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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리 Apr 03. 2022

내향형이 외부 미팅에 대처하는 방법 / 이루시엔

우리들이 살아가는 방법

  어쩐지 몇 년 지기 친구들 약속을 제외한 나머지 약속은 기가 빨리고, 업무 미팅 자리에 나가면 그렇게 집에 가고 싶어서 발을 동동 구른다. 몇 년 전부터 유행이 된 MBTI 덕분에 난 말로만 ‘집순이’가 아닌 공식적으로도 ‘내향형(I)’을 선고받았다. 일로 사람들을 만나고 나면 하루 치 에너지를 다 쓰는 느낌을 항상 받곤 했다. 아, 큰일 났다. 예감은 했지만 나는 지금 하는 일을 진정으로 즐기면서 하기는 이미 텄구나, 텄어. 


  사실 극단적인 외향형과 내향형은 없다고 생각한다. 그놈의 밥벌이가 뭔지, 사회생활을 하는 사람 중에서는 상황에 따라 외향형이 내향형 흉내를 내기도 하고 내향형이 외향형 흉내를 내기도 한다. 나도 마찬가지다. 내향형으로 나왔어도 내게는 한 줌의 E가 스며들어있다. 그리고 아무리 외향적인 사람이라도 일로 사람을 만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고로, 내가 내향형이라서 지금 일하는게 ‘텄다’며 힘들다고 하는 건 일종의 엄살로 보일 수 있다는 얘기가 된다. 


  그런데도 내가 내향형을 진단(?)받고 당황했던 이유를 설명하자면 이게 다 업무 특성 때문이다. 매일 새로운 이야깃거리를 찾으라고 회사에서 성화를 내는 탓에, 일하려면 많게는 하루에 두세 건씩 기업 쪽 사람 외부 미팅을 잡아야 한다. 걸핏하다간 모르는 상대방과도 3~4시간 독대로 술을 마시기도 한다. 당장 내일의 발제 거리를 못 찾으면 부장과 팀장의 경고에, 이제는 후배들 눈치까지 보게 생겼기 때문에 점약과 저약을 필사적으로 잡고 있다. 모르는 사람을 만나는 걸 제일 싫어하는 내가 모르는 사람에게 어떻게든 친한 척을 해서 기삿거리를 하나라도 더 얻으려는 일이 매일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안 그래도 사람 만나는 멘탈은 쿠크다스인데, 상처는 사람이 준다고 했던가. 상대방이 친절하면 또 모르지만 별의별 사람이 다 있다. 자기 잘난 척을 하는 사람, 잘난척만 하면 되는데 눈앞에 있는 나를 잘근잘근 무시하며 말을 하는 사람, 오늘 처음 본 사이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정치색을 드러내는(강요하는) 사람, 어디서 어려운 영어나 약자를 가져와서 말하며 내가 자신의 말을 이해하는지 안 하는지 안중에도 없는 사람, 돈·집·주식 자랑하는 사람, 알기도 싫은 불륜 이야기하는 사람, 뜬금없이 부부 불화를 터놓는 사람, 우리는 회사를 대표해서 만난 사이임에도 불구하고 초면에 반발하며 ~씨라고 부르는 사람, 내가 본인 부하도 아닌데 갑질하는 사람, 내가 갑도 아닌데 다짜고짜 을질하는 사람, ‘얼마면 되겠니?’ 본인이 원빈도 아닌데 돈 줄테니까 자기 이야기 써달라는 사람 등등. 그 다양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물론 배울 점이 넘치며 존경하고 싶고, 친구로 두고 싶은 사람도 다수 있다. 그렇지만 특이한 사람이 걸리면 좋은 사람들로 기껏 채워 넣은 에너지를 다 뺏기고 만다. 사람 만나기는 내게 큰 도전인데, 특이한 사람들까지 달래가면서 기삿거리를 얻기란 진짜 스트레스 중의 스트레스가 아닐 수 없다. 어색하고 특이한 사람과 술 약속이라도 잡히는 날엔···(좋은 분들과의 술자리는 환영). 설상가상으로 나는 술도 약하다.


  특이한 사람들과 하루 몇 시간씩 밥을 먹고 술을 먹으면서 시시콜콜한 이야기로 에너지를 뺏길 때면 당장 사람을 최대한 안 만나는, 또는 익숙한 회사 사람만 보는 직군으로 옮기리라 다짐한다. 그러나 모든 월급쟁이가 그러듯이 그 달콤한 목돈에 코 뀌어 햇수로 7년째 이일을 반복하고 있다. 그러면서 나에게도 조그마한 스킬이 생겼다. 이름하여 ‘내향형이 모르는 사람과 3시간 넘게 술 마시는 방법’. 부제는 ‘상대방 장단 맞춰주기’다. 아무리 특이해도 별수 있겠는가, 내가 월급을 계속 받으려면 나는 그들과 친해져야 하는 사명을 갖고 있다! 나같이 사람 대하는 데 서툰 사람은 이렇게 머릿속으로 특별할 것 없는 매뉴얼이라도 만들어놔야 시간도 때우고 일도 할 수 있다. (참고로, 사람과 술을 너무 좋아해서 기자가 된 분들도 많으니 모든 기자가 이렇지는 않다.)


  첫째, 약속 가기 전 상대방과 상대방 회사, 그 회사의 CEO나 오너가와 관련한 최근 3개월, 많게는 6개월까지 기사를 섭렵하라. 아는 척 하는데 ‘직빵’이다. 이렇게 사전 지식을 쌓아가면 5분 전까지 몰랐던 A 회사의 B 오너를 아는 척하면서 이야기할 수 있다. 예를 들면 “팀장님, 요즘 B 회장님 때문에 넘 힘드시죠? 성격이 아주 불같으시다고 들었는데, 일을 좀 할 만하십니까. 저번에 C 사건 처리하시느라 고생하셨겠네요, 한 잔 받으시죠”라고 하면 이제 ‘예의 있게 술 한 잔 권하기’와 ‘나는 한마디 던졌으니 이제 하소연하시면서 제게 재밌는 이야기를 들려주세요’를 동시에 잡을 수 있다. 사실 난 A 회사에 대해 거의 아는 게 없지만, 상대방으로 하여금 내적 친밀감을 심어주는지 편하게 여기는 것 같다. 가끔 이게 안 통하고 서로 이야기가 이어지지 않는 경우가 있는데 그럴 때는 곧장 스텝 투로 넘어가야 한다.


  둘째, 가족 이야기에 장사 없다. 나보다 나이 많은 사람들을 상대하는 경우가 잦은데 이럴 때는 가족 이야기, 특히 아이들 사진을 보여달라고 하면서 아이 칭찬을 하면 최소 10분에서 길게는 30분 동안 나는 입을 다물고 있어도 된다. 아내 혹은 남편은 치가 떨려도 금이야 옥이야 해외 유학까지 보내면서 곱게 키운 딸, 아들 칭찬 몇 마디면 마음속에 있는 이야기까지 편하게 꺼내는 경우가 많다. 가끔 고등학생 자녀가 걸리는 경우가 있는데, 그러면 나의 경험을 십분 활용해 입시상담 및 진로 상담을 해주기도 한다. 당연히 나는 요즘 입시 하나도 모르지만 내가 얼마나 입을 부지런히 움직이냐에 달려있다.


  셋째, 학연·지연 총동원. 학연·지연을 2020년대에 따지는 건 꽤 촌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어색한 공기 흐름을 바꿔놓을 수만 있다면 무슨 상관이랴. 동향 사람이면 이제는 20년 전에 살았던 인천 동네까지 더듬거리면서 말해야 하고 대학교가 같다면 능글맞게 바로 ‘선배님’이라는 말도 꺼내야 한다. 사실 이 선배님이라고 말 꺼내기 까지는 스스로가 오글거려서 4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한번이 어렵지 한두 번 하다 보면 입에도 붙고 갑자기 5분 만에 나를 경계하던 분위기가 나를 친근하게 대하는 분위기로 바뀌는 마법을 경험할 수 있다.  


  넷째, 주식과 부동산 자랑(하나 더 추가하자면 코인)을 듣는 시간을 만들어보자. 부서 특성 탓에 업무 미팅 목적으로 만나는 사람들은 대부분 경제적으로 성공했을 가능성이 크다. 물론 부동산이 이렇게까지 치솟을 줄 모르고 흥청망청 써댄 탓에 그들의 자랑을 듣고 있자면 나의 마음이 아주 쓰리긴 하다. 주눅 들지 말자고 마인드컨트롤은 덤. 한국에 돈 많은 사람이 왜 이렇게 많은 걸까. 


  다섯째, 요즘은 영상 시대다. 유튜브 시청을 필수다. 만약에 오늘 만나는 사람이 책을 쓰거나, 교수거나, 유명한 강사라면 기사 하나를 읽고 오는 것 보다 유튜브 시청이 백배 낫다. 할 이야기도 훨씬 풍부해지고 그의 유튜브 채널을 안 지 몇 시간이 안 됐음에도 내가 그의 ‘찐 팬’임인 점을 피력할 수 있다. 다만 나에게는 그가 나온 모든 유튜브를 볼 수 있는 시간이 없으니 2배속으로 10초씩 건너 뛰어가면서 엑기스만 본다.   


  여섯째, 아주 민망한 일이지만 나도 공작새의 깃털을 펼치듯 자랑에 나서야 한다. 그들이 원하는 기자의 이미지를 십분 활용하는 것이다. 하루하루 기사에 치여 내가 무슨 기사를 써왔는지 생각도 잘 안 나지만, 나름 잘 쓰고 업계에서 꽤 언급됐던 기사들을 쥐어 짜내야 한다. 취재 과정 비하인드를 들려주거나, 그 과정에 만난 인맥을 자랑해야 한다. 또 상대방이 원하는 정보를 알려주기도, 알아다 주기도 한다. 우리는 일 때문에 만났고 그가 다음에도 나를 찾게 하려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이렇게 말하고 나면 집에 가는 길에 벌써 이불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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