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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나미 Nov 19. 2023

1880


 어김없이 수능의 계절이 다가왔다. 수능을 준비한 전국의 모든 학생들, 부모님들을 생각하니 마음이 정갈해지는 아침이다.  


 수능을 떠올리니 돌아보면 피식할 정도의 사소한 일에도 진지하고 열정이 넘쳤던 고등학생 때가 생각난다. 고삼이 되자마자 이 학년 때 친했던 친구들 열명과 함께 계비를 모으기 시작했다. 수능이 끝나면 여행을 떠나기 위함이었다. 그때 결성된 계모임의 이름이 1880이다. 18세 우정 80세까지 라는 뜻으로 여전히 지속되는 우리의 우정을 보면 지금 생각해도 꽤나 잘 지은 이름이라 생각한다. 

 수능이 끝나고 우리는 남이섬으로 떠났다. 여행 당일, 시외버스터미널에서 만난 우리는 서로를 보며 웃을 수밖에 없었다. 이박 삼일 떠나는 여행에, 기껏해야 한 두 번 사용했을까 싶은 새것처럼 보이는 십 인치 캐리어를 모두가 끌고 온 것이다. 통영에서 춘천까지 약 40개의 바퀴가 굴러가던 힘찬 소리가 아직도 들리는 것 같다. 

 서울역까지 가는 기차 안에서 지하철을 타면 절대로 사투리를 쓰지 말자고 우리는 약속을 했다. 

 서울의 지하철은 붐볐고 그 속에서 살짝 긴장한 모습으로 각자 앞에 있는 창문을 응시한 채 어색하게 서있었다. 고요한 지하철에서 갑자기 익숙한 목소리가 귀에 꽂혔다. 

 “요 자리 있다.” 

평소에도 유난히 목소리가 큰 친구였는데 힘든 와중에 눈앞에서 두 자리가 나니 얼마나 반가웠을까. 시골에서 한껏 꾸며 여행 온 듯한 아웃핏으로, 우린 누가 봐도 일행처럼 보였는데 어느 하나 고개조차 돌리지 않았다. 어색했던 공기를 견디고 지하철에서 내리자마자 너나 할 것 없이 어찌나 웃었는지 모른다. 

 일 년을 기다렸던 여행은 자유롭고 보람차고 즐거웠다. 다음 날, 수능 결과가 발표되기 전 까지는. 따뜻한 남쪽나라에서 온 우리는 눈 덮인 마을의 생경한 풍경에 추위도 모르고 자전거를 타러 가기로 했다. 자전거를 타고 있는데 방에서 쉬고 있던 친구의 전화가 왔다. “대학 발표 났다.” 몇 개의 대학이 발표 난 것이다. 몇 명은 붙고 몇 명은 떨어지고 몇 명은 아직 발표가 나지 않은 상태였다. 떨어진 친구들의 슬픔을 위로하느라 그때부터 일정이 어떻게 되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낮부터 술이나 마시자고 했던 것 같다. 취기가 오른 친구의 슬픔은 더욱 커져 모두 함께 부둥켜안고 울었던 것 같다. 


 그때 대학에 떨어져 인생이 끝날 것만 같았던 친구들도 잘 살고 있다. 동일했던 학생의 신분에서 벗어나 사회에서 각자의 자리에서 살아가고 있지만 우리는 여전히 친구다. 대학만을 목표로 모두가 경쟁자였던 학창 시절을 보내지 않아서 다행이다. 모든 것에는 시기가 있고 때가 있다고 한다면 나는 공부 시기를 놓쳐서 방황하는 하나의 나약한 인간이다. 그래도 내가 잘 살고 있다고 느끼는 이유 중의 하나는 인생을 공유할 수 있는 친구가 있다는 것이다. 이십 년이 지나도 보석처럼 빛나던 십 대를 기억해 주는 친구들이 있기에 우리는 여전히 반짝이고 반짝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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