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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지음 May 24. 2022

성급한 과몰입의 실패

정지음, <우리 모두 가끔은 미칠 때가 있지> 중에서

얼마 전엔 정신과에 찾아가 새 책 집필이 잘 안된다는 고민을 털어놓았다. 일해야 하는데 너무나 눕고 싶고, 실제로도 하루의 절반 이상을 침대에서 보낸다는 고백이었다. 어릴 때부터 가능한 모든 일을 누워서 처리했기에 새삼스러운 현상은 아니었다. 하지만 작금의 상황은 예전과 달랐다. 눕는 행위가 전처럼 편하지 않았던 것이다. 몸을 쉬면서도 묘하게 곤두선 스스로의 기색에 마음이 소진되는 기분이었다. 이런 식의 무기력이 무럭무럭 자라나면 우울증 이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직 심각하지 않았지만, 심각해지기 전에 우울증 약을 한 바가지 먹고 싶었다. 그러나 이야기를 들은 선생님은 의외의 질문을 할 뿐이었다. 


“지금 《젊은 ADHD의 슬픔》 나온 지 얼마나 됐죠?” 

“한 달인가? 두 달이요.” 

“그렇다면 지금은 쉬어야 할 때입니다.” 

“하지만 계약을 해버렸고, 첫 책 쓰는 데도 몇 개월 안 걸렸는데요.” 

“집필 기간만 따지면 안 되지요. 글로 묶는 데 비교적 짧은 시간이 걸렸을 뿐, 그 책의 토대는 정지음 님이 ADHD로 살아온 세월 자체잖아요. ADHD로는 몇 년을 살았죠?” 

“30년이요.” 

“그렇다면 그 책의 준비 기간은 30년이라고 보아야 해요.” 

“헉.” 


그때 갑자기 《젊은 ADHD의 슬픔》이 좀 더 특별해졌다. 나조차 허겁지겁 프로젝트(공모전 당선과 동시에 출간 날짜가 정해졌다)라 여기던 첫 작품이 어떤 시각에서는 장기 프로젝트로 해석된다는 사실 덕분이었다. 선생님은 내가 느끼는 조바심에 수치스럽고도 정확한 이름을 붙여주기도 했다. 


“출판사에서 원고를 독촉하는 상황이 아니라면, 현재의 심정은 ‘성급한 과몰입의 실패’일 뿐입니다. 정지음 님 본인이 실패한 게 아니고 본인의 ‘과몰입’이 실패한 거예요. 그러니까 쉬어주란 말씀입니다⋯⋯.” 


집에 돌아오면서는 간만에 많은 생각을 했다. 생각이야 늘 많이 하지만, 바깥의 공기가 뇌 속으로 들어와 주름과 주름 사이 먼지를 훑어내고 퇴장해주는 느낌의 상념은 오랜만이었다. 게다가 성급한’, ‘과몰입’, ‘실패’ 세 가지 낱말은 이미 내 인생을 대표하고 있던 표제어라 봐도 좋았다. 그 단어들의 면면이 전부 나의 약점이었기 때문에 그것들의 조합이 해답 비슷한 것으로 작용하리란 기대를 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성급한 과몰입의 실패’란 개념은 그 후로도 여러 번 적재적소의 브레이크가 되어주었다. 실패로 여겨지는 상황이 닥칠 때마다 이것이 나라는 인간의 실패인지, 아니면 나의 고질적 습관 ‘과몰입’의 실패인지 생각해볼 수 있었다. 신기하게도, 돌이킬 수 없는 실패들은 거의 없었다. 대부분 고착화된 ‘습관들’의 사소한 실패였고, 해결을 위해 나 자체를 뜯어고칠 필요도 없었다. 나를 그대로 두되 나쁜 습관들을 조금씩 뒤집으려는 노력만 해도 상황은 많이 바뀌었다. 


어리둥절할 때의 나는 차라리 확 튀어보는 편이었다. 완전히 반대편에서 신선한 실패를 학습하면, 기존 방식과 새로운 방식 사이의 중도를 찾기 쉬웠다. 나는 ‘성급한 과몰입의 실패’라는 현상의 대척점을 ‘느긋한 방치의 성공’으로 두고 그 지점을 갈구하기 시작했다. 일단은 억지로 붙잡고 있던 원고들을 팽개치고 다시 안락한 침대 속에 틀어박히는 것이었다. 세상에나! 그렇게 편할 수가 없었다. 

하루 종일 누워 있자니 그간의 인생이 구린 영화처럼 펼쳐졌다. 


‘성급한 과몰입’은 글 작업과 일상뿐 아니라 인간관계에도 너른 영향을 주고 있었다. 나는 사람 보는 눈이 전혀 없음에도 사람에 대한 판단만큼은 기민했다. 특히 새로운 친구나 연인 후보 앞에서는 늘 무도회에 지각한 초보 공작새처럼 굴었다. 저 사람이 1초라도 빨리 나를 좋아할 수 있도록, 그래서 내가 그 사실에 안심할 수 있도록 속전속결 나를 펼치려 들었다. “봐, 이것이 나의 꼬리깃이야. 제발 예쁘다고 말해줘!” 하며 전전긍긍하는 식이었다. 찰나의 어필로 상대방의 마음을 얻었다면, 그는 내게 좋은 반응을 주었다는 이유로 좋은 사람이었다. 반대로 빠르고 과잉된 내게 거부나 부담을 표시한다면 우리 사이는 끝이었다. 아직 아무것도 시작된 적 없다는 사실은 고려되지 않았다. 나는 빠른 결정이야말로 쿨하지 않으냐 떵떵거렸지만, 실은 불가능해 보이는 타인들을 배제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던 것이다. 


느긋하게 생각한다고 모두를 내 인연으로 포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인내를 들인 만큼 관계의 종결이 와도 편안하게 납득할 수는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귀한 재화 ‘시간’을 두고 보았는데도, 내 방식이 아닌 다른 방식까지 써봤는데도 아니라면 진짜로 아니겠거니 수긍이 되는 것이었다. 그때 비로소 사람 사이는 ‘물 흐르듯 흘러가야 한다’라는 관용적 표현에 대한 이해가 생겼다. 여태까지의 내 방식은 ‘물 흐르듯’이 아니라 물살의 지배자가 되려는 억지에 불과했다. 


나중에는 끝이라 확정지었던 인연들이 새로워지기도 했다. 완연한 끝이 아니라 휴식이 필요했던 관계, 잡기 위해서가 아니라 놓기 위해 맹목을 발휘해야 했던 사람들이 우수수 떠올랐다. 그러자 머릿속을 헤엄치는 사람들 모두에게 장문의 안부 인사를 보내고 싶어졌다. 다 보낼까? 몇 명에게만 골라 보낼까? 구구절절 쓰지 말고, 메시지 내용을 짧고 담백하게 줄여볼까? 생각하다가 아무에게도 연락하지 않았다. 바로 지금 이 마음이 성급한 과몰입이고, 나는 조금 더 성숙한 억제를 배울 필요가 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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