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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서호 May 28. 2024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eudaimonia)

감정이 아닌 행복

 우리가 흔히 ‘행복’이라 하면 어떠한 감정 상태를 떠올립니다. 다시 말해 외부의 상황이나 환경에 의해 우리 마음속에 자아내진 어떠한 정념적 상태를 보통 행복이라 생각하고 사회적으로도 그렇게 정의하는 듯합니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가 제출한 행복은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행복과는 다릅니다. 그렇기에 보통 우리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을 논할 때 이를 ‘행복’ 혹은 ‘happiness'라고 칭하기보다는 원어 그대로 ’에우다이모니아(eudaimonia)'라고 부수적인 설명을 첨가하죠.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서 행복은 다른 그 무엇도 필요로 하지 않는 최고의 목적이자 ‘그-자체-목적’입니다. 즉 에우다이모니아는 모든 목적들의 최상위 목적이며, 그것은 또한 그 자체로 스스로 목적이 됩니다. 이러한 에우다이모니아의 상태를 지향하기 위해서는 그 무엇보다도 이성을 담지한 ‘영혼적 탁월성’이 요구되는데, 여기서 그의 윤리학적 논의점들이 대거 잉태되는 거죠.

 윤리학의 어원을 따라가 보면 ἔθος(에토스)로 하나의 집단이나 공동체의 습속 혹은 개인적 성격이나 습관 등을 의미하는 단어가 그 근저에 놓여 있음을 알 수 있는데요, 다시 말해 윤리학은 ‘습관’과 그로부터 생겨난 ‘성품’에 관한 학문이라는 것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윤리학의 최고 정점에 행복이라는 에우다이모니아를 위치시킵니다. 그렇다는 것은 행복은 지적 탁월성도 아니고 경제적 탁월성도 아닌 습관적 탁월성에 의해 만들어진다는 것이죠.


 “행복은 습관이다. 그것을 몸에 지녀라.” 라는 조지 허버트의 경구가 있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이만큼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론을 가장 정확히 말하고 있는 경구는 없지 않을까 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이 외부의 환경이나 상황에서 비롯된 감정과 의식이 아니고 나의 내부에서 이성을 담지하여 피어났다는 점에서 그 어떠한 상황에도 흔들리지 않는 영혼의 탁월성을 논합니다.

 이러한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론은 행복의 보편화를 가져왔다 바라보는데, 행복이란 내가 돈이 많아서도 아니고, 내가 다른 이들보다 아는 게 많아서도 아니고, 더 좋은 환경에 놓여있거나 남들보다 더 많은 성공을 이뤘다고 해서 점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닌 오랜 습관의 산물이라는 점에서 행복은 그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후험적 보편성입니다.

 더욱이 아리스토텔레스는 당대 다른 철학자들과는 달리 실천을 중요시했지만 아무것도 아는 것 없이 행하는 실천은 빈 껍데기일 뿐, 실천 이전에 그것에 대한 이론과 지식을 첨밀하게 지녀야 한다는 주지주의적 입장을 지닙니다.

 『니코마코스 윤리학』 1권과 10권에서는 각각 이러한 행복의 문제를 다룹니다. 1권에서는 행복에 있어서 실천을 강조하고 10권에서는 1권과는 반대로 이론 즉, 관조를 강조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이런 반대되는 주장은 그에게 인식론적인 단절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실천’과 ‘이론’ 모두 강조하였지만 실천에 앞서 ‘이론’을 더욱 강조하였으며, 실천이 필요치 않은 경우 영혼적 탁월성을 증진시킬 수 있는 관조를 그것의 최고점으로 위치시킨 거죠. 쉽게 말해 일하면서 공부하는 것보다는 그저 공부에만 집중하는 게 낫다는 것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주창한 행복에는 굉장히 오랜 시간이 소모됩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는 감정과 정념과도 같은 ‘소확행’이 아닌 우리의 영혼에 습관을 통해 ‘행복에 도달하는 길’을 내는 작업을 행하는 것이죠.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러한 작업을 통해 영혼적 탁월성을 길러낸 자라면 외부의 부정적 환경들과 상황 속에서도 굳건히 자신의 내면을 유지할 수 있으리라 주장합니다. 그러니 다시 허버트의 경구로 돌아가, 행복은 습관이니 그것을 몸에 지니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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