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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호 Sep 11. 2020

시차視差 또는 시차時差

- 멕시코시티 국립 인류학 박물관


가장 멀리 떠난다는 것은 낯선 시간대로 가는 것과 같다. 나는 그리니치를 기준 시계방향으로 8시간 만큼 앞서 살아왔고 지금은 반시계 방향으로 다섯 시간 뒤로 물러섰다. 지금 내가 선 곳은 '태양의 돌' 앞이다. 그레고리력 보다 정확하다는 아즈텍 태양력 앞에서 음력처럼 쭈뼛댔다. 시간이 가진 관성의 힘은 시차時差라는 공백을 무자비하게 점령했다. 내 비루한 육신은 밤과 낮이 뒤죽박죽 구겨진 이면지다.  


멕시코 공항에서 시내 숙소까지 어떻게 온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5년 전 인도 꼴까타에 도착했을 때 피부에 달라붙었던 이질감과 비슷했다. 하루를 꼬박 숙소에서 자다 깨다를 반복했고 다음 날 멕시코 시티의 'must see'라고 했던 국립 인류학 박물관으로 갔다.



태양의 돌 /멕시코시티 국립 인류학 박물관




펠렝케의 '생명의 나무'를 모티브로 만들었다는데 그게 어떻게 생겼는지 모른다... 하지만 이 기둥은 용맹했다. 단 하나의 기둥으로 세상의 모든 중력에 저항하는 기개 또는 용맹으로 표현 되는 것. 삶의 무게 따위는 생명의 나무 잎사귀 하나로 지탱할 것. 마야인 통치자들은 죽은 후에도 시간을 초월해 여행했다. 그들은 신화 속의 신들과 세상을 등진 선조와 만났다. 마야인들은 그렇게 믿었다.


중력을 거부하는 기둥과 죽음을 초월하는 생명의 나무는 본질적으로 동등하다




멕시코 국립 인류학 박물관 현관/ 분수라고 하는데 이 날은 물이 나오지 않았다.


정교한 태양력을 만들었던 아즈텍인들도 지구 반대편의 시차時差를 고민했을까? 지겹도록 거대한 멕시코 시티 국립 인류학 박물관 회랑 소실점을 향해 두 시간째 걷는다. 2012년 12월 종말의 부재를 슬퍼하며 영원히 지속될 것 같은 고대의 회랑 속 시차視差또는 시차時差의 사이에서....


물에 젖은 종이박스처럼 후줄근해진 육신을 끌고 30분을 헤맨 끝에 숙소로 돌아왔다. 침대에 눕자마자 잠이 들었다 새벽 3시에 다시 깬다. 아침 7시에 테우티우칸으로 출발하기로 약속을 상기하며 초조하게 시계를 만지작댔다. 시차視差또는 시차時差와의 불화를 어루만지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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