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와 관련된 대외활동만 지금까지 약 10년 정도는 해왔다. 서울에서 살아왔지만 모임에 가면 수많은 非서울 팬들을 만날 수 있다. 아니, 어쩌면 서울 연고의 엘지, 두산 팬이 소수지. 그런데 그동안 만나본 팬들의 성향을 잘 지켜보면 몇 가지 재밌는 특징들을 알 수 있다. 그 중 하나가 데이터를 많이 아는 LG, 롯데 팬들이라는 것.
LG와 롯데 팬들은 대부분 현재의 영광을 제대로 누려본 적이 없는 경우가 많다. 40살의 사람도 그들이 자아를 가진 뒤 우승을 보지 못했으니까. 늘 11월 즈음엔 '우리는 무엇이 부족할까'를 고민하고 차마 팬의 직함을 내려놓을 순 없으니 스스로 피드백만 반복해온 집단이다. 그래서 얻은 것은 정교해진 'OO 탓'이다. 해결방안을 내놓을 수는 없지만 문제제기와 그에 따른 예상 변화는 누구보다 잘 맞히게 됐다.
왜 성적이 좋지 못하면 데이터 공부를 하게 될까. 그건 야구판 시장이 만들어놓은 시스템을 내가 좋아하는 구단이 제대로 이용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프로야구는 최하위를 위한 드래프트 시스템이 있고, 구단이 지갑만 열어준다면 얼마든지 비대칭전력을 꾸릴 수 있다. 그럼에도 수 년간 평균 이상 위치에 들지 못한다면? 분명 올바르지 않은 프로세스가 어딘가엔 있는 것이다. 그것이 잘못된 선수 선발이든, 혹은 좋은 선수들에 대한 가치 판단을 제대로 못하는 것이든. 그런데 '잘못된 선수 선발'과 '가치판단의 오류'는 모두 데이터를 살펴보면 깨달을 수 있다. 우리 팀의 결정권자들이 연봉만 루팡하고 있는 사이 팬들은 그 결정권자들보다 더 빠르게 문제점의 원인을 살피기 위한 데이터 공부를 했다. 그렇게 LG와 롯데 팬들은 정말로 야구를 보는 관점의 수준이 높아졌다.
#다승은 쓰레기야
근거1. LG트윈스는 2년 연속 국내선발투수에서 12승 이상을 기록한 선수가 등장했다. 2022년의 이민호와 2023년의 임찬규. 2022년의 이민호는 무려 12승을 거뒀지만 2023년 흔적도 없이 1군 마운드에서 사라졌다. 하지만 아무도 동요하지 않았다. 충분히 데이터가 그의 미래를 암시했으니까. 5점대 ERA와 음수 값의 WAR은 12승 투수가 기록했다고 보기엔 놀라운 수치였다. 'FIP(수비무관평균자책점)'가 입단 이래 4시즌간 모두 4점대 중후반을 기록하고 있는데, 이 수치가 운으로 좌우되지 않는 기록 중 하나다. 이 기록이 꾸준하게 B-C등급인 이민호에게 스텝업을 갑자기 바라는 것은 무리였던 것이다.
이는 2023년 14승을 따내며 국내선발진 중 전체 다승 1위라는 기염을 토한 임찬규에게도 적용된다. 3.42의 ERA를 기록했음에도 FIP는 4.12가 나왔다. 물론 FIP도 커리어하이인 것은 맞으나, 올 시즌 한정은 드넓은 잠실야구장을 매우 유용하게 쓴 '맞춰잡은 투수'라는 결론과 함께 개선된 LG의 수비수 도움을 받은 운이 좋았던 시즌임을 증명했다. 지난해 ERA가 5.04임에도 FIP는 4.48로 오히려 좋았던 임찬규는 지난해 불운을 올해 행운으로 보상받았다.
14승 3패에 ERA 3.42의 임찬규는 한 달 뒤 FA 자격을 얻게 된다. LG트윈스가 최근 몇 년간 꾸준히 상위권에 있었음에도 국내 선발 14승은 매우 희귀한 기록이다. 그렇다면 이 FA 선발투수를 꼭 잡아야 할까? 적어도 10년 이상 LG 야구를 봐온 사람들의 한결같은 대답은 'NO' 였다. 물론 이것이 없으니만 못한 투수라는 뜻은 절대 아니다. 하지만 '14승'이라는 기록에 얽매여 14승 값을 지불하고 눌러 앉힐 투수는 절대 아니란 뜻이다.
*이것이 '배부른 소리네', '타 팀 팬들도 똑같이 그런 판단을 할 것이다' 등의 반박을 당연히 받을 수 있겠지만 우리는 불과 2년 전에도 똑같은 상황에서 FA 재계약을 해 2점대 선발투수가 5점대 선발투수가 되버린 지방 모 팀의 선발투수를 지켜본 바 있다.
#내일의 성공을 원하면 보는 스탯들
근거2. 롯데자이언츠가 2023시즌을 앞두고 내린 결단은 팀 오버롤의 저점을 높이자는 것이였다. 야구에서 저점을 올리기 위해선 운에 좌우되지 않는 스탯이 좋은 선수들의 영입이 직관적으로 봤을 땐 좋을 것이다. 뛰어난 손끝감각으로 경기당 1아웃을 자체 생산하는 포수, 수비범위가 넓은 유격수, 최근 4시즌 중 3시즌의 FIP가 3점대로 준수했던 선발자원의 영입은 팀의 저점을 올려줄 선수임에 분명했다. 그래서 팬들도 환영했다. 한 순간의 반짝스타도 물론 좋지만 '센터라인'으로 불리는 팀의 뿌리를 재정비한다는 점에서 팬들은 'trust the process'를 외쳤다.
결과의 총합이 웃어주는 방향으로 나오진 못했으나 출발점에서의 선택이 잘못된 것이라 보기엔 어렵다. 이 사실을 롯데 팬들도 알고 있다. 올 시즌 가을야구에 초대받지 못한 롯데 팬들이 '새 선수'를 갈구하는 것이 아닌 '안정시켜줄 관리자'를 1순위로 갈구하는 것이 그 증거다. 로스터가 잘못됐다고 하기엔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이 너무 많이 일어났다. '유리멘탈', '유리몸' 등도 데이터화할 수 있다면 그 차원에서의 예측은 가능할 수도 있겠으나 부산에만 특별히 수맥이 흐르는 것이 아니고서야 모두가 똑같은 조건에서 야구를 하니까. 이처럼 운의 총합이 작은 팀의 시즌은 정말 보기 드문 것 같다. 꺾이지 마시길.
#앞으로 야구팬이 봐야할 것들
사회가 실시간으로 발전하고 변화하는 것처럼 야구를 바라보는 기록도 끊임없이 진화하고 있다. 객관성을 갖고 판단할 수 없던 것들이 수치화되고 데이터화되며 부족했던 기존의 데이터를 계속 보완해나가고 있다.
짧게는 포수의 프레이밍과 투수의 볼 무브먼트. 길게는 타자 스윙에 따른 타구속도-안타확률, 수비 상황에서 A 선수가 발생한 타구를 처리할 확률 등을 실시간으로 쉽게 볼 수 있는 시대가 올 것이다. 지금도 나름의 '노가다'를 하면 볼 수 있지만 팬들에게 오픈소스로 공개가 되지 않은 것들이다. 알파 테스트 정도 단계다. 이것들을 공부해서 고작 얻는 것은 '유강남이 80억을 받은 이유', '160km/h 장재영이 배팅볼 투수처럼 맞는 이유', '김현준이 아닌 김성윤이 아시안게임에 간 이유', '오지환이 국내에서 어나더레벨의 유격수 수비를 하는 이유' 정도다.
위 사례는 우리 팀이 상대 팀만 이기면 장땡인 팬에겐 하나도 중요하지 않은 것들이 맞다. 굳이 저것을 찾아보려고 야구가 지루해질 필요도 없다. 하지만 혹시나 야구를 오래 보게 된다면, 그리고 왜 우리팀이 좋아보이는데 좋지 않은 결과가 나는지 궁금하다면 당신도 보게 될 지표들이다.
이유도 모르고 당하는 것 보다는 이유는 알고 당하는게 맞아보니 덜 억울했었다. 이런 것을 굳이 연구할 필요 없이 그냥 때 되면 알아서 잘 해주는 선순환 리그가 되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