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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KI Nov 11. 2023

사람에게 필요한 인간관계

제임스 앙소르


인연이 닿아 지내는 관계를 남녀로 구분 짓지 않는다는 전제 하에.

우리의 필요한 인간관계의 범위는 과연 어디까지일까?



나에게 필요한 인간관계는 두 가지다. 하나는 아는 사람, 다른 하나는 친한 사람이다. 아는 사람의 관계는 나름대로 지속해야 하는 이유가 있고, 친밀함은 적으나 나름의 역할을 갖고 있는 존재다. 친한 사람은 이유 없이 사회적 계급(?)의 차이와 상관없이 신뢰할 수 있는 관계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나이가 들면 들수록 친한 관계를 유지하는 게 쉽지가 않다.


오랜 친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필요한 배려와 자기표현을 서로 잘 주고받아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면 관계가 섭섭해지기도 하고 불신이 서서히 스며든다. 관계의 상호성 관점에서 살펴보면 이해가 잘 될 것 같다.


나이를 점점 먹게 되면서 깨닫는 건, 변하지 않는 게 사람인 듯해 보여도 그 시절의 순수함이 사라진다는 것이다. 내가 A라는 친구를 만났던 이유는 그 시절의 소탈하고 배려심 많은 성격 때문이었는데 어느새 찌든 사회생활로 인해 소탈함은 사라지고 비교, 경쟁심이 스며들어 자기 앞에 있는 나에게 영향을 주고 있다는 사실.


어느새 "잘 지내?"라는 안부의 질문보다 "너는 뭐 해?"라는 사회적 역할 또는 자본주의 사회의 지위에 대한 질문으로 대화를 시작하는 사람들이 주변에 점점 많아지는 현실.

 

이런 현실 속에서 굳이 다른 곳으로 도망칠 이유도 없고 어쩌면 앞으로 계속해서 부딪쳐 나가야 하는 과제가 아닌가 싶어서 내가 선택한 방법은 내게 필요한 만큼의 "인간관계 범위"를 설정하는 일이었다.  


나는 종종 사람의 마음을 그릇에 비유한다. 그릇이 크고 넓으면 사람을 수용할 수 있는 마음의 공간이 있어서 많은 사람들과 불편해지는 관계를 만드는 경우가 적다. 그릇이 넓다는 뜻은 상대를 넓은 마음으로 이해해 준다는 의미가 아니다. 마음의 그릇이 넓으면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는 능력이 있고 적정 선을 지키면서 관계를 맺기 때문에 서로가 불쾌해지는 사건들이 자주 일어나지 않는다. 자연스레 많은 사람들을 마음의 그릇 안에 담아놓고 관계를 맺어가며 살아갈 수 있는 유형이 된다.


모든 사람들이 태어날 때부터 그릇의 크기가 정해지는 건 아니다.

살아가면서 받은 부모와 환경의 영향, 성인이 되어 사회생활과 인간관계를 거쳐 터득해 나가는 방법, 나이 듦 등으로 인해 그릇의 크기는 넓어지기도 하고 좁아지기도 한다.


관계는 혼자 맺는 게 아니라 상호작용으로 맺는 계약과도 같은 일이라, 상대방의 마음을 살펴볼 수 있는 사람이라면 경험과 세월에 따라 그릇의 크기가 점점 넓어질 수 있다. 하지만 자기 생각의 테두리 안에서만 타인을 적용하고 생각하고 특히 "판단"까지 한다면 좋지 못한 사람이 되는 건 시간문제일 뿐이다.


예를 들어, 아는 사람이었는데 그가 사람의 마음을 살펴보고 도움을 주는 따뜻한 사람이라면 그 관계는 친한 사이로 발전할 것이다. 반면, 친한 사람으로 알고 지내보려다가 험담이 술안주이고 온통 자기 판단으로 사람을 생각하고 상대방의 기운을 다 빼는 사람이라면 자연스레 그냥 아는 사람으로 멀어지게 될 것이다.  

 

또 다른 경우, 인맥과 체면치레를 지나치게 중요하게 여겨 말끝마다 "골프" "지인", "소개"와 같은 단어로 사회적 인맥을 자주 입에 올리게 되면 허세적으로 느껴져 멀어질 수 있게 된다.  


반대입장에서 상대가 나와 멀어지고자 애쓴다고 하는 게 느껴질 경우 무조건 섭섭해할 필요도 없다. 사람사이에는 자기 공격과 방어를 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라면,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을 것이라 여겨야 한다.




인간관계의 현실성을 잘 담은 화가, 제임스 앙소르의 작품을 보면 마치 가면극과 죽음을 연상케 하는 헛된 삶의 축제가 생각난다.


우리는 사회에 나갈 때 가면을 쓴다.  그 가면이 점점 익숙해져 언제부터인가 진짜의 나인 줄 알고 더이상 가면을 벗을 수 없는 상태가 다다르면 그 때는 삶과 죽음의 경계선 위에서 위태롭게 살아가게 되지 않을까.



제임스 앙소르, 죽음과 가면들. 1888년


 앙소르 작품은 사실 사회적 지위의 상징성을 담아내면서도 공포스럽고 그로테스크한 가면이 사회적 관계의 진실을 풍자하고 있다.  매일마다 쓰고 다니는 가면이 진짜 자기 자신이라는 덫에 빠져든 저들의 곁에는 죽음이 다가왔는데도 짧고 덧없는 파티를 즐기느라 정신이 없는 기득권층의 모습을 역사와 예술의 힘으로 전달한다.




 


 우리의  인간관계에는 어느 적정선의 거리가 필요하기에 사회적 가면을 무조건 나쁘다고 할 수는 없다. 다만, 올바른 사리분별력으로 매일 1mm씩  마음의 그릇 크기를 넓혀가는 훈련을 한다면, 어느 날 우리의 마음속에 들어와 있는 수많은 사람 관계를 적절하게 수용하고 있는 자기 자신을 만나게 될 것이다. 그때는 당신을 좋아하는 사람의 수가 지금보다 많아져 있을 수 있다. 또 당신을 좋아하는 수만큼 당신은 많은 사람들을 좋아하고 있을 것이다.  이 사람, 저 사람 만나고 잠시 멈추기도 하면서 관계의 가깝고 멀어짐의 간격을 넓게 확보해 보면 그릇의 크기는 조금씩 넓어지게 된다. 상대와의 관계를 설정하는 일에는 그만큼 정확한 판단력이 중요하다.


괜찮은 사람을 좋아하는 일도 제법 기분 좋아지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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