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The Brothers Karamazov)*』은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가 남긴 불후의 명작이다. 민음사 기준, 1600쪽을 훌쩍 넘는 방대한 책의 하이라이트이자 가장 중요하다고 평가받는 에피소드는 다름 아닌 제5권의 「대심문관(The Grand Inquisitor)」이다. 「대심문관」은 인간과 자유와 신에 대한 관념을 집대성한 책 속의 책, 대서사 속의 소서사로, 작중 인물인 이반 카라마조프의 창작품으로 소개된다. 산타크로체 대학교의 철학 교수 안토니오 말로는 이 챕터가 소설의 핵심이라 평가했으며 (Malo, 2017), 저자 자신도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대심문관」이 수록된 제5권이 소설의 ‘정점’이라 언급한 바 있다 (Mochulsky, 1971: 868). 현학적 감수성과 대중적 인지도가 같이 가는 경우는 드물다. 그러나 본 에피소드는 철학적 무게 만큼이나 '유명'하다. 필자 또한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접하기 전부터 「대심문관」의 내용을 알고 있었다.
「대심문관」의 (소설 속) 창작자는 이반 카라마조프다. 이반은 도스토예프스키가 『죄와 벌(Crime and Punishment)』의 주인공인 라스콜리니코프 때부터 기획한 '철저한 이성론자의 철학적 완성체'로, 이성과 의심을 상징하는 무신론적 지식인이다. 반면 독자와 함께 이야기를 듣는 위치에 있는 알료사 카라마조프는 이반의 안티테제다. 알료사는 '신앙'을 상징하는 독실하고 선량한 수도사인데, 소설 내내 삶에 대한 공격에 삶 자체로 응수하는 역할을 떠맡는다 (최인선, 2019).
이반은 고향의 어느 술집에서 자신의 동생인 알료사를 만난다. 그리고 선하지만 '순진한' 동생에게 자신의 신학에 대해 조곤조곤 설명한다. 그는 신의 존재는 인정하겠지만, 신이 창조한 세상은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한다. 신의 원리가 현실의 인과에 반하기 때문이다. 신이 진실로 선하다면 인류에게 선한 원리가 주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다르다. 이 세계는 신의 선함을 언급하는 것이 부끄러워질 정도로 갖은 악을 품고 있다. 그중 이반이 참을 수 없는 것은 무고한 자들이 받는 고통이다. 대표적인 예는 어린 아이들이다. 이반은 '무고한 자들이 받는 고통은 어떤 이유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며 어린 아이들이 고통 받아야만 하는 세상을 만든 신을 거부한다. 이것이 이반의 무신론의 원인이다 (Malo, 2017).
이러한 이반의 견해, 그리고 그의 신학과 엮여있는 인간관과 자유에 대한 담론을 한 편의 '서사'로 풀어낸 것이 바로 「대심문관」이다. 「대심문관」은 무겁다. 무겁고 심오하다. 이반은 자유를 누리기에 너무나 연약한 존재인 인간의 내재적 약점을 냉철하게 분석하고, 신의 대속 사역이 필연적으로 대심문관의 등장으로 귀결되었음을, 그래서 결국 실패하였음을 설득력 있게 논증한다. 이반의 서사로 들어가보자.
소설의 배경은 19세기 러시아이지만, 「대심문관」의 배경은 러시아가 아니다. 근대도 아니다. 매일 화형대의 장작더미에서 불길이 타오르고 이단들의 타들어가는 살냄새가 가득했던 종교재판 시대, 15세기 스페인 세비야다. 절대권력을 쥔 대심문관이 백 명의 이단을 화형시킨 다음날, 예수 그리스도가 지상에 조용히 강림한다. 1500년 전 자신이 유대를 거닐며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했을 때와 동일한 모습과 복장으로 말이다. 사람들은 굳이 말하지 않았는데도 그가 재림한 그리스도임을 깨닫고 다가온다. 그리스도는 광장에서 죽은 소녀를 되살리는 기적을 행한다. 대심문관이 목격하게되고, 친위대를 급파해 즉각 체포한다. 그리스도는 지하 감옥에 투옥된다. 아흔 살의 대심문관은 그를 은밀히 찾아가 묻는다. “당신이 그요? 정말로 그인 게요? 대답은 필요 없소. 잠자코 있으시오.” 곧 신에 대한 대심문관의 책망이 시작된다. 신은 왜 나약한 인간에게 자유를 주어 영원한 시험의 고뇌 속에 살게 했는가? 대심문관은 그리스도를 화형시키겠다고 으름장을 놓는다. '인류에게 감당하지 못할 자유라는 짐을 주었다'는 죄명으로.
대심문관은 신에 대한 분노로 가득 찬 이반의 분신이다. 그에 따르면, 인간은 정말이지 무력하고 비천한 미물이다. 신은 왜 그런 인간에게 '자유'를 선물하여 영원한 시험의 고뇌 속에 살게 했는가? 정말로 인간을 위했다면, 신은 처음부터 기적(miracle)과 신비(mystery)와 권위(authority)를 통해 사람들을 자신에게 순종시켰어야 했다. 신은 사랑으로 위장했으나 무책임했다.
그리스도는 광야에서 기적, 신비, 권위를 요구하는 마귀의 유혹을 모두 거부했다. 그로써 기적과 신비와 권위로부터 자유로운 신앙을 선물했다. 그러나 대심문관은 이에 분노한다. 그런 자유를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소수 뿐이라는 것이다. 오히려 대부분의 평범한, 정말이지 너무도 '평범한' 사람들은 기적, 신비, 권위가 없다면 그런 고차원적인 믿음을 품을 수가 없다.
1. 그리스도는 돌로 빵(떡)을 만드는 '기적'을 제공했어야 했다. 여기서 빵은 '물질'로 대변되는 세속적 가치 전체를 의미한다. 인간은 자신의 내면에서 존재의 본래성과 신의 섭리를 발견하기엔 연약하고 우매하다. 신은 기적 없이 신앙을 발견하는 것이 진정한 '신앙의 기적'이며, 이것이 자유의지를 선물한 궁극적 이유라 말한다. 그러나 대심문관은 반론한다. 인간에게 진짜 필요한 것은 하늘의 양식이 아닌 지상의 양식이라고 말이다. 사람은 형이상학적 자유가 아니라 물질을 제공하는 자를 숭배한다. 인간은 연약하다.
2. 그러나 빵이 전부는 아니다. 인간존재의 비밀은 물질을 통한 생존이 아니다. 바로 '무엇을 위해 살 것인가'라는 도덕적 양심에 있다. 인간은 삶의 목적으로 숨쉬는 존재다. 위하여 살 것이 없다면, 인간은 스스로를 박멸할 것이다.
"왜냐면 인간 존재의 비밀은 그저 사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위해서 살 것인가에 있으니까. 자신이 무엇을 위해서 사는가에 대한 확고한 관념이 없다면 인간은, 설령 그의 주위가 온통 빵 천지라 할지라도, 사는 것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며 지상에 남느니 차라리 스스로를 박멸할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인간이 나약하다는 것이다. 인간은 나약해서 선물로 받은 자유의지로 올바른 삶의 목적을 설정할 수가 없다. 자유는 부담스럽다. 인간은 스스로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할 지 규정할 수 없기에, 이를 제시하는 자, 곧 삶의 목적이라는 신비를 제공하는 자에게 양심과 자유를 맡기고 맹목적으로 따르려는 경향이 있다. 신은 자유나 양심이 아닌 삶의 지표를 명확히 제시할 수 있는 '신비'를 선물로 주었어야 했다.
3. 신이 인간에게 준 자유는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는 절대권력을 양산한다. 그리스도는 지상에서 왕국을 건설해 자유가 아닌 인류의 화합을 만들어낼 '권위'를 제공했어야 했다. 신은 카이사르로부터 검을 빼앗아야 했다. 그런데 정작 신은 천국의 낙원만을 제시했을 뿐, 지상의 권위는 전혀 보여주지 않았다. 신처럼 무책임하지도 않고, 신처럼 인간의 연약함을 모른 채 하지 않는 대심문관인 나는 카이사르의 검을 쥐고 기적과 신비를 보이며 인류를 화합해 나갈 것이다.
신은 대속의 사역을 통해 자유를 주었다. 그런데 신이 모든 것을 감내하면서 베푼 '자유'는 오히려 불행만을 낳았다. 인간은 사실 (기적을 위한 믿음이 아닌) 믿음을 위한 기적을, 양심의 부담을 덜어줄 맹목적인 신비, 인류를 화합할 카이사르의 검을 원한다. 인간은 지상의 빵을 위해 자신의 자유를 헌납하고, 자신을 "대신하여" 삶의 목적을 규정해주는 자들에게 자신의 양심을 굴복하고, 권력 앞에 자신의 자유와 양심을 반납한다. 인간은 정말이지 나약한 존재다. 인간은 자유를 감당할 능력이 없다. 인간이 원하는 신은 그리스도처럼 형이상학적 자유를 선물하는 신이 아닌 인간의 보편적 수요를 채우는 신이다.
대심문관은 자신이 신의 실패를 바로잡고 있다고 말한다. 자신도 한 때 신을 전심으로 경배했다고 말한다. 광야의 선지자들처럼 누구보다 청빈하게 생활했다. 그러나 겨우 진리를 깨닫고 오래 전부터 이 진리를 깨닫고 있는 무리화 합세하였다. 그는 카이사르가 되었고 '겨우' 현실 속에 질서라 부를 수 있는 것을 구축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강림은 이런 질서를 다시 흐뜨러트릴 것이고 지상은 다시 지옥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대심문관은 그리스도를 화형시키겠다고 말한다.
“이리저리 낯선 길로 양떼를 쫓아버린 게 대체 누구였소? 내일이면 당신도 그 온순한 양떼를 보게 될 것이오. 내가 손 한 번만 보여도 앞다퉈 달려 나와 당신을 불태울 장작더미에 시뻘건 탄 덩어리를 던져 넣을 테니까. 이건 순전히 우리를 방해하러 온 당신 책임이오.”
그리스도는 이 모든 말을 묵묵히 들었다. 대심문관의 말이 끝나자 그에게 가볍게 키스를 했다. 대심문관은 예수를 풀어주었고, 다시는 나타나지 말 것을 요구한다. 대심문관은은 다시 이전과 같은 삶을 살아간다.
최인선 교수에 따르면,「대심문관」의 핵심은 "인간 안에 있는 신비를 파악하지 못한 채 공리주의적 행복을 위해 신과 자유를 거부하는 존재의 본원적 한계에 대한 비판"이다 (최인선, 2019). 인간은 자유의 진정한 의미를 인식하지 못하고, 신이 준 고차원적인 선물에 대해서 너무도 무감각하다. 이반은 이를 냉철하게 분석하여 그리스도에 대한 반항심을 「대심문관」을 통해 논리적으로 피력했다. 이반의 대심문관은 개인으로서는 무신론이 낳은 허무함을 극복하고 일어난 니체주의적 초인인 동시에, 사회적으로는 전체주의적 독재자다 (Malo, 2017). 이문열 작가는 자신의 소설 『사람의 아들』에서 이반의 대심문관을 '아하스 페르츠'라는 인물로 재창조하여 그리스도와 대면시켰다:
"당신은 우리가 실현할 수 없는 사랑을 설교해 백 명 가운데 아흔아홉을 죄인으로 걸러버리더니.
(...) 당신은 인간의 죄를 사하러 온 게 아니라 더하러 왔소 (이문열, 2020: 307; 309)."
필자는 여기서 이반 카라마조프가 「대심문관」에서 보인 신학을 비판하지는 않겠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자체가 이반의 견해에 대한 저자의 반론이기 때문이다. 도스토예프스키는 물론 이야기의 청자인 알료사 카라마조프로 등장하여, 이반이 제기하는 '인간의 나약함에 무지하고 악을 방관하는' 신을 변호한다. 그러나 변호는 지적이지 않고 행위적이다. 알료사는 그리스도를 본받아 선에 대한 헌신을 통해, 즉 그의 선한 삶을 통해 이반의 논증에 답한다. 안토니오 말로는 그리스도의 키스와 이를 모방한 알료사의 키스가 세상의 악을 극복하는 유일한 방법은 '사랑'이라는 것을 의미한다고 주장하는데, 필자는 이 견해에 동의한다 (Malo, 2017).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의 불후의 명저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러시아 문학 역사상 가장 위대한 책으로 손꼽힌다. 심리학자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책"으로 평한 바 있다. 카라마조프가의 이야기는 프리드리히 니체, 알베르 카뮈 같은 탈현대를 상징하는 사상가들에게 심오한 영감을 주었으며, 무라카미 하루키와 이문열 같은 동아시아 작가들의 작품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노벨 연구소가 선정한 '역사상 가장 위대한 책' 중 하나에 이름을 올렸다.
참고문헌
석영중. (2018). 「인류애 같은 공상적 사랑 말고 ‘너와 나’ 실천적 사랑을」. [online] 중앙선데이
이문열. (2020). 『사람의 아들』. RHK
이세영. (2020). 「대심문관은 누구인가」. [online] 한겨레
최인선. (2019). 「도스토예프스키의 종교를 통한 인성교육: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의 「대심문관」과 「러시아 수도사」를 중심으로」. 『문학과 종교』 24(1)
Dostoevsky, F. (2007). 『죄와 벌』. 유성인 옮김. 하서
Dostoevsky, F. (2012).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1』. 김연경 옮김. 민음사
Malo, A. (2017). Nihilism and Freedom in the Legend of the Grand Inquisitor. Church, Communication and Culture 2(3), pp 259-271
Mochulsky, K. (1971). 『도스토예프스키 2』. 김현택 옮김. 책세상
Peterson, J B. (2017). Personality 11: Existentialism: Dostoevsky, Nietzsche, Kierkegaard. University of Toronto. [online] YouTub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