 깊은 성찰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사람들은 종종 아름다움을 보고 느낄 때 강렬한 감정적 반응을 경험하지만 이는 아름다움의 본질에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게 느끼는 하나의 자극에 불과해 질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반응은 단순한 취향이나 선호를 넘어서는 것으로, 아름다움이 갖는 본질에 접근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물론 아름다움이 절대적인 것이라고 보는 것이 반드시 잘못된 것이라거나 오류라는 의미는 아니다. 단지 아름다움이란 때때로 시대와 문화를 넘어서는 우리의 이상을 상징할 수 있음을 되돌아보길 바라는 것이다. 여전히 우리는 특정한 자연 풍경이나 예술 작품은 전 세계 다양한 문화와 시대에 걸쳐 아름답다고 말한다. 또한 아름다움을 통해 삶의 의미, 진리, 심지어 영적인 경험을 체험한다. 이는 아름다움이 특정한 문화적, 역사적 맥락에 국한되지 않고, 인류 공통의 감각적, 감정적 반응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는 어떤 면으로는 아름다움이 단순히 물리적이거나 감각적인 것을 넘어서는, 인간의 본질적인 추구와 깊이 연결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아름다움은 인간의 내면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는 어떤 보편적이고 근본적인 가치를 추구하려는 것이다.


다만 현대 사회에서의 아름다움에 대한 판단은 이처럼 개인의 내면적 감정과 사회적 규범 사이에서 상충될 수 있음도 분명하다. 그러나 이 두 요소가 꼭 대립적일 필요는 없다. 오히려 상호 보완적인 특성이 있음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 개인이 사회적으로 강화된 미의 기준을 내면화하는 과정에서, 그들의 주관적 경험은 얼마든지 다른 사람들과 공유되는 아름다움에 대한 보편적인 감각을 형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단지 '공공의 취향'이 내가 추구하는 아름다움과 일치하는가에 대한 의문을 포기하지는 말자. 대중적인 미의 기준이 아름다움에 대한 일련의 형식을 강요할 수 있으나, 개인이 느끼는 아름다움에 대한 판단은 이러한 외부 요인을 넘어설 수 있다. 이는 우리가 예술작품, 자연 경관, 일상의 사물에서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이 단지 사회적으로 구축된 이미지에만 기반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내부적 감정과 직관에 의해 크게 좌우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때론 자신이 생각하는 아름다움과 다른 것을 아름답다고 말하는 것에 대하여 너그러워질 필요가 있다. 실제 혐오와 매력의 관계는 우리가 쉽게 생각할 만큼 간단한 주제는 아니다. 아름다움에 본질이 있다거나 그것이 본능에 의한 정해진 상이 있다는 생각보다야 낭만적인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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