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웅호걸

글을 여덟 짓다

by 프로기

제시어: 채식주의자, 현혹, 조물주

제목: 영웅호걸


이 말을 들어보소. 깊고 깊어 빛 한 줄기 들어오지 않는 그 동굴에서 있었던 일 말이오. 호랑이와 곰이 쑥과 마늘을 백일동안 먹고 버텨야 했거늘, 호랑이가 참지 못하고 달음질쳐 도망갔다는 이야기 있잖소. 속사정을 일러줄테니 잘 들어보오.


조물주가 이 땅에 처음 사람을 내렸을 적 일이지요. 환인은 그 아들 ‘환’을 세상에 보내었소. 곰과 호랑이가 사람이 되고 싶어 환을 찾아가 “부디 우리 둘이 사람 좀 되게 해주시옵소서” 하고 빌었다지요. 아 글쎄, 거기까지는 틀린 말이 없소. 그런데 그 뒤가 다르다 이거지.


환은 쑥과 마늘을 주며 백 일을 참아보라 했소. 호랑이랑 곰은 해보마라고 했다지요. 그러다 보름 쯤 지났을까. 환인이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의 아들 ‘환’이 어엿한 사내가 된지라. 환에게도 베필이 필요하다 생각했었소. 환인이 환에게 이르기를, “호랑이와 곰, 둘 중에 지아비의 은덕을 알만한 하나를 골라 부인으로 훗날 삼으라” 하였소. 환도 마침 적적했던 터라, 아버지 생각을 따르겠다 화답했지.


베필이 될 지 모른다 하니, 환 마음이 그날로 달라진지라. 호랑이도 어여뻐 보이고, 곰도 어여뻐 보였지. 그 때부터 환은 매일같이 동굴에 들렀다오.


“암컷치고 참을성이 참 대단들 하오. 고기만 먹던 이가 풀만 먹기 쉽지 않은데.”

“호랑이는 해바라기꽃같고, 곰은 동백꽃같소. 꽃같은 그대들이 사람될 날을 일구월심(日久月深) 하오.”


환은 호랑이와 곰을 만나 만단정회(萬端情懷)하는 시간이 즐거웠다오. 훗날 베필 삼으려면 가르쳐야 할 것이 많다 생각한 게지. 아버지 환인에게 보고 배운 말을 그대로 읊어 주었소.


호랑이 옛 기운으로 바윗돌을 들어올리자, “여자 행실 참할 것” 답해주었지.

곰이 거무튀튀한 털을 다듬지 않자, “여자 용모 아름다울 것” 알려주었지.

호랑이와 곰이 대답없자, “부인 미덕은 남편에 순종할 것” 이라 하였다네.

호랑이와 곰 본래 짐승의 우두머리라, 이와중에도 여러 산짐승들이 동굴에 들려 문안인사 올리는데.

그걸 본 환이 말하기를 “아녀자 미덕 바깥 일에 발 길 끊을 것” 훈계를 했다지.


그러던 어느 날. 호랑이가 마늘을 집어 들다 기운이 빠져 또르르 흘리고 말았네. 호랑이는 또르르 굴러간 마늘을 주우러 따라갔소. 아글쎄, 근데 그게 동굴 밖이라. 호랑이가 마늘을 집고 고개를 들었는데 세상이 훤하게 펼쳐져 있었던 게 아니겠소. 눈 크게 뜨고 보니, 자기 옛날이 생각난지라. “갑갑하여 나 죽겠소!” 외쳐가며 산으로 들로 뛰어다녔지.


호랑이 본래 짐승의 왕이었던지라. 바깥에 관심 많고, 욕심 많고, 용맹하고, 꽃보다는 천 년 된 소나무에 가까웠었소. 동굴 밖에 나가서야 호랑이 깨달았지. 쑥과 마늘 먹고 참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나, 환을 따르면 한평생 시종 노릇하고 살겠구나. 사람되고 싶었지, 환의 여자되고 싶었나. 곰과 함께 떠나려 동굴로 돌아갔소.


한참을 태양 빛을 받다 동굴에 들어가니 깜깜했지. 잘 보이지 않아 호랑이 호령하였소. 쩌렁쩌렁 천둥번개보다 더 우렁찬 소리로 호령하는데.

“어-흥. 곰아. 어-흥. 이 곰아 어딨느냐. 우리 세상 밖 호령하던 시절이 여자 사람보다 낫다. 으르렁- 어-흥.”


곰 깜짝 놀라 여짜오되, “호랑 낭자 어찌 그리 되었소 하였다오. 곱디 곱게 목소리를 가꾸라 하늘같은 환이 알려주었는데, 어찌 다시 그리 무시무시해졌소. 노력이 아깝지도 않소. 동굴 밖으로 나가더니 어디 홀려왔구먼 자네.” 하였지.


호랑이는 곰이 안타까웠지. “홀린 건 자네일세. 억지로 맞춰 살기를 싫어하고 본래대로 살기를 즐거워함은 인정에 당연커늘, 사람되고 싶은 마음을 부인되고 싶은 마음으로 환이 현혹시켰으니 통곡할밖에.”


하늘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환인이 호랑이 괘씸한지라. 베필을 하나 잃은 것도 아쉬운데, 둘 잃게 생겼으니 말이오. 곰마저 떠날까 마음 다급한지라. 환인은 호랑이가 동굴에 들어오지 못하게 영영 쫓아버렸다오. 사정 모르는 곰은 시간이 흘러 웅녀가 되었지.


그 후로도 호랑이 의리를 생각해 끝까지 곰을, 웅녀를 여러 번 찾아갔지. 그러자 환인이 찾아오는 그 꼴도 보기 싫어 사람이 호랑이를 영영 무서워하도록 만들어버렸소. 게다가 호랑이를 고작 백 일을 참지 못해 뛰쳐나간 짐승으로 기억되게 하였지. 호랑이 답답한 마음에 그 때부터 줄담배를 폈다지 아마. 조선시대나 듣던 호랑이 얘기, 참 딱하지 않소.

매거진의 이전글비틀어 선 초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