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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에타 Dec 18. 2020

매트릭스로 철학하기

The Matrix | Netflix

당신이라면 어떤 약을 선택하겠는가?
빨간 약인가, 파란 약인가?
어떤 경우라도 진실은 알 가치가 있는 것일까,
아니면 차라리 아무것도 모르는 게 행복일까?
- 슬라보예 지젝 외, <매트릭스로 철학하기>


'당신이라면 어떤 약을 선택하겠는가? 당신의 삶이 온통 거짓이었음이 밝혀진다면 어떤 반응을 보이겠는가? 행복하다면 거짓된 삶이라도 괜찮은가? 매트릭스는 과연 악한 것인가?' 영화 <매트릭스>는 다양한 철학적 의문을 제기한다.


로저 섕크는 다른 누군가에게 우리의 경험을 묘사하는 건 기억을 창조하는 과정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이야기를 듣고 말함으로써 의미와 기억을 창조한다. 이야기를 창조한다는 면에서 현실은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허구에 훨씬 가깝다는 것이다.


노동력은... 상품이다.
설탕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전자는 시계에 의해 측정되고,
후자는 저울에 의해 측정되는 것이 다를 뿐이다.
- 마르크스, <임금 노동과 자본>


자본주의 체제에서 노동자들은 회사나 공장에 그들 노동력을 '상품'으로 판다. 영화는 노동자들이 ‘건전지’ 같은 존재로 살아가는 현실을 인간 발전소 시퀀스로 극화하고 있다. 매트릭스는 인류 노동자 계급이고 요원들은 자본의 수호자로 상징된다. 영화에서 모피어스는 '건전지'를 ‘시스템에 구제불능일 정도로 잘 길들여져서’ 시스템의 착취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사람이라 정의한다.


영화는 착취당하는 노동자의 모습을 극화한다. 배달 시간과 위치가 실시간 감시되는 UPS 노동자, 자판 두드리는 수가 분 단위로 관리되는 자료 입력 직원, 고객 응대 태도로 평가받는 콜센터 직원까지, 노동자들은 갈수록 강화되는 기술적 감시 아래 놓여 있지만, 가혹한 현실은 매트릭스라는 꿈의 세계에서 더없이 행복하게 망각되고 통제된다. 영화 속 네오는 자신이 소외된 삶과 소외되지 않은 삶 사이의 대립을 극복하고 새로운 수준의 변증법적 의식을 성취한다.


하늘, 공기, 빛깔, 형태, 소리 모든 외부적인
것들이 단지 우리의 정확한 판단을 흐리기 위해
고안된 꿈의 미혹에 불과할지 모른다.
- 슬라보예 지젝 외, <매트릭스로 철학하기>


17세기에 이르러 데카르트는 우리가 믿고 있는 모든 것이 거짓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제기한다. 감각에 대한 우리의 신뢰를 의심하면서, 이 모든 것이 한낱 꿈일 수 있다는 가능성까지 확대한다. 어떤 약령이 우리를 체계적으로 기만하고 있을지 모르며, 우리가 믿고 있는 모든 것이 거짓일 수도 있다. 증명을 통해 이를 반박하지 못한다면, 인간은 모두 근본적이고 포괄적인 회의론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영화는 데카르트의 악령을 인공지능 시스템으로 구체화한다. 우리 삶은 지능적인 컴퓨터 시스템이 뇌 속에 심어 놓은 거대한 환상, 즉 암호화된 가상 세계에 불과할지 모른다는 데카르트의 회의론이다.


흐르는 환상에 집착할 때, 우리는 매트릭스를 진짜 세계라고 확신하며 '마음의 감옥'에 갇히게 된다. 숟가락은 없다. 존재하는 것은 오직 마음뿐.
- 슬라보예 지젝 외, <매트릭스로 철학하기>


영화는 불교의 거울 이미지를 차용해 "보고 만지는 세계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진리도 감각적으로 재연한다. 만물이 공하므로 자기 영상에 집착하지 않는 거울처럼 우리는 무심해져야 한다는 것이다. 예부터 플라톤에서 붓다에 이르는 철학자들은, 우리가 실재라고 받아들이고 있는 세계가 진정한 실재의 그림자에 불과하다고 설파했다. 칸트는 심지어 물리적 형상도 인간 의식의 주관적인 투영이라고 주장한다. 우리가 보고 느끼는 세계는 인간의 의식이 투영된 것이고, 그것은 보이는 것처럼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실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누가 인간에게 이런 사기를 쳤는가? 칸트에 의하면 경험의 거짓 외양을 창조하는 것은 데카르트의 악령 같은 어떤 외부적인 존재가 아니다. 우리를 기만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다. 우리는 자신의 경험 세계를 투영하면서 외부 세계에 독립적인 실재를 부여하고, 그럼으로써 우리 자신의 자유를 양도한다. 이처럼 인간이 창조적인 자유를 포기하는 것, 그것이 바로 '매트릭스'이다. 이 세계 안에서 사람들은 시스템의 노예로 살아가는 자신을 발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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