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가 퇴사를 했다
1년 간 나를 괴롭히던 A가 사라졌다. 그는 갑작스러운 퇴사 통보 후 일주일 만에 자리를 비웠다.
좋은 일일까? 그 소식을 들었을 때는 사실 안도했다. 매일 그의 옆에서 사람 취급도 받지 못한 채, 오늘은 어떤 무시와 짜증을 들을까 노심초사하며 살지 않아도 되었으니까.
이런 나의 고충을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 있었다. 바로 과장님이었다. 과장님은 누구보다 가까이서 우리의 관계를 봐왔고 무엇보다 A와 같은 업무를 공유하셨기에 그의 성정도 잘 파악하고 계신 분이었다. 그러나 과장님은 이 상황에 개입하고 싶어 하지 않아 하셨다. 상급자의 입장에서 중립을 지키고 싶으셨던 것일까. 되려 힘들어하는 내게 'A 얘기를 들어봤는데, 서로 오해가 있는 거 같아. A 잘못도 있지만 A 입장에서는 네 잘못도 있으니까.'라는 식으로 말씀하시곤 했다. 당시 나는 최대한 A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 죽은 쥐처럼 살던 중이었다. 과장님의 그런 말씀을 들을 때마다 이미 한 번 죽었던 쥐는 더 죽어버릴 것만 같았다. '그런 식으로 제가 A를 이해해야 한다면, 저는 누가 이해해 주나요?'라고 이야기 한 적이 있었지만 달라지는 건 없었다.
결정적인 일은 A가 퇴사하기 전날에 일어났다. 과장님께서 조용히 오시더니 그를 위해 롤링페이퍼를 해주어야 하지 않겠냐는 것이다. 1년간 내가 받은 수모를 고려해서는 절대 꺼낼 수 없는 이야기였다.
"제가요?"
"네가 하지 누가 하니."
"...저번에 B가 퇴사했을 때는 아무도 안 챙겼잖아요."
A에게 상처받은 B가 퇴사했을 때는 롤링페이퍼 이야기도 나오지 않아 결국 내가 사비를 털어 사진이 담긴 롤링페이퍼를 만들어 주었었다. 그런데 A가 나간다고 하자 아픈 손가락이 더 마음에 걸리는 것인지 롤링페이퍼를 만들자고 제안하시는데, 그걸 또 내가 만들라는 것이다.
"너 몰랐구나? 이런 거 원래 막내가 하는 거야."
"저는 이제 막내가 아닌데요..?"
실제로 나는 막내가 아니었다. 몇 달 전 C가 입사했기 때문이다.
"C는 남자니까. 여자가 이런 걸 잘하지."
그날 과장님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씻을 수 없는 상처가 되어 가슴을 후벼 팠다. 업무 중에 눈물이 차오르는 걸 애써 삼켰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묵묵히 혼자 문구점에 가 준비물을 사서 퇴근 후에 롤링페이퍼를 만들어 내는 일이었다.
다음 날, 팀장님은 롤링페이퍼를 A에게 전달했고 A는 나와 C에게(A는 C가 나와 친한 것을 본 후로 C 또한 무시로 일관했다) 사과하지는 못할 망정 '자기와 같은 선배가 되지 말라'는 오글거리고 어이없는 멘트를 남기고 퇴사를 했다. 사람들은 그래도 할 일은 다하고 나갔으니 책임감은 있지 않느냐며 그를 포장했다. 대하기 힘들고 제멋대로이긴 하지만 불쌍한 사람이다. 자기도 얼마나 외로웠겠냐. 이해하자며 자신들끼리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은근히 그 이해를 내게도 요구하는 것이다. 가해에 이해를 요구하지 말라고, 그것이 피해자에게 얼마나 큰 상처를 주는지 모르느냐고 외치고 싶었다. '나는 이런 상처가 있어요. 이런 피해를 입었어요. 그래서 그를 이해할 수 없어요. 제가 받은 상처는 어디서 보상받나요?' 그러나 차마 말할 수는 없었다.
가해자를 이토록 열심히 이해하려고 애쓰는 이들에게
피해자의 목소리는 '피해의식'으로 밖에 들리지 않겠는가.
A가 떠나기 전 몇 달 동안 그는 팀 내 다른 사람들과도 마찰이 있었다. A는 자진해서 늘 혼자 밥을 먹었고, 팀과 함께 하는 모든 자리에 갖은 핑계를 대며 참석하지 않았다. 상황을 잘 알지 못하는 다른 팀 팀장님은 우리 팀이 그를 왕따 시키는 것이 아니냐고 핀잔하셨다. 상황을 겉핧기 식으로 바라보며 함부로 판단하는 사람들과, 상황을 알면서도 건들기 어려운 가해자보다 다루기 쉬운 피해자의 상처에 이해를 요구하는 사람들. 그러면서 마치 자신들이 대단한 용서라도 한 것 마냥 인자한 표정을 지었다. 그들의 표정이 너무나도 너그러워 이제 내가 가해자가 된 것만 같았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을 품지 못한 속 좁은 사람이 바로 나였다.
이런 상황에서 대처하는 법은 늘 어렵다. 자신이 너그러운 중재자라고 믿는 사람들이 펼치는 궤변에서 나를 방어하는 법은 학교에서 가르치지 않는다. 가해는 가해일 뿐이라고, 거기에 이해는 있을 수 없다고 법은 이야기한다. 그러나 이해와 인정이 강력하게 작용하는 사람 사는 세상에서 이 당연하고도 객관적인 논리가 적용되기에는 여전히 해소할 수 없는 이질감이 남아있는 것 또한 부정할 수 없는 서글픈 현실이다.