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귀포 원도심-일주도로 남쪽 서귀포항을 중심으로 한 송산동 일대-은 일제 강점기에 도시가 형성되었지만 근대역사도시라고 하기엔 민망할 만큼 근대 건축물이나 흔적을 찾기 힘들다. 아직도 사회 곳곳에 남아있는 일제 잔재를 지우는 판에 자랑스러울 것도 없는 일제 강점기의 흔적을 지우는 건 한편으로 이해된다. 만약 그렇게 해서 역사를 되돌릴 수 있고 그로 인한 상처를 치유할 수 있다면 털끝의 망설임 없이 그런 흔적들을 없애자고 말할 것이다. 불행한 역사는 되돌려지지도 흔적을 지운다고 사라지지도 않는다. 아프고 한편으론 부끄러운 역사를 숨김없이 기록하고 반성하는 편이 미래를 위해 현명한 태도다. 다행히 서귀포에도 송악산 일대의 일본군 부대시설과 비행장 터를 역사 유적으로 보존하고 알리는 시도는 뒤늦은 감이 있지만 다행스러운 일이다. 요즘 핫하다는 '다크 투어리즘'같은 유행에 편승하는 반짝 퍼포먼스가 아니길 바랄 뿐이다.
서귀포항이나 일주 도로를 포함한 거리, 도시 구조 등이 모두 일제 강점기에 설계되고 시공된 것들이니 어떻게 보면 서귀포 원도심에도 근대의 흔적(?)이 없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런 흔적들은 끊임없이 고치고 변형되어 과거의 모습을 확인할 수 없기 때문에 당대를 기록하는 역사 유적으로 인정하긴 어렵다. 서귀포 사람들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라도 여행자나 이주민들은 서귀포가 어떤 내력을 가진 도시인지 겉모습만 봐서는 알 수 없다. 비슷한 시기 도시화의 길을 걸은 군산 같은 경우 일제강점기 개항지로 도시화가 진행되었다. 현재도 역사적 건물들이 상당수 남아있기에 처음 군산을 방문하는 사람도 이 도시가 걸어온 길을 어림 짐작이라도 할 수 있다. 도시의 규모와 역할이 달라 서귀포와 군산을 단순 비교한다는 자체가 성립되지 않으나 같은 시기에 도시로 발전한 공통점을 두고 보면 아쉬움이 남는다. 서귀포 역시 근대 역사도시라는 관점에서 볼 여지가 있는 까닭이다.
이전 포스팅에서 소개한 옛 고래 공장이나 전분 공장 또는 공공 건축물이 남아있다면 서귀포 근대사를 엿볼 수 있겠지만 아쉽게도 기록이나 기억을 통해서만 확인된다. 현재 서귀포에서 일제 강점기를 증언하는 유형의 자산은 서귀동 654번지의 고대한 씨 가옥이 유일하다. 정확히 말하면 골목 건너편 슈퍼마켓 안채와 함께 두 채다. 이 두 채의 집은 '적산敵産' 문자 그대로 표현하면 적이었던 일본이 남기고 간 재산이다. 밖에서 얼핏 보면 여느 서귀포 집들과 다를 바 없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건물 외벽이나 입구가 일본 집들과 유사하다. 서귀포에는 이 두 채 외에 일본 집의 구조를 가진 집들이 몇 곳 더 있지만 이 두 집만 내부까지 적산가옥 특유의 모습을 보여준다.
먼저 고대현씨댁이다. (편의상 고대현씨댁이라 부르지만 작고하신지 오래되었고 현재는 따님이신 고금순씨가 거주하고 있다) 방 3개와 거실, 주방, 창고가 딸린 면적 115.7 평방미터의 단층집이다. 일제강점기 공의 公醫였던 우에다 요시마쓰植田壽松가 고대현씨 댁과 앞 집인 슈퍼마켓 안 채를 의원 건물로 썼다고 한다. 우에다 의원이었던 집은 당시로서도 제법 큰 규모였기에 보건소와 군수 관사로 사용되다가 민간에 불하된다. 1950년 약 3년 4개월 동안 남제주 군수였던 강성익이 사용했다. 이후 고대현이 정부로부터 불하 받아 소유했고 현재 후손인 고금순씨(79세) 가족이 3대 째 살아오고 있다. 건축 대장에 건축 연도가 따로 기재되어 있지 않아 정확한 건축 일은 확인할 수 없으나 1929년 제주도청이 발행한 『제주도세요람』 본문 외에 우에다植田 의원 광고가 실린 것으로 보아 1929년 전 이전 건축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고금순씨에 따르면 본인이 살고 있는 집은 우에다 의원의 살림집과 진찰실, 접수실로, 건너편 집은 입원실로 썼다고 한다. 우에다 의원을 선명하게 기억하는 이가 또 있다. 서귀포 초등학교 등 관내 여러 학교에서 교편을 잡다 교장으로 퇴임한 윤세민(91세)옹이다. 당시 서귀공립심상소학교 고등과에 재학 중이던 윤세민 옹은 해방을 맞던 그날의 기억을 마치 어제의 일처럼 생생하게 들려줬다.
1945년 8월 15일 학습 게시판에는 오후 삼매봉 포대 구축 작업 2학년 포대 구축도 하루 이틀이지 만날 파 놔도 기관총 없는 포대 구축 맥 빠진 근로 보국 작업이었어. 막 떠나려는순간 작업 중지한다는 희소식이 교내를 들려서 모두 기뻐했지. 대낮에 미국 정찰기가 곡예 비행하는데도 고사포 한방 쏘지 못하는 시세에 무슨 중대방송인가. 당시 서귀포에 동경 대본영大本營방송 청취 시설은 인본인 가정에 한하여 허가제로 열 대 이하였을 거야.라디오 시설이 돼 있는 집은 두 개의 안테나 기둥에 연결된 전선을 봐 알 수 있어. 학년별로 수신 시설이 돼 있는 일본인 가정에 배정돼 간 곳이 우에다 병원이었어. 서둘다 보니 좀늦어 들어갔지. 병원장 부부는 잡음이 끽끽대는 긴 수신 박스에 귀 대어 듣는 모습이 어두웠어. 당시 천황이었던 히로히토의 떨리는 목소리만 들렸어. 뭐라는지 기억은 잘 안 나지만 풀 죽은 목소리로 분명 전쟁은 끝났다고 얘기했어. 항복이나 졌다는 말이 아니라 전쟁은 끝났다고....
- 2019년 윤세민 구술
라디오를 통해 일본 패전 소식을 들은 청년 윤세민은 조국이 해방되었다는 기쁨에 거리로 뛰쳐나갔다고 그날을 회상한다. 공의 公醫 우에다 요시마쓰와 일본인들은 패전과 함께 일본으로 돌아가고 서귀포에는 그들이 남기고 간 집들이 남았다.
적산가옥이었던 이 두 집은 내부 마감재와 천장, 바닥은 다다미에서 온돌로 바뀌는 등 변화는 있었으나 구조는 전형적인 일본 가옥의 특징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일본 가옥의 내부의 구조적 특징은 미닫이문(쇼지しょうじ)과 미닫이창(후수마ふすま)이라고 할 수 있다. 쇼지라는 미닫이문을 제거하면 작은 방 두 개를 합쳐 크게 쓸 수 있다. 또한 바깥 풍경이 보이는 높이에 설치한 미닫이창도 원형대로 남아있으며 창과 바깥 외벽 사이 좁은 나무 마루와 천정도 그대로였다. 토코노마とこのま-床の間(화병이나 그림 따위를 장식할 수 있는 얕은 단으로 만들어진 공간), 오시이레押入(붙박이 이불장)도 원형 그대로 사용하는 등 전반적 구조는 보존된 상태다. 맞은편 적산가옥의 경우 규모는 작지만(48㎡) 역시 일본식 구조는 그대로 보존돼있었고 부엌 공간에 시멘트로 만든 작은 후로바風呂場(일본식 욕탕)가 특이하게 그대로 남아있었다.
현재 이 두 가옥은 사유재산으로 언제 어떻게 헐려서 신축될지 모르는 상황이다. 역사적 가치가 있는 건축물로 인정받아 지자체에서 관리 지원 또는 매입을 통한 보존의 가능성 또한 낮다. 결국 시간이 지나면 건물을 낡고 더 이상 쓰지 못할 상황에 이를 것이다. 만약 이 두 집이 사라진다면 일제 강점기 시대의 실물로 서귀포를 말할 수 있는 마지막 근거가 사라지는 셈이다. 개인의 선의만으로 버티기엔 무거운 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