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nighteoff Mar 25. 2021

어떤 인생

이런 사람도 있구나



대놓고 말하자면 나는 나대는 성격이다. 도저히 말하지 않고선 못 배기는 것이 있으면 못 참는다. 참을 때도 많지만 안 참을 때가 더 많다. 실컷 말을 하고 나면 나중에 후회하긴 하는데, '말하지 말걸'이 아니라 '이 말을 더 해줄걸'이 된다. 이건 아주 어릴 때부터 형성된 성격이라서, 좀처럼 고쳐지지 않는다. 이런 사람은 양날의 검이다. 솔직한 사람이자 눈치 없는 사람이 된다. 거짓말은 안 하는 대신, 내가 속는다. 장단점이 골고루 있다.


나의 이런 성격은 학창 시절에 '타깃'이 되기 쉬웠다. 초등학생 때는 체구도 작으면서 부반장이랍시고 나대는 게 꼴 보기 싫었는지 어쨌는지 주로 남자애들이 괴롭혔다. 운동장 조회를 서는데 뒤에 선 남자애가 자꾸 때려서 운 적도 있다. 지금 생각해도 욕 나오는데 당신 읽는 글에 다짜고짜 욕을 써 갈길 순 없으니 참아 보겠다. 내가 화가 나는 이유는 그때 앞에서 보고도 모른 척하던 담임교사 때문이다. 내가 맨 앞줄이었는데도.


짝꿍인 다른 남자애가 책상에 선을 그어놓고 넘어오는 물건을 뺏고 팔을 꼬집기도 했다. 나는 종례가 끝나면 혼자 남아 책상에 있는 선을 지우개로 벅벅 지웠다. 내 기억에 울지는 않았다. 운동장 그 애랑 같은 애였는지는 모르겠다. 기억이 흐릿하다. 그땐 아마 고학년이었던 것 같다. 저학년 때는 또 다른 남자애들이 괴롭혔는데, 내가 엄마한테 일러서 엄마가 그 집에 전화를 했다. 지금 생각하면 당시 엄마가 걱정이 많았을 것 같다. 나는 그때 날 괴롭혔던 남자애 이름도 얼굴도 기억 안 나지만, 수화기를 들고 통화하던 엄마는 기억이 난다. 그날 그 남자애로부터 어설픈 사과를 받았고, 이후엔 괜찮았던 것 같다. 소용없었더란 기억은 나지 않는 걸 보니.


하여튼 힘든 일이 많았는데 그럭저럭 컸다. 나의 나대는 성격은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이 말이 무슨 뜻이냐면, 그런 일들이 내 성격을 뒤바꿀 정도로 대단치 않았다는 뜻이다. 나는 절친한 여자 친구들이 있었고, 솔직히 말해서 나 잘난 맛에 살았다. 장래희망이 선생님과 은행원이었다. 선생님은 그냥 공부를 잘하니까 되고 싶었고, 은행원은... 나는 그때도 지금도 돈 관리를 좋아하기 때문에 되고 싶었다.


중학생 때는 좀 예민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가 제일 힘들었던 것 같다. 눈치 안 보고 나대던 지난날과 달리 나는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없는 걸 키우려니 쉽지 않았다. 앞에서는 하하호호 즐겁게 노는데 뒤에서는 서로를 욕하는 게 이해가 안 갔다. 쟤가 뒤에서 너 욕하던데? 얘기하고 나니 이상하게 내가 곤란해졌다. 지금은 왜 그러면 안 되는지 알지만 그때는 몰랐다. 나는 처음으로 말조심하자고 다짐했다. 그즈음부터 말을 잘 안 했다. 다연이는 조용한 성격이야, 꼬리표처럼 달고 다녔다. 덩치 큰 남자애들이 시비를 걸면 꼼짝 못 했다. 나는 늘 성장이 느렸다. 아마 그때 자존감이 많이 깎였을 것이다. 자존감이라는 단어조차 몰랐지만 그랬다. 힘들 때면 '덕질'을 했다. 말하자면 도피처였다. 덕질하면서 친구도 많이 사귀었다. 어느 해에는 빨리 방학이 오기만을 기다렸고, 어느 해에는 그러지 않아도 괜찮았다. 그렇게 살았다.


고등학생 때는... 초중고 중에서 제일 나댔다. 표현이 좀 그런가? 하여간 조용한데 시끄러웠다. 유명하거나 그러지는 않았는데 덕질을 너무 열심히 했다. 잠도 엄청 많아서, 반에서 '엇 쟤 자고 있네, 나도 자야지'에서 '쟤'를 맡았었다. 잠이 많던 이유는 하나뿐이다. 밤에 덕질을 해야 했으니까. 덕분에 성적이 좀 미끄러졌다. 덕질 때문에 물리적으로 공부를 할 시간이 없었다. 그땐 애들이 비교적 머리도 커져서 그랬는지 괴롭힘이 별로 없었다. 참 신기하지. 나는 늘 그대로였는데 어느 해에는 학교 가는 것조차 싫었고 어느 해에는 괜찮았다는 것이. 얼마나 사소한 것을 명분이랍시고 만들어내는지를 알 수 있는 순간이다.


대학 때는 '나댐' 정도가 절정을 찔렀다. 자기 비하 같지만 난 나대는 내가 좋으니까 내버려두기로 한다. 그땐 감투도 많이 썼다. 목소리도 엄청 커서 남한테 지적도 많이 받았다. 낯가리고 말은 별로 없는데, 목소리는 크고 할 말은 다 했다. 정말이다. 모순 같지만 사람은 누구나 양면성을 지니므로 믿어주길 바란다. 눈치는 여전히 없었다. 알 사람들은 알겠지만 대학교는 눈치싸움이다. 그래서 나는 매번 졌다. 어쩌겠어. 중학생 때도 못 키웠는데 대학 때라고 뭐 별달라. 나는 그냥 살았다. 누가 나를 붙잡아놓고 '다연아, 너 이럴 때 이러면 안 돼.'라고 말하기 전까지는 내 맘대로 하고 다녔다. 겁이 없어서 덩치 큰 선배한테도 가지가지한다고 꼽을 줬다. 죄송합니다. 건강하시죠. 사실 안 죄송해요.


회사 들어가서도 상사랑 싸웠다. 주제는 여성 혐오였다. 도저히 굽힐 수 없었다. 내가 잘리더라도 할 말은 해야 했다. 몇 주 동안 똑같은 얘기로 다투다가 이 얘기는 더 이상 하지 말자고 합의를 봤다. 그래 놓고 또 다투곤 했지만. 다행히 잘리진 않고 내가 스스로 나왔다. 다음 회사에서는 다 괜찮았는데 뭔가 자꾸 힘들었다. 누구랑 싸우지도 않았는데 지쳐 있었다. 들리는 데에서 욕을 먹으니까 이건 또 색달랐다. 내 일 내가 찾아서 해도 왜 하냐고 지적질을 당하니 이해가 안 됐다.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우울증이 오면서 뇌가 고장 나는 것 같아 그냥 퇴사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릴 때 당하던 괴롭힘으로 인해 본능적으로 방어태세가 되었던 것 같다. 이건 내가 어떻게 못 하는 거라서 그냥 묻어두기로 했다.


살아온 날들에 공통적으로 '눈치 없다'라고 썼지만 사실 눈치를 많이 보긴 한다. 이 정도 괴롭힘의 역사가 있으면 그런 시늉 정도는 할 줄 알게 된다. 그냥 모든 일에 눈치를 보지만, 왜 그래야 하는지 이해는 못하고 대충 어림짐작할 뿐이다. 내 나름의 '사회성'이다. 없는 사회성 짜내가면서 남에게 관심을 기울여 '눈치껏' 행동하지만 여건만 된다면 그런 신경 안 쓰고 살고 싶다. 정말 좋아하지 않는 이상 그렇게까지 관심이 가지 않는다, 남에게는. 나의 오랜 친구들은 알고 있다. 내가 의외로 무심하다는 것을. 궁금해하지 않고 기억해주지 않는다는 것을. 겉으로는 신경 쓰는데 다음 날이면 까먹는다. 거의 세뇌시키듯이 매일매일 말해줘야 기억할 수 있다. 솔직히 이건 공감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나만 이래? 나만 남들 근황이 별로 안 궁금해? 나만 그렇다면, 친구들아 미안하게 됐다. 내가 좀 더 노력해볼게.


내가 이 글을 발행할 수 있을까? 아무리 익명이라도 가족한테도 숨겨둔 과거를 드러내기란 보통 용기가 필요한 것이 아니다. 또 아예 익명도 아니고 이름 다 깠네. 어쩌겠어. 그냥 이렇게 살아온 사람도 있다고만 알아주면 좋겠다. 어차피 내 삶 전체를 말한 것도 아니고 극히 일부다. 나는 충분히 행복했고, 괜찮게 성장했지만, 열등감도 많고 소심하다. 비록 교통사고 이후 미미한 공황이 있지만 우울한 하루를 극복하는 방법을 안다. 좋은 점이 있으면 나쁜 점도 있기 마련이다. 어쩌면 자아는 한 가지 색이 아니라 여러 색이 제멋대로 섞인 무지개색일지도 모른다.



작가의 이전글 둘째는 파란색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