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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월 Jun 10. 2022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레벤느망(2021)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을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고' (창세기 3:16, 개역개정 4판 성경)


금지된 선악과를 따먹은 최초의 여자에게 신이 형벌을 내렸다. 너에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겠다. 임신하는 고통이란 무엇인가. 임신으로 인해 통제할 수 없는 몸의 변화나, 인간이 겪을 수 있는 최대의 고통이라고들 하는 출산의 고통이 가장 직관적으로 떠오른다. 그러나 그것이 '임신하는 고통'의 전부인가? 영화 '레벤느망'은 그 너머의 고통을 설명한다.


2021년 개봉한 '레벤느망'은 같은 해 베니스 영화제에서 '파워 오브 도그'나 '신의 손' 등의 작품들을 제치고 심사위원 만장일치로 황금사자상을 수상하며 주목을 받았다. 심사위원장이었던 봉준호 감독은 수상을 발표하며 '심사위원들이 이 영화를 정말 사랑한다'고 밝혔다. 오드리 디완 감독은 '나의 분노와 갈망, 배, 내장, 심장과 머리로 이 영화를 만들었다'는 수상소감을 전했다. 이어 '레벤느망'은 올해 팜스프링스 국제 영화제에서도 '뉴 보이스 뉴 비전상'을 수상했고, 세자르 영화제에서는 주인공 '안'을 연기한 배우 아나마리아 바토로메이가 신인여우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영화의 제목은 '사건'이라는 뜻의 불어 'L'evenement'이다. 이는 원작인 아니 에르노의 자전적 에세이 '사건(happening)'에서 비롯된 제목이다. 영화는 '예기치 않은 임신'이라는 사건 하나만을 건조하고 끈질기게 재현한다. 카메라는 안에게서 거의 떨어지지 않고 그를 가까이 따라다닌다. 가로가 길지 않은 1.37:1의 화면 안에서 포커스는 배경이 아닌 인물에게 집중된다. 안이 겪는 불안한 발버둥의 시간을 영화는 최소한으로만 생략하며 펼쳐놓는다. 그리하여 관객은 안이 분투하며 겪어내는 시간을 100분 동안 간접적으로 체험하게 된다.


임신을 확인한 순간부터 안의 시간은 태아의 성장 속도로 치환된다. 3주 차, 4주 차, 5주 차... 12주 차까지 이어지는 시간 표기는 원치 않는 임신 이후 안의 일상이 더 이상 그의 것이 아니게 되었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파티를 즐기는 친구들 사이에서 안이 '배 속에 아무것도 없는 여자애들'과 '나'는 다른 세상을 살고 있다고 독백하는 장면에서도 이 점이 드러난다. 안의 시간은 중절 이후 학교에 가서 시험을 치르는 날 비로소 '7월 5일'로 돌아온다. 학업의 길로 돌아온 안에게 교수가 그동안 아팠냐고 묻자 안은 '여자만 걸리는 병, 집에만 있게 만드는 병'을 앓았다고 대답한다. 투박할 만큼 직접적인 이 발화는 영화의 주요한 문제의식을 선명하게 드러낸다.


프랑스에서 임신중절이 합법화된 것은 1975년이고, 원작과 영화의 배경은 그보다 십여 년 앞선 1960년대 초반이다. 임신중절이 불법인 시대에 낳지 않을 아이를 임신한 안은 끝내 가족에게는 도움조차 청하지 못하고, 아이의 아빠에게도 친구들에게도 외면받으며 도움을 찾아 헤맨다. 임신중절이 불법을 넘어 잘못이라고 믿는 의사는, 절박하게 매달리는 안을 속여 오히려 중절을 어렵게 만든다. 아이의 아빠인 막심은 안에게 '네가 알아서 해결한 줄 알았다'고 한 발짝 물러서며 책임을 미룬다. 안이 도움을 청했던 남성 친구는 되레 '임신했으니 안전하다'며 안에게 성적인 접촉을 시도한다. 범법행위라는 위험을 무릅쓰고 안에게 도움을 준 사람은 결국 같은 상황을 겪었던 여성이었다. 그리고 한편에서는 외면했던 친구 중 한 명이 조용히 찾아와 속내를 털어놓고, 안의 엄마는 아무 말 없이 갑작스러운 포옹을 하는 안을 그냥 안아준다. 


중절을 앞두고 안은 파티에서 만난 남자와 섹스한다. 임신으로 영화 내내 고통받는 안의 모습을 여태껏 지켜봐온 관객 입장에서는 어쩌면 모순적이라고 느낄지도 모르겠다. 해당 장면은 결혼하지 않은 여성의 임신에 대해 '성적으로 문란하다'고 비난하는 이들을 정면으로 비켜 간다. 결혼하지도 않은 학생이 임신을 했는데 심지어는 임신 중에 다시 섹스를 하다니, 누군가는 놀라 손가락질할 장면을 태연히 비추며, 부연 설명을 덧붙이지도 않는다. 한편으로는 몸을 태아에게 반쯤 빼앗긴 상황에서 몸에 대한 주체권을 되찾으려는 모습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혹은 그냥 원치 않는 임신으로 지난한 시간을 보내고 있어도 육체적 쾌락을 즐길 수 있다는 정당한 주장이 될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낯선 남자와 관계하는 안의 모습을 영화는 단죄 없이 담담하게 비춘다.


안이 겪는 12주의 시간을 관객에게 경험시키고자 했던 이 영화는, 끝내 찾아온 낙태의 순간까지 결코 그냥 넘기지 않는다. 낙태의 과정에서 고통스러워하는 안의 모습, 안이 보는 낙태의 현장을 카메라는 피하지 않고 꿋꿋이 비춘다. 탯줄을 가위로 자르고, 변기 물을 내리는 장면까지도. 점점 불안감을 고조시키던 사운드는 낙태의 과정이 끝나자 함께 멈춘다.


아니 에르노가 '사건'을 통해 그랬듯, 프랑스의 만화가 오드 메르미오는 그래픽노블 '나의 임신중지 이야기'를 통해 자신의 임신중지 경험을 8년 만에 풀어내었다. 이 책을 번역한 이민경 작가는 옮긴이의 글에 자신의 정치적 지향과 당위들 대신 '임신중지라는 결정을 내리고 그 과정을 통과해 지나가는 몸에 친구의 손바닥이 닿으면서 퍼뜨리는 빛과 온기에 집중했다'고 썼다. 이처럼 '레벤느망' 또한 정치적인 것과 개인적인 것 사이에서, 자전적 에세이인 '사건'을 차용했음을 밝히며 '안' 개인의 세계에 '임신'이라는 사건이 미치는 영향을 재현하기를 선택한다. 원작자인 아니 에르노 작가는 오드리 디완 감독에게 '진실한 영화를 만들었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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