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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서호 Jul 17. 2024

무엇이 의식 수준을 지연시키는가

우리는 사유하지 않아도 되고, 사유하지 않기로 했다

 요즘엔 모든 것이 너무나도 편리합니다. 특히나 한국의 경우에는 다른 서방국가보다 편리함과 인프라 측면에서 월등히 그 차이를 실감할 수 있죠. 집에 앉아 손가락 몇 번 움직여서 배달앱으로 배달을 하면 집 앞까지 음식이 배달되고, 심지어 뭘 먹을지 고민하지 않아도 돼요. 배달앱에 들어가면 이미 알고리즘에 짜여진 메뉴 중에 취향에 맞는 메뉴를 선택하기만 하면 되니까요. 모든 보기는 주어져 있고 우린 그저 선택해서 돈만 내면 돼요.

 웃기 위해서도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웃기고 재미난 상황을 연출해야 할 필요도 없고, 그러기 위해 인간관계를 하며 엄청난 노력을 들일 필요가 없어요. 사방이 자극적인 것 천지라 웃고싶으면 인스타그램이나 유튜브에 들어가서 적절히 내 요구에 맞는 숏폼영상을 보면 되고요, 울고 싶으면 적절한 슬픔의 강도를 찾아 영상을 보면 돼요.

 섹스도 이제 그냥 너무나도 평범한 경제적 일상적 일이 되어버렸어요. 마음에 드는 상대를 만나 관계를 발전시키고 감정적 통일을 이루는, 사랑이라는 일반적 도식에 기반한 섹스를 위한 일련의 전희 과정 없이 그저 핸드폰 앱을 통해 자신의 성적 욕망을 풀어줄 상대를 찾으면 그만이에요.

 아, 말아 나온 김에 사랑은 어떻고요. 데이팅 앱에 들어가서 프로필을 보고 마음에 들면 좋아요를 누르고, 별로면 싫어요를 눌러 무슨 서류심사 보는 것 마냥 상대를 탐닉해요. 인간성의 여러 복합적 요소들이 양적 데이터로 전환되어서 인간성의 깊이를 알아보기란 더욱 힘들어졌어요.


 모든 것은 이렇게 경제환원적이 되어버렸어요. 효율적으로, 양적으로 계산하는 것이 습관이 되었고 이 효율성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난 것들에는 엄청난 비난과 소외를 가하며 내 삶에 필요 없는 것 마냥 대하죠. 요즘에 집에서 치킨 해 드시나요? 밖에 사먹는 사람들이 더 많아요. 누가 집에서 치킨을 해먹는다면 “사먹지 그걸 왜 해 먹어”라는 소리를 듣기 일쑤에요. 내가 좋아서, 내가 요리해서 먹고 싶어서 그러는 건데도 효율적이지 않다는 이유로 질타를 받아요. 그리고 스스로도 무의식적으로 ‘집에서 치킨을 해먹는 것은 엄청나게 비효율적인 행위다’라고 인식하죠.

 이전엔 인간의 모든 행위를 이뤄왔던 그 무한하고 보편적인 유적 능력들이 이제는 사라져가고 있어요. 배달로 인해 사람들이 더 이상 집에서 뭘 해먹지 않아도 되니까 특정 음식에 대한 조리기법이나 기술은 그 업장을 운영하는 사람들만의 전유물이 되었고, 행복해지는 방법은 심리학자나 철학자만의 전유물이 되었고요, 친구를 사귀는 방법은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을 소유한 메타Meta사의 전유물이 되었어요. 사유하고 창작하는 방법은 챗GPT와 같은 인공지능에게 맡겨버려요. 원래는 저 모든 것들이 우리 모든 인간의 고유한 능력이었는데 말이죠. 이제는 이것들이 전부 세분화되고 부분화되어 하나의 상품으로 자리해요.

 즉, 원래 우리의 것이던 것들을 이제 돈을 주고 사야된다는거에요. 그러니까 이걸 다시 말하면 돈만 있으면 다 된다는 자본주의 논리가 완성된다는거죠. 그러니까 이제 더 이상 인간들은 사유할 필요가 없어졌어요. 요즘엔 회사 시말서도, 자기소개서도 챗 GPT를 사용해서 쓴다는 얘기도 있더라고요. 영상을 볼 때도 예능이나 영상의 자막이 우리의 사유 방향을 명확히 잡아주기에 그 자막을 따라가는 것 외에 별다른 생각은 안해도 돼요. 생닭을 어떻게 먹기 좋게 손질하고 생선 가시를 어떻게 잘 바르는지 고민 할 필요도 없고, 내가 하는 말의 문장 구성이 이게 맞는지 고민 할 필요도 없어요.


 이런 부품화된 사고가 정말 무서운 것은 아렌트가 지적한 것 처럼 전체주의의 가능성을 대폭 열어놓고 있기 때문인데, 부품화된 사고는 더 이상 ‘왜?’라고 묻지 않고 외부 자극에 대해 그저 순응하고 둔감하게 반응해요. 이런 각인들이 모여 아렌트가 말한 ‘대중‘이 형성되는거죠. 이렇게 만들어진 대중은 스스로 전체주의를 지향하게 되는데, 서로가 서로를 감시하고 탄압하며 ’왜?‘라는 질문을 원천 봉쇄하는거에요.

 예컨대 ‘프로 불편러’라고 불리는 사람들 있잖아요. 개그를 개그로 보자 못하는 사람들. 장난식으로 던진 말에 진지하게 반응하는 사람들이요. 그런 사람들한테 “도대체 너흰 뭐가 문제야?” 라고 물으며 불편함과 긴장감을 강압적으로 봉쇄시키고 “우리의 의견에 따라”라고 강요하는거죠. 사실 웃음이 하나의 폭력이 될 수도 있는거에요. 정말 호탕하게 웃자고 만든 상황이 누군가는 자신의 안좋은 기억에 대한 트리거로 발동되어 불편함과 불안함을 느낄 수도 있어요. 가령 저는 희극인들이 젊은 엄마나 나이 많은 엄마를 연기하는 것을 볼 때 애틋한 불편함을 느껴요. “우리 엄마도 나 어릴때 저랬겠지” “우리 엄마도 나중에 나이들면 저러겠지”라는 생각에 슬프기도 하고 고맙기도 하고 불편하기도 해요.

 하지만 부품적 사고를 지닌 대중들은 여기서 웃음과 행복 외의 다른 감정들을 원천 봉쇄시키며 슬픔과 애틋함을 느끼는 사람들에게 개그를 왜 진지하게 받아들이냐는 전체주의적 질문을 내던지죠. “우리의 사고와 행위는 여기서 동일해야 하고 일치해야 해”라는 무사고적 의식이 다양성과 근본적으로 개인이라 불릴만한 객체를 소거시키는거죠.


 방송국과 희극인들이 ‘여기는 웃는 부분이야’라고 지정해 준 대로 웃고 ‘여기는 감동적인 부분이야’라고 지목해 준 대로 울고 하는 부품화된 사고를 가진 개인들은 순응하고 복종하는 것이 습관화 되었기에 그 독단론적 전체주의의 규율 밖으로 나갈 수가 없어요. 김밥이 먹고 싶을 때 항상 사먹거나 배달시켜먹는게 습관화 된 사람은 집에서 김밥을 해 먹는 사람들의 과정 속에서의 인간성을 공명할 수 없죠. 돈이면 다 되고, 인터넷만 있으면 다 되기에 ‘인간성’이라는 것에 대해 ‘굳이’라는 의문을 던지고 이를 거부해요. 예컨대 ‘굳이?’는 이들이 던지는 단 하나의 질문이기도 하죠.

 이렇게 부품화되고 원자회된 대중은 사회의 문화적이고 제도적인 의식 수준을 끊임없이 지연시켜 주권의 존재론적 층위를 하염없이 떨어트리는 바로 그 주체들이 돼요. 다시 말해, 맑스가 지적했던 것 처럼 국가는 국민들의 엄격한 교육을 받아야 하는데, 국민들이 부품화된 사고를 지니고 ‘굳이?’라고 말하고 있으니 국가는 발전이 없는 것이고 사회는, 공동체는, 우리라고 불리는 너와 나는 아무런 발전이 없으며 이것이 바로 혁명이 언제나 실패로 끝나는 이유에요.


 저는 팝송을 많이 듣는데, 케이팝 시장과 비교해서 듣다보면 너무 신기해요. 한국 아이돌의 노래는 언제나 나르시시즘적이고 사랑과 이별에 대해 얘기하고 지극히 개인적인 삶에 대해서 얘기하는데 미국의 팝아티스트들은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발언을 그대로 가사에 녹여내는데 아무런 거리낌이 없어요. 캐이티 페리는 페미니즘에 대해 가사를 쓰고, 비욘세는 정치적 도발을 행하고, 마일리 사이러스는 환경 문제에 대해 소리를 내고요, 샘 스미스는 동성애에 대해 노래하고, 킴 페트라스는 성전환자와 섹스에 대해 노래해요. 마돈나는 흑인 예수에 대해 쓰고 있고, 아리아나 그란데는 이성애적 사고관에 도전하죠. 이들은 모두 거물급 아티스트들인데 이런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도발과 발언을 하는데 아무런 거리낌이 없고, 자신이 지지하는 정치적 정당의 색을 드러내는데 거리낌 없어요. 실제로 이중에는 대중들의 큰 관심으로 빌보드 1위를 거머쥔 곡들과 아티스트들도 많아요.

 이들이 거물급 아티스트들이기에 가능했냐 묻는다면 그건 또 아니에요. 레즈비어니즘의 이야기를 그린 채플 론의 ‘Good Luck, Babe!'가 대중들의 관심을 끌어 역주행을 하고 있고, 또 다른 레즈비어니즘을 그린 도브 카메론의 ’Boyfriend'가 라디오에서 러브콜을 받으며 인기를 얻었고요, 자본주의적 환상을 비판한 로드의 ‘Royals'도 생각나네요.

 이에 비해 한국의 주류 음원 차트인 멜론을 보면 사회적이고 정치적 가사를 담은 곡을 찾아볼 수가 없어요. 그 흔한 동성애 코드도 금기, 여성권과 평등권 얘기도 금기시 되고요, 정치적 발언은 꿈도 못꾸죠. 이런 척도들을 보면서 한국의 의식 수준이 굉장히 뒤떨어져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어요. 우리는 모든 것에 너무 편향적으로 민감하게 반응해요. 정치적 발언은 “절대”금물, 동성애도 ”절대“불허, 페미니즘은 “꼴페미”. 양지에서 우리가 사회적인 이슈들을 다루는 모습이에요. 이것들은 공적 자리(public)에서 인정받지 못하기에 음지로 들어가요 언제나. 심지어 음지에서도 환영받지 못해서 대상이 없는 집단적 독백의 공간으로, 온라인 커뮤니티로 흘러들어가 자리하죠. 친구 사이에 동성애나 페미니즘 혹은 정치적 얘기를 반기고 긍정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요? 이런 얘기들은 언제나 불편하고 꺼림직하고 일상적이지 않은 대화들이에요. 맞죠?

 불화와 긴장을 유발할 바엔 그냥 무화시켜 없애자는거에요. 다양성을 기각하고 개별적 요소들을 기각하고, 이런 것들이 활발히 논의되고 담론을 형성하지 못하니 하나의 조롱거리와 밈으로 자리해서 익명성을 담지한 온라인 플랫폼과 커뮤니티에서는 ‘퀴어’ ‘페미니즘’ ‘사회주의’ ‘게이’ 라는 담론을 주제로 토론의 장이 열리면 비판을 가장하고 비하하고 비난하기 바쁘죠.


 어쩌면 전체주의 대중운동은 이미 시작되었을지도 몰라요. 아니면, 두 번의 세계대전을 겪은 여파가 아직도 길게 후유증으로 남아 우리는 근현대를 살아가는 중일지도 모르죠. 민주주의의 희망이 사라지기 전에 우리는 스스로 부품적 사고를 극복해야 해요. 이는 인간에 대한 해방이자 그 무엇보다 근본적으로 나 자신에 대한 해방이에요. 자본과 사회의 이데올로기가 나를 호명하고 규제하지 못하도록 나를 나로 정립하는 것엔 목숨을 걸어야 할지도 몰라요. 그렇기에 모든 사람들의 의식적 행위가 필요하다는거죠.

 나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의식적으로 전체주의의 위험성을 감지하고 현재 사회상에 과감히 ‘왜?’라고 되묻는 것. 그러기 위해서는 모두가 끊임없이 사유해야 하고 발언해야 하며 목소리를 내야되겠죠. 이는 비단 우리 공동체를 위한 공공의 행위가 아닌 지극히 사적인 행위이기도 합니다. 내 삶의 척도와 가치를 ‘사회적 알고리즘’에서 ‘나 자신’으로 옮겨 가져오는 일이기도 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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