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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ighteoff Feb 25. 2021

그냥 재미로 보는 거지 뭐

하지만 어느새 과몰입



유사과학은 재미있다. 마치 학창 시절 지루한 수학공식은 깜지를 써도 써도 못 외웠지만 좋아하는 아이돌 그룹 멤버의 생년월일은 나이순대로 10초 안에 모두 욀 수 있는 것처럼, 수많은 실험과 연구로 증명된 '진짜 과학'은 범접하기 어렵고 거리감이 들지만 몇 번의 체크만으로 도출되는 나의 심리나 성격 같은 유사과학은 어쩐지 신빙성이 그득해 보인다.


몇 줄 적힌 성격 유형을 심각한 표정으로 정독하고 캡처도 야무지게 한다. 인터넷에 본인의 유형을 시시때때로 검색해본다. 다른 유형의 특징까지 외워가며 주변 사람들과 매치해 재단한다. 유행처럼 쏟아지는 또 다른 성격 테스트를 누구보다 빠르게 마치고서 친구들에게 열심히 공유하는 것이 일과다. '그냥 재미로 보는 거지, 뭐.' 가볍게 말하지만 누구보다 결과에 과몰입 즉, 과하게 몰입 중이다. 어쩜 이렇게 구체적인 비판을 할 수 있냐고? 비판이 아니고 자아성찰이다. 이 사람은 바로 나다.




MBTI 성격검사를 처음 접한 건 스무 살 대학생 때였다. 당시 듣던 강의인 '심리학의 이해'에서 처음으로 해봤다. 나온 결과를 핸드폰 메모장에 적고선, 흥미가 사라져 금세 잊어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몇 년 후, 우연히 MBTI를 다시 해볼 기회가 생겨 재검사를 했다. 간호사 복장을 한 캐릭터가 나오고 아래로는 유형의 특징이 줄줄이 적혀 있었다. 예전과 달리 한번 찬찬히 읽어보았는데, 아래로 내려갈수록 고개를 천천히 끄덕이게 되는 것이다.


이거 진짜 난데?


그랬다. 내가 알고 있는 내 성격, 성향이 속속들이 적혀 있었다. 신기해하다가 문득, 몇 년 전 검사를 했던 것이 떠올라 메모장을 뒤져 그때 적어둔 결과를 찾아봤다. 놀랍게도 똑같았다. 스무 살 때도, 이십 대 후반인 지금도. 그렇다면 나는─ 평생 이 MBTI였다는 거잖아? (아님)


뒤늦게 흥미가 생겨 여기저기에 내 유형을 검색하기 시작했다. 과몰입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캐해석'이라는 단어가 있다. 알 사람은 알 건데, '캐릭터 해석'이라는 뜻이다. 말 그대로다. 영화, 드라마 그리고 애니메이션 등 작품에 나오는 캐릭터가 어떤 인물인지 해석하는 것이다. 대부분 가상 인물이지만, 실 인물에게도 쓰이곤 한다. 주변 사람에게서 듣는 내 얘기야말로 제일 재밌고 신선하지 않? 그게 바로 내 캐해석을 남에게 듣는 것이다. 그리고 이건 MBTI 성격검사에도 적용된다. 구체적으로 쓰인 내 캐해석을 보고 있자면, 웃돈 주고 신점 보는 사람처럼 미친 듯이 고개만 끄덕이게 되는 것이다.


나는 유튜브와 각종 SNS를 뒤져가며 검증된 내 캐해석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이렇게 적으니 빼도 박도 못하는 오타쿠처럼 보이는데, 오타쿠는 사실이므로 굳이 부정하지 않겠다. 앞서 언급된 '간호사 복장'에서 눈치챈 사람도 있겠지만, 내 MBTI 유형은 ISFJ다. 그리고 알아보면 이 유형은 그렇게 개성 있거나, 창의적이지는 않은 성향이라고 나온다. 나도 내가 재미있는 사람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대놓고 '재미없고 답답한 유형'이라는 소릴 들으니 그것 참 골절상이 제법이었다.


이후 나는 주변 사람들의 MBTI 유형을 알아냈다. MBTI가 뭔지도 모르는 가족들에겐 직접 휴대전화를 들이대며 검사를 강요하고, 또 좋아하는 연예인은 어떤 유형인지 검색해서 외우고 다녔다. 일부러 달달 외운 건 아니고, 계속 알아보고 그 사람과 매치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기억하게 된 격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단순 재미로밖에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몇 달이 넘어서자, 나는 이제 주변 사람들의 말과 행동 하나하나에서 MBTI 유형 특징을 잡아내기 시작했다. '네가 그렇게 말하는 이유는 네가 T(사고형) 유형이기 때문이야.', '언니는 ESFJ고 막내는 INFP잖아. 네 개 중에 세 개가 달라. 그래서 둘이 서로 안 맞는 거야.', '너는 P(탐색형) 유형이라서 책상 정리를 안 하는 거야.' 등등. 남들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MBTI를 운운해댔다. 친구들은 내게 MBTI학 명예교수 직책을 선사했다. 나는 사양하는 척하다 그냥 즐겼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놈의 MBTI 얘기 좀 그만 하라는 말이었을 텐데, 안타깝게도 눈치를 나잇값과 함께 팔아넘긴 나는 미처 몰랐다.


그럼 주변인에게만 시도 때도 없이 MBTI를 언급했냐, 하면 또 그건 아니다. 나는 나에게도 잣대를 들이밀었다.

'나는 ISFJ니까 집순이인 건 당연해. 나는 규칙을 좋아하고 안정을 추구하는 성격이니까 오늘도 계획을 짜야겠다. 단, 내가 늘 하던 방식으로, 늘 하던 일만 해야지. 은근히 보수적인 성격이니까, ISFJ는.' 이런 식이었다. 처음에는 '나는 ISFJ고, ISFJ는 이러하니까, 이렇게 말하고 행동하며 살아야지.'라고 생각했으나 갈수록 과몰입의 정도가 심해져 '나는 ISFJ고, ISFJ는 이러하니까, 이렇게 말하고 행동하며 살아야지.'로 변하고 있었다.


만약 나의 변화가 결과적으로 긍정적인 영향을 줬다면, 이 글의 분위기가 이처럼 부정적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뭐든 과유불급이라고, 나는 단순 재미를 넘어 나 자신을 통제하고 관리하듯 변해갔다. 그리고 주변 사람들을 사이트 속 MBTI 유형 캐릭터처럼 각진 틀 안에 끼워 넣고 그야말로 단편적인 캐해석을 일삼고 있었다. '단편적인 캐해석'이라고 말하면 낯설게 들릴 수도 있겠는데, 말하자면 '너는 이런 생각으로 이렇게 말하고 행동했겠지? 왜냐하면 이 유형이니까. 그리고 너와 나는 안 맞아. 왜냐하면 MBTI 유형이 너무 많이 다르니까.' 이런 식으로 멋대로 판단하고 단정 지었다는 뜻이다.


굳이 MBTI와 관련짓지 않아도 나처럼 나쁜 버릇을 가진 사람들도 있다. 주로 자녀를 가진 부모의 시선이 그러하다. 왜냐하면 '너는 내가 알아' 이 마인드 때문이다. '너는 내가 제일 잘 알아. 네가 무슨 생각하는지도 알 수 있어.' 자녀 입장에선 숨 막히고 억울하다. 상대적으로 나이가 어리니 당연히 머릿속에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훤히 보이겠지만, 존중해줘야 한다. 특히 자아가 형성되는 사춘기부터는 더. 무슨 생각하는지 알든 모르든, 모르는 척 물어봐줘야 한다. 어쩌면 예상과 다를 수도 있다. 겨우 16가지로 나뉘는 성격 유형으로 사람을 판단하며 다 아는 척 굴었던 돌팔이 교수인 나 역시 틀린 적이 부지기수였듯이.




내가 돌팔이 교수직에서 내려온 이유는, 다름 아닌 나 때문이었다. 최근 우후죽순으로 나타나는 재미있는 성격 테스트를 하다 보니 예상 밖의 결과가 많이 나오는 것을 발견했고, 교수로서(작작하라구요? 알겠습니다.)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원래는 결과가 죄다 비슷비슷했다. 왜냐하면 나는 ISFJ 유형과 그 특징에 과몰입하는 사람이었으니까. 사실 이런저런 검사를 하도 많이 하다 보니, 질문과 보기만 봐도 어떤 결과가 나올지 눈에 빤히 보일 지경이 되었고, 나는 어느새 ISFJ 유형과 닮은 결과를 보기 위해 의도적으로 답을 고르고 있었다. 그러니 어떤 테스트를 내놓아도 당연히 다 똑같은 결과가 나오는 것이었다.


하지만 점점 그 유형을 벗어나기 시작한 것이 보였기에, 지난달 MBTI 검사를 다시 해봤다. 다섯 번은 넘게 해서 이제는 거의 문제를 외울 지경이었다. 그래서 이번에도 똑같거니 했는데, 놀랍게도 난생처음으로 바뀐 결과가 나왔다. ISFJ가 과거형이 된 것이다! 갑작스러운 본인 캐해석 변경을 요구받은 나는 당황스러웠으나 한편으론 기뻤다. 그랬다. 사실 MBTI 타령이 제일 지겨웠던 사람은 나였다. 나는 나의 새로운 모습을 보고 싶었던 것이다.


사람 사는 것 다 똑같다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사람만큼 다양한 면면을 가진 존재는 없다. 우리는 게임 속 NPC가 아니다. 같은 질문을 해도 그때그때 다른 답이 들려올 수 있다. 나도,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도 마찬가지다. 이렇게 당연한 진리를 뒤늦게 깨달은 나는, 새로운 모습의 나를 보기 위해 기꺼이 과몰입을 버리기로 했다. 너무 깊게 골몰하지 않고, 새로운 것에 도전하고, 계획을 짜지 않고 즉흥적으로 행동하는 내가 되어보고 싶으니까. 여태까지 MBTI를 핑계 대며 좀처럼 발들이지 않았던 영역에도 다가가 보고 싶고, 또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되 누구도 닮지 않은 오롯한 내가 되고 싶고, 무르지만 단단한 사람이 되고 싶으니까.


물론 한번 맛들린 재미를 버리기가 쉽지는 않았다. 다만 그 이상은 넘지 않기로 했다. 말 그대로, '그냥 재미로 보는 거지 뭐.'를 실천하며. 주변 사람들에게도 더 이상 틀 속 이미지를 바라지 않게 되었다. 대신 내가 그들에게 되고 싶은 이미지는 만들어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남들이 하는 내 캐해석을, 내가 원하는 대로 바꿔보는 것이다. 아마 내가 나에게 과몰입을 한다면 좋은 캐해석이 나오지 않을까?


… 정말이지 누가 봐도 오타쿠스러운 문장이라 브런치에 발행하기 망설여지지만, 이만큼 내 생각을 만족스럽게 전달한 문장이 없으므로 다른 말로 바꿀 수 없다. 앞으로는 더욱 성숙한 어휘력으로 찾아뵙겠습니다.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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